그날, 계단을 내려온 사람들과 올라간 사람들

9.11 다큐멘터리를 끄고도 끝내 남은 질문

byWONA

늦은 밤, 9.11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화면을 멈췄다.


무서워서였다. 폭발 장면이나 무너지는 건물 때문은 아니었다. 그날 아침 커피를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들, 출근길에 가족과 마지막 통화를 나눈 사람들, 계단참에서 서로를 부축하던 낯선 사람들 때문이었다.

화면 속 사람들이 '저기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나와 똑같이 평범한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나는 어느새 그 건물 안에 나를 세워 두고 있었다.


내가 저기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이 너무 생생해서 숨이 짧아졌다. 그리고 질문이 따라왔다.


도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 걸까.


이유는 있어도, 답은 없다

설명은 있다. 알카에다는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과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등을 공격의 명분으로 내세웠고, 1998년에는 미국인이라면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공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정부를 선택하고 세금을 내는 시민도 공범이라는 논리였다. 9.11 직후 여러 무슬림 지도자와 단체가 무고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이슬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며 이를 규탄했다는 사실도 함께 적어 두어야 한다.


그 공격은 순간적인 광기가 아니라 몇 년에 걸쳐 설계된 작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아침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보여 주는 것 자체가 무기였다. 희생자의 무고함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공포를 키우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설명을 다 듣고 나서도 물음은 그대로 남았다. 그날 희생된 사람들은 90개가 넘는 나라에서 왔다. 그중에는 무슬림도, 이민자도, 식당 직원도 있었다. '공범'이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는 그들의 이름만 읽어도 드러난다.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둘을 섞지 않기로 했다.


괴물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음 질문은 더 무거웠다. 어쩌다 저런 사람들이 생겨나는 걸까.


우리는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처음부터 괴물이었기를 바란다. 그래야 그들이 나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된다. 괴물이라는 말은 그래서 편하다. 이해되지 않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공격의 실행을 이끈 무함마드 아타는 함부르크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역사는 평범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대량 폭력에 가담해 온 사례를 거듭 보여 준다.


괴물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오히려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이 어떤 길을 거쳐 그런 일을 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다. 그 길에는 비슷한 것들이 반복해서 놓여 있다. 모욕감과 고립감, 모든 고통의 원인을 '저들'에게 돌리는 생각, 서로를 더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집단, 그리고 상대를 사람이 아니라 적이나 벌레, 숫자로 부르는 언어. 그 끝에 선 사람은 자신이 악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옳은 일을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그들을 이해해 주자는 뜻은 아니다. 그 길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그들은 선택했고, 바카라임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다. 다만 그들이 처음부터 다른 종류의 존재였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그 길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보지 못한다. 정말 두려운 것은 괴물이라는 별개의 종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계단을 올라간 사람들

그런데 이 사실에는 반대편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소방관들은 계단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 훈련받은 사람들이었지만, 훈련이 계단을 오르는 선택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같은 날, 같은 재난 속에서 한쪽은 사람을 숫자로 만들었고 다른 한쪽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고 목숨을 걸었다. 사람은 자신이 되풀이한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해치는 사람도, 구하는 사람도.


종교와 철학은 오래전부터 저마다의 언어로 같은 경고를 해 왔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모든 존재가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자비의 가르침도, 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는 칸트의 문장도 그렇다. 물론 같은 가르침이 사람을 죽이는 명분으로 동원된 역사도 길다. 가르침이 있다고 사람이 선해지지는 않는다. 갈림길은 그것을 '남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쪽으로 읽느냐, '우리는 옳고 저들은 틀렸다'는 쪽으로 읽느냐에 있다.


그 많은 언어가 지키려 한 것은 어쩌면 한 문장이었을지도 모른다.


네 앞에 있는 사람이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라.


다시, 그 밤

다큐멘터리를 끄고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무서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 알았다. 내가 계속 "왜 무고한 사람들을"이라고 묻고 있었던 건, 그날 납치범들이 스스로 지워 버린 감각이 내게는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타인을 사람으로 보는 감각. 그 감각을 지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낯선 사람의 죽음을 숫자로만 흘려보내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날 남겨진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마지막 전화와 음성 메시지들이다. 유나이티드항공 175편의 한 승객은 아내의 음성 사서함에 비행기가 납치됐고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한 뒤,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달라고 했다. 93편의 한 승무원은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그날의 통화와 메시지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거듭 등장한다.


우리는 평소 무엇이 중요한지 자주 헷갈린다. 돈과 성취와 인정과 억울함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이 벗겨졌을 때,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돌아갔다.


같은 비행기 안에서 한쪽은 사람을 숫자로 만드는 계획을 실행했고, 다른 한쪽은 마지막으로 사랑을 남겼다. 그 순간 사랑한다는 말은 감상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끝까지 사람으로 부르는 일이었다.


그날 계단을 내려온 사람들과 올라간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시간을 사랑이라는 말에 쓴 사람들.


나는 무너진 건물보다 그 안에서 서로를 붙잡았던 손들을 기억하기로 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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