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온정과 냉정

byNorah

나는 친절하고 배려가 많은 편이지만 따뜻함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가장 경계하는 부분은 질척거리는 정이다. 그래서 나는 내 본심 속으로 아무나 들여놓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진심으로 행동하되 거리 조절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쓴다. 도는 집에서 닦을 수 있는데도 스님들이 굳이 출가를 먼저 하는 이유도, 사람은 가족에게 가장 마음이 약해지고 그 마음이 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은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집착도 만드니깐 말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든지 잠시 왔다 갈 수 있을 정도로만 나를 열어놓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정에 얽혀 윤회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난 달, 아는 언니에게서 카톡이 왔고 나는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하고선 아직까지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운동하다 알게 된 이 언니는 정이 많고, 맺고 끊음이 불분명해서 삶에 문제가 종종 일어났다. 그래서인지 자신과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나를 자주 찾았다. 나에겐 고맙고 좋은 사람이지만, 내게 너무 의존적이라는 생각에 더 가까워져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꾸 내 생각을 묻고 내 말에 휘둘리는 행동은 그 언니의 삶에 좋을 게 없고, 누구든 자기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혼자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쯤 그 언니는 연락없는 나를 욕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진심은 그 언니가 강단있게 잘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열 살 어린 친구가 있다. 그녀는 몇 년 전, 집안 일로 인해 죽도록 힘든 시기가 있었고 나는 자주 통화를 하며 문제가 빨리 해결되길 기도 해주었다. 그리고 결혼이 사치라던 말이 안쓰러워 그 아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길 바랐다. 그녀는 내게 고맙다며 선물도 자주 보내주었고 멀리서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어둠으로만 가득찼던 그 삶에 안정이 찾아왔고 나는 그 뒤로 점차 거리를 두었다. 이유는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내가 요즘 멀어진 것 같다며 이유를 물었다. 그래서 너는 하산할 때가 되었다고, 이젠 내 조언없이 혼자서도 잘 판단하고 살 수 있을 거라고 답했다. 그 뒤로도 간간이 오는 연락에 단답으로 응하다가 결혼할 사람이 생겼단 소식에 벅차게 흐뭇한 마음이 들어 합장이 저절로 나왔다.


큰 조카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입 기념 목돈을 준 뒤로 조카의 독립심을 위해 모든 조언과 서포트를 중단하였다. 여전히 서로 잘 지내고 있지만, 이젠 조카 일에 적극 가담하는 대신 지켜만 보고 있다. 나도 안다. 조카는 티를 안 내려하지만 서운함도 분명 있을 거라는 것을. 그래도 본인이 할아버지 생신 때 쓴 편지처럼, 할아버지 말씀대로 사람은 너무 춥지도 뜨겁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겠다고 말한 아이라서 이모의 행동을 이해해줄 거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나비의 우화를 돕겠다고 괜한 입김을 불어서 나비가 죽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내 생각만으로 남의 인생에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정작 그들에게 해가 될 수도 있기에, 나는 섣불리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일은 자제하려고 한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 멀리 봤을 때 내가 상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20대에 과외를 할 때 학생들이 자기주도로 공부해서 나와 빨리 헤어지도록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단순히 고마워하는 마음을 넘어서 나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면 떠나야 할 때가 온 신호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과 상관없이 내가 싫어서 끊어낸 인연도 많았다. 가치관이 안 맞다거나 내가 싫어하는 모습 한 가지만 보여도 정이 뚝 떨어지는 일도 많아서 내가 결코 너그럽고 인자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벽을 쳐야할 때도 있고 달려오는 사람을 멈추게 만들어야 할 때도 있다. 인간관계를 머리가 없이 가슴으로만 대하면 끝이 좋을 수가 없으니까. 이런 나의 성향을 이해해주고 알아서 적당함을 맞춰주는 사람들은 참 감사하고 귀한 존재들이다.


세상에 끝이 없는 관계는 없다. 그 끝을 알고 시작하면 미련도 없고 슬픔도 없다. 사람은 구질구질한 감정들을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울 때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다. 순간에 몰입할 수 있고, 가볍게 살 수 있으며, 머리만 대면 바로 잘 수 있다. 나를 평생 따라다닐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하나 뿐이다. 타인의 생각과 행동과 말 그리고 그 인연에 연연하다보면, 내 삶에 가장 중요한 동반자인 나를 잃게 되고, 내가 빠진 삶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이 각박한 시대에 주변을 살피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끝까지 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