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두 사람이 다시 사귀는 줄 안다. 딸이 그렇게 말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제 전 남자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이별을 정리하는 능력이 아니라, 아직 이별하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능력이다.
미국 시트콤 〈빅뱅 이론〉 시즌 4의 「The Boyfriend Complexity」에서 페니는 레너드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아버지가 그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재결합했다고 거짓말한 것이다. 레너드는 이웃집에 사는 물리학자이고, 페니와 실제로 교제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처음 알아 가는 연인 흉내를 낼 필요가 없다. 이미 알던 친밀함을 잠깐 다시 꺼내면 된다.
그 점이 편리하면서도 곤란하다. 부모 앞에서는 다정해야 하지만, 그 다정함을 둘만 있을 때까지 이어 가도 되는지는 별개다. 페니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방문을 무사히 넘기는 일이다. 레너드가 같은 상황을 즐기는 마음까지 그 부탁에 포함된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같은 역할을 맡으면서도 그 역할에서 얻고 싶은 것이 다르다.
페니의 아버지는 단순히 속이기 어려운 감시자가 아니다. 딸에게 레너드가 좋은 상대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거짓말이 드러났을 때도 그는 레너드에게 딸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페니에게는 끝내고 싶은 연극인데, 아버지는 그 연극이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서 가짜 연애의 웃음은 거짓말을 들키느냐에만 달려 있지 않다. 누군가가 너무 기꺼이 믿어 버리는 것도 문제다. 아버지가 두 사람의 앞날을 좋아할수록 페니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기대까지 처리해야 한다. 거짓말을 바로잡으면 사실관계는 정리되지만, 그 말을 듣고 기뻐했던 사람의 마음까지 원상태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레너드가 낯선 대역이었다면 방문이 끝난 뒤 각자 집으로 가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페니와 함께 지낸 기억이 있고, 두 사람은 앞으로도 이웃으로 만난다. 가짜 연애가 지나간 관계를 잠깐 복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웃음 속에 작은 기대와 난처함이 섞인다. 상대를 아는 사람이 연기를 더 잘한다는 장점이, 연기를 끝내기 어렵게 하는 이유도 된다.
만화 〈데스노트〉에서는 같은 방식의 관계가 훨씬 불편하게 작동한다. 주인공 야가미 라이토는 이름을 쓰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노트를 손에 넣고, 자신을 추적하는 수사망을 피하려 한다. 아마네 미사는 라이토를 사랑하며 그에게 협력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겉으로 연인이지만, 관계에 부여하는 의미가 같지 않다.
라이토에게 미사와의 교제는 평범한 청년의 생활을 보여 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만나고 연애하는 모습은 그의 일상에 설명을 붙여 준다. 그러나 미사는 자신이 단순한 위장 수단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함께 있다 보면 라이토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이 경우 둘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관계가 공평해지지는 않는다. 라이토는 자신에게 필요한 협력을 얻고, 미사는 언젠가 받게 될 사랑을 기다린다. 현재 주고받는 것이 다르고, 약속된 미래가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같은 연인 행세를 해도 한쪽은 목적을 수행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그 행세가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관계를 볼 때는 둘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사귀는지만 살펴서는 부족하다. 누가 부탁하고 누가 더 많이 양보하는지, 누구에게 중단할 여지가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페니의 아버지가 거짓말을 너무 좋아해서 생기는 소동과 달리, 여기서는 상대의 기대를 아는 사람이 그것을 계속 이용한다는 점이 긴장을 만든다.
두 작품을 모두 ‘가짜가 진짜 사랑이 되는 이야기’로 정리하면 이런 차이가 사라진다. 가짜 연애가 진짜 감정을 낳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미 존재하는 진짜 감정을 이용하기 위해 가짜 연애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연애 어드벤처 게임 〈Collar × Malice〉에서는 연인이라는 신분에 생활 속 기능이 생긴다. 주인공 호시노 이치카는 연쇄적인 폭력 사건으로 혼란에 빠진 신주쿠의 경찰관이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독이 든 목걸이를 채운 뒤, 이치카는 사건을 추적하는 남자들과 협력하게 된다. 플레이어는 대화와 선택을 따라가며 이들과 다른 관계를 맺는다.
사사즈카 타케루의 이야기에서는 그가 이치카의 남자친구인 척하는 일이 있다. 이치카의 남동생과 알고 지내는 아키토가 테러 조직과 관련되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다. 저녁 식사 무렵 집을 방문하는 남자친구라면 가족의 지인과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다. 수사 목적으로 찾아왔다는 설명보다 연애 중이라는 설명이 방문을 덜 수상하게 만든다.
이 장면에서 남자친구라는 호칭은 감정을 고백하는 말보다 먼저, 집 안에 들어갈 이유가 된다. 가족을 알고 함께 식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두 사람이 친밀함을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주변 사람들도 연인에게 허용되는 행동의 범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건을 조사하려고 택한 가까운 거리가, 두 사람에게 끝까지 업무적인 거리로만 남을지는 다른 문제다. 게임은 플레이어가 이치카의 입장에서 대화를 따라가게 한다. 가족에게 무엇을 보여 줄지 결정하는 장면에서, 플레이어는 사사즈카와 어느 정도 가까워졌는지도 함께 의식하게 된다. 같은 행동에 수사의 목적과 관계의 가능성이 겹치는 셈이다.
이 게임의 위장을 페니의 부탁과 나란히 놓으면 연인 역할의 쓸모가 구체적으로 보인다. 페니에게는 부모를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고, 이치카와 사사즈카에게는 낯선 방문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연인인 척한다는 사실은 같아도 통과해야 할 상황과 연기하는 사람의 부담은 달라진다.
가짜 연애는 시작할 때 간단해 보인다. 잠깐 맞장구치고, 친한 사람처럼 행동하면 된다. 그러나 주변 사람이 그 관계를 믿고 반응하는 순간부터 설명해야 할 일이 생긴다. 언제 헤어진 것으로 할지, 다음 모임에도 함께 갈지, 방금 했던 다정한 행동은 둘만 있을 때에도 허용되는지까지 정해야 한다.
〈빅뱅 이론〉에서는 아버지가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남고, 〈데스노트〉에서는 미사가 기다리는 마음이 남는다. 〈Collar × Malice〉에서는 수사라는 이유로 가까이 다가간 두 사람의 거리가 남는다. 연기를 끝낸다는 말은 거짓말을 들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함께 연기했던 상대에게도 필요하다.
이런 장면에서 손을 잡는 순간만큼 눈여겨볼 것은 손을 놓은 뒤의 반응이다. 같은 상황이 끝났다고 두 사람이 동시에 생각하는지, 한 사람만 아직 기다리고 있는지에 따라 그 연애의 다음 이야기가 달라진다.
애인인 척 끼어들기 — Boyfriend Bluff: 원치 않는 접근을 막으려고 곁에 있는 사람의 연인이나 가까운 관계자인 척한다.〈파이널 판타지 크리스탈 크로니클: 에코즈 오브 타임〉(게임): 플레이어는 집요한 접근에 시달리는 여성의 애인 행세를 해 상대를 물러나게 할 수 있다.
체류를 위한 결혼 — Citizenship Marriage: 추방을 피하거나 다른 나라에 머물 목적으로 결혼한다.〈아노라〉(영화): 바냐는 미국에 머무르려 아노라와 결혼하고, 그의 가족은 결혼을 무효로 돌리려 한다.
상류층과 유곽의 사랑 — Elite Man–Courtesan Romance: 높은 신분이나 지위를 가진 인물과 성을 판매하는 직업의 인물이 사랑에 빠진다.〈약사의 혼잣말〉(소설): 마오마오의 어머니와 명문가 출신 아버지의 관계에는 유녀의 신분과 가문의 사정이 얽혀 있다.
애인이 있다는 거절 — “I Have a Boyfriend” Excuse: 상대의 접근을 거절하기 위해 이미 연인이 있다고 말한다.〈월간순정 노자키 군〉(만화): 미코시바는 고백을 거절하려고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가 증거를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먼 곳에 있다는 연인 — Girlfriend in Canada: 주변에서 만나 볼 수 없는 곳에 연인이 있다고 주장해 확인을 피한다.〈인사이드 아웃〉(애니메이션): 라일리의 상상 속 남자친구는 자신을 처음 본 빙봉에게 캐나다에 산다고 설명한다.
성적 지향을 오해받다 — Mistaken for Gay: 말이나 행동을 잘못 해석한 주변 사람이 인물의 성적 지향을 실제와 다르게 짐작한다.〈아스트로 시티〉(만화): 크래커잭이 사는 하숙집의 노인들은 긴 머리와 연극인 같은 분위기를 근거로 그의 성적 지향을 단정한다.
결혼 뒤에 오는 연애 — Marriage Before Romance: 사랑 이외의 이유로 결혼한 두 사람이 함께 살며 연애 감정을 발전시킨다.〈지붕 위의 바이올린〉(뮤지컬): 중매로 결혼해 오랫동안 살아온 테비에와 골데는 서로 사랑하는지를 노래하며 되묻는다.
필요에 따른 결혼 — Marriage of Convenience: 낭만적인 사랑보다 생활상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결혼한다.〈어비스〉(영화): 버드는 해저 작업 시설에서 개인 침실을 얻으려고 린지와 결혼했다고 말한다.
일부러 마음을 빼앗고 버리기 — Intentional Heartbreaker: 처음부터 다른 목적을 품고 상대를 유혹한 뒤 상처를 주거나 버린다.〈파이어 엠블렘 풍화설월〉(게임): 실뱅은 여성들이 자신의 문장과 신분만 본다는 분노를 품고 접근했다가 관계를 끊는다.
부모가 싫어할 상대와 사귀기 — Dating What Daddy Hates: 부모가 못마땅해하는 특징을 가진 상대와 교제해 갈등을 일으킨다.〈A Slight Case of Murder〉(영화): 범죄자 출신 아버지는 딸의 약혼자가 자신이 싫어하는 경찰이라는 사실과 마주한다.
남이 정하는 결혼 — Arranged Marriage: 당사자 대신 가족이나 보호자 등이 결혼 상대와 조건을 정한다.〈Amethyst, Princess of Gemworld〉(만화): 토파즈 왕자는 정치적 이유로 사파이어와 약혼하지만 마지막에 그 결합에서 물러난다.
조직이 배정하는 배우자 — Bureaucratically Arranged Marriage: 당사자를 잘 모르는 제도나 조직이 자기 목적에 맞춰 결혼 상대를 정한다.〈디 아메리칸즈〉(드라마): 필립과 엘리자베스는 잠입 임무를 위해 부부로 배정된 뒤 오랜 공동생활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입맞춤으로 눈속임하기 — Fake-Out Make-Out: 들킬 위기에 몰린 두 사람이 입맞춤하는 연인처럼 보여 시선이나 의심을 피한다.〈39계단〉(영화): 기차에서 경찰을 피하던 해니는 낯선 여성에게 입맞춤하지만 여성은 곧 그를 경찰에 알린다.
연애로 잘못 읽힌 관계 — Mistaken for Romance: 서로 연애할 뜻이 없는 관계를 주변 사람이 연인 사이로 오해한다.〈이성과 감성〉(소설): 엘리너와 브랜던 대령의 친근한 대화를 보고 주변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고 짐작한다.
연인만큼 가까운 친구 — Heterosexual Life-Partners: 연애 관계 없이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처럼 깊게 의지하는 친구들이다.〈메임〉(뮤지컬): 메임과 베라는 오랜 우정과 서로의 흠까지 아는 친밀함을 함께 부르는 노래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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