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친구와 연인사이〉의 에마는 바쁜 의사다. 친구 애덤에게 제안하는 관계는 간단해 보인다. 서로 끌리고 함께 자고 싶지만, 연애에 따르는 의무와 감정적인 부담은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제목과 달리 두 사람은 처음부터 친구인지 연인인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관계를 원하지 않는지 알고 조건을 정한다.
영어 원제인 ‘No Strings Attached’는 조건이나 의무가 딸려 있지 않다는 뜻이다. 두 사람이 피하려는 것도 성적인 친밀함 자체가 아니라, 그 친밀함에 다른 약속이 자동으로 따라붙는 일이다. 함께 잤으니 매일 연락해야 한다거나, 서로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는 기대를 줄이고 싶다.
애덤은 생리 중인 에마와 친구들을 위해 노래를 모은 음반을 만들어 온다. 몸 상태에 맞춘 선물인데, 생리를 소재로 엮은 선곡이 장난스럽다. 거창한 사랑 고백 없이도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고, 그를 위해 시간을 썼다는 사실이 작은 음반 하나에 담긴다.
음반을 만들어 주는 친절만으로 누군가의 연애 감정을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처음의 규칙에 적지 않았던 돌봄이 관계 안으로 들어온다는 점은 보인다. 신체적인 만남은 허용하되 마음은 복잡해지지 말자고 했는데, 상대를 즐겁게 해 주려고 고른 노래까지 단순히 성적인 일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친구와 연인사이〉가 꺼내는 난처함도 여기에 있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합의를 깨는 것 같아 말을 꺼내기 어렵다. 지금의 관계가 좋은 사람은 상대에게 잘해 줄수록 원하지 않은 약속을 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이 다시 이야기해야 할 것은 누가 잘못했느냐보다 현재도 같은 관계를 원하느냐다.
이것을 ‘가벼운 관계는 결국 진지한 연애로 바뀐다’고만 읽으면 다른 결말은 모두 실패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음 작품에서는 관계가 처음 약속대로 끝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아파한다. 약속이 어겨졌는지와 마음이 다쳤는지는 같은 질문이 아니다.
로베르 메를의 소설 〈Malevil〉에는 에마뉘엘이 비르기타와 지냈던 과거가 나온다. 독일인 여성 비르기타는 에마뉘엘의 삼촌을 위해 일하던 사람이다. 삼촌이 죽은 뒤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비르기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즐겁게 함께하는 성적인 관계라고 분명히 한다.
그들은 한동안 좋은 시간을 보낸다. 비르기타는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편지로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린다. 에마뉘엘은 예상보다 큰 상처를 받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처음 어떤 관계를 약속했는지 스스로 상기해야 한다.
여기서는 비르기타가 감춰 둔 배신을 찾아낼 필요가 없다. 그녀는 에마뉘엘과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다. 에마뉘엘의 괴로움도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한 사람에게는 즐거웠던 기간이 끝났다는 소식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안에서 조용히 커진 기대가 무너지는 소식이다.
편지라는 방식도 이 차이를 선명하게 한다. 두 사람이 지금 마주 앉아 다음 단계를 협의하는 것이 아니다. 에마뉘엘은 이미 이루어진 다른 사람의 선택을 뒤늦게 읽는다. 그가 되짚는 것은 상대의 말보다 자신이 그동안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다.
〈친구와 연인사이〉에서 관계의 규칙이 다시 협상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이 소설의 회상에서는 협상할 시점이 지나가 있다. 친밀한 시간을 공유했다는 사실과 같은 미래를 기대했다는 사실 사이의 차이가 뒤늦게 드러난다.
역할 수행 게임 〈발더스 게이트 3〉에서는 플레이어가 동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인물마다 다르다. 레이젤은 전투와 강함을 중시하는 전사다. 그녀와 연애하는 경로는 먼저 육체적인 끌림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관계를 신체적인 것으로 설명하지만, 함께 모험하며 그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애착을 갖게 된다.
성적인 만남을 관계의 최종 보상으로 생각하면 순서가 뒤집힌 셈이다. 여기서는 이미 함께 잔 두 사람이 앞으로 무엇을 나눌지 알아 간다. 상대에게 기대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몸을 드러내는 일보다 나중에 올 수 있다.
같은 게임의 아스타리온은 이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드러낸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한 주인에게서 벗어나려는 흡혈귀다. 플레이어와 가까워지는 초반에는 가벼운 관계를 제안하지만, 이후 자신의 유혹에 보호를 얻으려는 계산이 섞여 있었다고 고백한다. 진짜 마음이 생기면서는 성적인 관계를 잠시 멈추고 싶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때 멈추자는 말은 친밀함을 없애자는 뜻과 같지 않다. 그동안 다른 사람의 요구에 맞춰 몸을 사용해 온 인물이,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볼 시간을 청하는 것이다. 처음의 접근보다 이후의 거절에 더 큰 신뢰가 담길 수 있다.
플레이어는 단순히 호감도를 쌓아 다음 장면을 얻는 입장에 머물지 않는다. 상대가 관계의 조건을 바꾸려 할 때 어떻게 대답할지 선택해야 한다. 레이젤에게는 몸에서 시작한 관계가 감정으로 넓어지고, 아스타리온에게는 몸을 잠시 빼고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두 경로를 같은 연애의 진도표에 놓기 어렵다.
이 작품들에서 인물들이 부딪치는 문제는 관계에 붙일 정확한 명칭만은 아니다. 함께 자도 되는지, 독점적인 관계를 원하는지, 상대의 계획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싶은지에 대한 대답이 서로 다른 때에 바뀐다. 하나에 동의했다고 나머지에도 동의한 것은 아니다.
에마와 애덤은 처음의 합의로 남은 시간을 모두 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겪는다. 에마뉘엘은 공유한 시간과 공유한 미래를 혼동했음을 뒤늦게 마주한다. 아스타리온과 가까워지는 경로에서는 더 깊은 신뢰가 신체적인 관계를 잠시 멈추는 선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다음 입맞춤만큼 중요한 장면은 평소 하던 행동에 어느날 둘 중 하나가 평소와 다른 대사를 내놓는 순간이다. 그 말 때문에 가까움이 끝나는지, 아니면 서로 원하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는지에 따라 같은 침대에서 시작한 이야기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내 집의 서랍 하나 — I Got You a Drawer: 상대에게 개인 공간을 내주며 더 깊은 관계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전한다.〈프렌즈〉(드라마): 챈들러는 재니스에게 자신의 서랍을 선물하며 관계에 더 진지해지려 하지만 행동이 과해진다.
육체적 관계 없는 연인 — Chastity Couple: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지만 성적인 친밀함 없이 함께한다.〈드래곤 에이지 II〉(게임): 여성 호크와 세바스티안의 우정 경로에서는 그의 서약을 존중하는 정결한 결합이 가능하다.
헤어진 뒤에도 좋은 사이 — Amicable Exes: 연애나 결혼이 끝난 뒤에도 서로를 아끼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스콧 필그림〉(만화): 킴 파인은 학창 시절 사귀었던 스콧과 헤어진 뒤에도 같은 밴드에서 함께하며 믿음직한 친구로 남는다.
서로 맞지 않는 지향 — Incompatible Orientation: 한 사람이 품은 연애 감정이 상대의 성적·낭만적 지향과 맞지 않는다.〈파이어 엠블렘 에코즈〉(게임): 레오는 발보를 사랑하지만 발보의 애정은 같은 방향의 연애 감정이 아니다.
아이를 갖기 위해 고른 상대 — Chosen Conception Partner: 배우자나 연인과 별개로 아이를 낳을 상대를 선택한다.〈쌍화점〉(영화): 왕은 후사를 얻으려고 자신의 연인 홍림에게 왕후와 동침하라고 명령한다.
성적 관계가 자유로운 미래 — Free-Love Future: 미래 슬롯에서 여러 상대와의 성적 관계가 특별한 비난 없이 받아들여진다.〈블루 젠더〉(애니메이션): 유지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감정적 유대 없는 성적 만남이 일상화된 모습을 낯설어한다.
식 없이 함께 사는 부부 — Common Law Marriage: 공식적인 혼인과 별개로 두 사람이 실질적인 부부처럼 생활한다.〈듄〉(소설): 레토 공작과 제시카는 삶과 자녀를 함께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정식 부부의 지위를 갖지 않는다.
함께 사는 일이 좋은 부부 — Happily Married: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일상의 어려움을 함께 견딘다.〈업〉(애니메이션): 칼과 엘리는 아이와 여행에 관한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서로를 아끼며 오랜 생활을 나눈다.
나의 정체성을 말하다 — Coming-Out Story: 인물이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주변에 알린다.〈Chicory: A Colorful Tale〉(게임): 마카롱은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받아들이며 피자에게 그 사실을 말한다.
동거인에서 연인으로 — From Roommates to Romance: 함께 생활하며 알게 된 모습과 일상의 친밀함이 연애로 이어진다.〈By the Book〉(소설): 이지와 보는 같은 집에서 일하고 식사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가까워진다.
처음 품은 사랑 — First Love: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나 그 경험이 이후의 관계에도 기억으로 남는다.〈심슨 가족〉(애니메이션): 바트는 이웃집 로라에게 품었던 마음을 자신이 사랑했던 소녀에 대한 기억으로 떠올린다.
가까이 닿아 돌보기 — Intimate Healing: 상처나 병을 돌보는 과정에서 몸을 가까이하는 행동이 필요해진다.〈추억의 마니〉(애니메이션): 안나는 사일로에서 추위에 떠는 마니 곁에 몸을 붙여 따뜻하게 해 주려 한다.
닿지 않으려는 연모 — Courtly Love: 사랑하는 사람을 이상적으로 섬기며 육체적 결합과 거리를 두는 연애다.〈발할라〉(만화): 헤임달은 프레이야를 고결한 연모의 대상으로 여기다가 그녀의 성적인 제안에 오히려 불쾌해한다.
늦게 알아차린 마음 — Belated Love Epiphany: 상대가 떠나거나 다른 관계를 선택한 뒤에야 자신의 애정을 깨닫는다.〈스크럽스〉(드라마): J.D.는 엘리엇의 약혼을 지지하다가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자 자신이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음을 깨닫는다.
친구와 연인의 신경전 — Friend Versus Lover: 한 사람의 시간과 애정을 두고 친구와 연인이 경쟁한다.〈셜록 홈즈〉(영화): 2009년 영화의 홈즈는 왓슨과 결혼하려는 메리를 달가워하지 않지만 메리는 우정을 함께 나눌 여지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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