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손에 쥔 소재를 보고 라벨을 붙이려 한다. 광선검과 우주선이 나오면 SF, 검과 마법이 나오면 판타지. 그런데 초능력 앞에서 이 습관이 멈칫한다. 텔레파시는 첨단인가 신비인가. 미래 도시를 배경으로 염동력을 쓰는 인물은 SF의 주민인가, 아니면 그저 무대만 갈아 끼운 판타지의 마법사인가.
소재를 더 밀어붙이면 혼란은 더 깊어진다. 작동 원리가 통째로 비어 있는 기계를 생각해보자. 외형은 금속과 회로지만 왜 움직이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건 SF인가. 반대로 증기기관은 어떤가. 고풍스러운 톱니와 압력계는 분명 옛것인데, 우리는 스팀펑크를 SF의 한 갈래로 부른다.
여기까지 오면 의심이 든다. 문제는 스팀인가, 사이언스인가, 소서러인가. 아니면 픽션 자체인가. 사실 S고 F고 따질 것 없이 전부 한 단어로 후퇴할 수 있다. 사변(speculative). 현실에 없는 전제를 하나 깔고, 그것을 일관되게 끝까지 미는 태도. 이 지점에서 SF도 판타지도 호러도 한 지붕 아래 형제가 된다.
그렇다면 형제들은 무엇으로 갈라지는가.
같은 초능력을 두고 한 작품은 이렇게 말한다. 전두엽의 변이가 미지의 장을 방출한다고. 인과가 있고, 법칙이 있고, 틀리면 반증될 수 있다는 제스처가 있다. 그 순간 사이언스의 문법이 세워진다. 설명이 실제로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힘이 법칙에 권위를 빌리려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작품은 똑같은 힘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선택받은 핏줄에 깃든 것이라고, 신비한 돌이 내린 것이라고. 근거는 전승과 신화에 있다. 운명과 계약과 의미의 질서에 있다. 그러면 그것은 판타지가 된다.
소재는 같았다. 갈래는 갈렸다. 결정한 것은 소재의 권위가 어디에 기대고 있는가였다.
이 기준을 손에 쥐면 앞의 혼란이 한꺼번에 정리된다. 원리 없는 기계는 외피만 기계인 마법 도구다. 권위를 빌려올 법칙이 없으니까. 반대로 증기기관은 옛것이어도 압력과 열역학의 사슬 위에 서 있는 한 사이언스 쪽으로 끌린다. 스팀이 문제가 아니었고 소서러가 문제가 아니었다. 권위의 출처가 문제였다.
다만 이 선을 너무 단단한 칸막이로 믿지는 말자. 현실의 작품들은 양쪽 어휘를 즐겨 섞는다. 신화적인 힘에 사이비 생물학을 덧입히기도 하고, 단단하던 SF가 끝에 가서 설명할 수 없는 숭고로 미끄러지기도 한다. 그러니 정확한 질문은 "이것은 SF인가 판타지인가"가 아니다. "이 텍스트는 권위를 법칙 쪽에 얼마나 두고 있는가"다. 칸막이가 아니라 정도(degree)의 문제다.
결국 장르는 무대 위에 무엇이 놓였느냐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 물건이 왜 작동하는지를 작가가 어디에서 빌려오는가로 정해진다. 법칙에서 빌리면 과학의 얼굴을 하고, 신화에서 빌리면 마법의 얼굴을 한다.
소재는 가변항이고, 권위가 좌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