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주 북페어 그 이후
아빠와 나는 가끔 시험지를 바카라상 위에 놓고 나란히 앉았다. "주현이 공부 좀 봐달라"는 엄마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굵은 빨간 색연필(하얀 심지를 아래로 내려 돌돌 말린 색연필 본체를 뜯어 쓰는 스타일)로 채점을 마친 나의 시험지는 눈송이와 빗줄기가 섞여 장관을 이뤘다. 어쩌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시험지가 있으면 아빠는 "그래, 이건 잘했네" 하고 담백하게 칭찬을 해주셨다. 하지만 우리가 오래 들여다본 시험지는 비가 내리는 시험지지, 눈이 내리는 시험지가 아니었다.
"틀리는 건 괜찮아. 틀릴 수도 있지. 중요한 건 왜 틀렸는지 들여다 보고 다음번에 똑같은 실수를 안 하는 거야. 똑같은 실수를 계속하면 바보지." 빨간 빗줄기 앞에서 아빠는 늘 그렇게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귀에 들어오고 마음에 자리 잡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의 오답풀이는 늘 이런 말로 시작하곤 했다. "학생이 뭐 하는 사람인지는 한자를 살펴보면 알 수 있어. 배울 학. 날 생. 학생은 태어나서 배우는 사람이야. 주현이의 일은 공부란 말이지. 그러면 공부는 무슨 뜻이냐... "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이 따로 없었다.
아빠는 일장연설을 끝내고 늘 내 표정을 살폈다. 마지막엔 꼭 내게 메롱하고 혀를 내밀었다. 아빠 기준, 장난스러운 표정의 정석이었다. 나도 덩달아 메롱을 했다. 오답풀이의 마지막 의식 같은 거였다. 그 후로 우리는 붉은 비를 피해 바카라상에서 일어났고 거실로 가 과일을 함께 먹었다. 문제풀이를 했을 뿐인데 큰 걸 해낸 것 같았다. 시험지 앞에서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기지개를 켰다.
그러나 문제는 20년이 넘도록 아빠의 가르침이 먹히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다.
2024 제주 북페어에 독립출판 프로젝트 팀 지음지기로 출전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관련 에세이 읽기). 스스로를 작가로 소개했고, 나의 바카라을 설명하면서 창작 철학을 발전시켜 나가고, 바카라을 직접 팔아보면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바카라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또, 주최 측의 에코백 나눔 이벤트를 통해, 에코하지 않은 나의 에코백 생활을 되돌아보며 에코백을 조금 정리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나는 죽어서 에코백을 남긴다>를 온라인카지노에 연재하며 반성문을 이어 쓰고 있다.
그러면 이제 에코백 안 사요? 기존에 갖고 있던 것만 매고 다녀요?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