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타마가 주먹을 내밀면 싸움이 끝난다. 만화 〈원펀맨〉의 제목은 과장이 아니다. 도시를 부수며 등장한 괴인이 자기 힘을 설명하고, 독자는 이제 굉장한 전투가 시작되겠구나 싶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남아 있는 것은 승리의 환희보다 사이타마의 맥 빠진 얼굴이다. 또 한 방이다.
어렵게 이겨야 재미있다는 말은 반쯤만 맞는다. 우리는 로키가 헐크에게 얻어맞을 때 열광했고, 다스 베이더 앞에서 도망칠 때 손에 땀이 났다. 양쪽의 전력이 비슷해서 생기는 재미가 아니다. 상대가 끝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장면의 감정을 결정한다.
압도적인 승리는 승패보다 서열을 알려 준다. 조금 전까지 대단해 보였던 인물의 말과 행동을 한순간에 다른 크기로 보게 만든다. 다만 그 차이를 누구의 자리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통쾌함은 웃음이 되기도 하고 공포가 되기도 한다.
영화 〈어벤져스〉에서 로키는 지구를 침공한 장본인이다. 사람들을 무릎 꿇리고, 자신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태도를 숨기지 않는다. 관객은 그의 긴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 그래서 스타크 타워에서 헐크를 마주했을 때도 익숙한 장면이 반복될 것 같다. 로키가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고 상대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장면이다.
헐크는 그 연설에 답하지 않는다. 로키의 다리를 붙잡아 바닥에 몇 번이고 내리친다. 거창한 자기소개가 갑자기 몸의 무게와 바닥의 충격으로 바뀐다. 조금 전까지 침공을 지휘하던 신은 움푹 팬 자리에 누워 소리를 낸다.
이 장면은 헐크가 강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려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새로 확인하는 것은 로키의 권위가 이 상대에게 얼마나 쓸모없는가다. 로키는 자신이 누군지 설명하면 싸움의 조건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헐크에게는 그 설명이 아무런 조건도 만들지 못한다.
여기서 접전이 길어졌다면 전혀 다른 재미가 되었을 것이다. 로키가 환영과 기지를 써서 헐크를 몰아붙이고, 헐크가 어렵게 역전했다면 관객은 두 사람의 능력을 비교했을 것이다. 영화는 그 비교를 생략한다. 말이 끝나기 전에 체면이 바닥에 부딪힌다. 오랫동안 쌓인 거만함에 비해 처리는 너무 짧고 간단하다. 그 시간 차이가 웃음을 만든다.
하지만 로키의 패배로 뉴욕의 전투 전체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영웅들은 여전히 도시와 시민을 구해야 한다. 한 인물을 손쉽게 쓰러뜨려 관객에게 숨 돌릴 순간을 주면서도, 더 큰 문제는 남겨 둔다. 모든 갈등을 간단히 지워 버리지 않기 때문에 이 짧은 압승은 마음껏 통쾌할 수 있다.
〈원펀맨〉은 이 순간을 주인공의 일상으로 만든다. 헐크의 압승이 긴 영화 안의 한 번의 해방이라면, 사이타마에게 압승은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생활 조건이다.
보통 강적의 등장은 약속이다. 지금까지 쌓아 온 힘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왔으니 주인공이 무언가를 더 배울 것이라는 약속. 〈원펀맨〉의 괴인들도 거대한 몸, 위협적인 표정, 세계를 설명하는 자기만의 논리를 갖고 나타난다. 그런데 그 준비가 사이타마에게 닿는 순간 허무해진다. 그럴듯한 위협이 오래 지속될수록 한 번의 주먹은 더 싱겁고 우스워진다.
독자와 사이타마의 감정은 여기서 엇갈린다. 독자는 위협이 우스꽝스럽게 무너지는 장면을 기다린다. 사이타마는 이번만큼은 자신을 긴장시킬 상대이기를 바란다. 독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주인공에게는 또 한 번의 실망이다. 같은 결과를 반복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두 자리가 다르다.
그렇다고 작품 속 모두에게 싸움이 쉬운 것은 아니다. 다른 영웅들은 다치고, 버티고, 자신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들이 먼저 감당하는 위험 덕분에 사이타마의 힘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도 드러난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건 전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금세 끝나는 일이다. 강함의 차이는 힘의 숫자보다 각자가 보내는 시간과 치르는 대가로 보인다.
그 결과 작품의 질문도 옮겨 간다. 사이타마가 이길 수 있는가보다, 이기는 능력만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가가 궁금해진다. 승리가 너무 쉬워졌을 때 관계와 인정, 생활의 사소한 문제는 더 또렷해진다. 압도적인 힘은 주인공의 고민을 없애지 않는다.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게임 〈스타워즈 제다이: 오더의 몰락〉은 플레이어를 정반대 자리에 세운다. 칼 케스티스는 모험을 거치며 능력을 되찾고 강해진다. 플레이어도 공격을 막고, 적의 움직임을 읽고, 어려운 전투를 통과하는 법을 배운다. 마지막 요새에 도착했을 때는 웬만한 위협을 자기 손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때 다스 베이더가 나타난다. 방금까지 중요한 적이었던 세컨드 시스터의 죽음과 함께, 이 장소의 힘의 기준이 바뀐다. 칼과 시어가 마주한 것은 조금 더 어려운 검술 시험이 아니다. 살아서 빠져나가야 할 압도적인 상대다.
플레이어가 익혀 온 행동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움직이고 반응해야 한다. 다만 그 행동의 목적이 달라진다. 공격해서 승리를 쌓아 가던 손이 이제는 거리를 벌리고 탈출로를 찾는다. 베이더를 쓰러뜨릴 방법을 발견하는 대신, 무너지는 공간 속에서 그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이 성취가 된다.
영상으로 강자가 약자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는 것과, 직접 조종하던 인물이 그 약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다르다. 플레이어는 칼의 성장에 시간을 썼다. 그동안의 노력이 무의미했다면 이 장면은 불쾌했을 것이다. 게임은 성장한 칼을 약한 인물로 되돌려 놓는 대신, 그 힘으로도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보여 준다. 도망쳐 살아남는 일에도 지금까지 배운 능력이 필요하다.
헐크의 곁에서는 상대가 무력하다는 사실이 유쾌했다. 여기서는 내가 무력하다. 같은 힘의 격차가 웃음 대신 공포를 만드는 이유다. 짧은 등장이 오히려 베이더를 크게 보이게 한다. 그를 오래 상대해서 이해하고 공략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 작품의 압승을 모두 사이다라고 부르면 중요한 차이가 사라진다. 로키는 오랫동안 내세운 권위를 잃는다. 사이타마는 그토록 쉽게 얻는 승리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 칼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난 뒤 살아남는 쪽으로 목표를 바꾼다.
재미는 전투에 걸린 시간이 짧다는 사실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그 전에 우리가 무엇을 기다렸는지가 중요하다. 거만한 인물의 몰락을 기다렸는지, 강한 주인공을 흔들 사건을 기다렸는지, 오랫동안 키운 인물의 마지막 승리를 기다렸는지에 따라 쉬운 싸움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래서 압도적인 장면을 본 뒤에는 쓰러진 인물만 볼 필요가 없다. 이긴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볼 만하다. 헐크는 지나가고, 사이타마는 허탈해하고, 베이더는 계속 다가온다. 승패를 일찍 끝내 버린 장면이 우리에게 오래 남기는 것은 그다음 표정과 발걸음이다.
흠집 없는 승리 — Flawless Victory: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상대를 이긴다.〈모탈 컴뱃〉(게임): 플레이어가 한 대도 맞지 않고 라운드를 이기면 완벽한 승리라는 판정이 붙는다.
반복해서 레벨 올리기 — Level Grinding: 비슷한 행동을 거듭해 능력치나 경험치를 쌓는다.〈사우스 파크〉(애니메이션): 아이들은 강한 플레이어를 상대하려고 낮은 수준의 멧돼지를 계속 잡는 과장된 훈련을 한다.
강적으로 막은 길 — Beef Gate: 길 자체는 열려 있지만 지나치게 강한 적이 사실상의 장벽이 된다.〈엘더스크롤 V: 스카이림〉(게임): 하이 흐로스가로 오르는 길의 서리 트롤은 준비가 덜 된 여행자를 막아선다.
너희 둘이 싸워라 — Let’s You and Him Fight: 제삼자가 두 사람의 충돌을 유도해 자기 목적을 이룬다.〈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영화): 제모는 과거의 살인 기록을 보여 주어 토니가 스티브와 버키를 공격하게 만든다.
혼자서 군대를 상대하기 — One-Man Army: 한 인물이 수많은 적을 혼자 감당한다.〈시라노 드 베르주라크〉(희곡): 시라노는 리니에르를 노리는 무장한 패거리를 혼자 상대한다.
압도적인 선거 승리 — Landslide Election: 접전이 성립하지 않을 만큼 큰 표 차이로 선거를 이긴다.〈24〉(드라마): 데이비드 팔머는 대통령 선거에서 큰 득표 차이로 승리한다.
여럿일수록 약해지는 적 — Conservation of Ninjutsu: 같은 종류의 적이 떼로 나올 때 개별 전투력이 낮아진다.〈폴리스 캅스 인 스페이스〉(연극): 두 경찰이 로봇 군단을 뚫고 나가지만 단 한 대의 우두머리 로봇에게 훨씬 크게 고전한다.
익히기는 어렵지만 강력함 — Difficult, but Awesome: 다루기 어렵다는 단점을 숙련 뒤의 높은 성능이 보상한다.〈슈퍼 스매시브라더스 for 닌텐도 3DS / Wii U〉(게임): 개굴닌자는 조작에 익숙해진 플레이어가 강점을 끌어내도록 설계된 캐릭터로 소개된다.
실용적인 싸움꾼 — Combat Pragmatist: 정정당당한 형식보다 살아남고 이기는 데 유리한 방법을 택한다.〈레이더스〉(영화): 인디아나는 칼솜씨를 과시하는 상대와 칼싸움을 벌이는 대신 권총을 쏜다.
마무리 기술 — Finishing Move: 싸움을 끝내기 위해 특별한 공격을 마지막에 사용한다.〈대니 팬텀〉(애니메이션): 대니는 큰 힘을 소모하는 유령의 절규를 결정적인 공격으로 사용한다.
능력을 꺾는 부상 — Game-Breaking Injury: 부상이나 신체 이상이 강자의 기존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한다.〈배트맨 비욘드〉(애니메이션): 늙은 브루스는 전투 중 심장 이상으로 몰린 끝에 총을 집어 들고 이후 배트맨에서 은퇴한다.
몸으로 싸우는 여성 — Action Girl: 여성 인물이 위험한 상대와 직접 맞서며 행동의 주체가 된다.〈아이다〉(뮤지컬): 아이다는 초반부터 칼을 다루는 솜씨를 보이며 수동적인 포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중반의 새 무장 — Mid-Season Upgrade: 진행 도중 새 장비나 능력을 얻어 전투 방식이 달라진다.〈봉신연의〉(소설): 강자아는 더 강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스승에게 도움을 구하고 타신편 등 보물을 받는다.
굉장하지만 쓰기 불편함 — Awesome, but Impractical: 위력과 외형은 대단해도 실제 운용의 단점이 효율을 떨어뜨린다.〈슬러기 프리랜스〉(웹코믹): 리프의 말뚝 발사총은 많은 탄을 담지만 재장전에 이틀이 걸려 다른 방법을 찾게 한다.
영웅을 죽이는 강적 — Hero Killer: 실제로 여러 영웅을 죽여 위험성을 증명하는 적이다.〈에이스 컴뱃 7: 스카이즈 언노운〉(게임): 미하이는 브라우니와 와이즈먼 등 아군 조종사를 격추해 플레이어가 느끼는 위협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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