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가치함은 투쟁을 위해 인지되는 순간 그 무가치함을 잃는다. 무가치는 가치의존적이고, 가치는 언제나 결과물의 상위에 존재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의 육체 위에 인권이 있어서, 팔다리의 개수나 육체의 형태가 인권의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처럼, 관측되는 순간 대상이 확정되는 양자역학의 원리처럼.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는 경구처럼, "잠은 잠을 부르는 소리를 싫어한다"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어쩌면 무가치함을 조준하여 싸우려는 행위 자체가 무가치함에 가장 가까워지는 길은 아닐까.
무가치는 가치에 대한 종속 개념이다. 어둠이 빛의 결여이듯 무가치는 가치의 결여일 뿐,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다. 결여를 조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 겨눠진 행위다. 빛을 향해야 할 화살을 어둠을 향해 쏘는 셈이다.
그렇다면 가치 자체를 좇으면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가치를 직접 추구한다는 것은 가격표나 속도계를 쫓는 일이다. 가격표는 가치의 표상일 뿐 가치가 아니고, '속도계'는 속력의 표상일 뿐 속력이 아니다. 속력은 객체의 운동에서 나오듯, 가치 또한 객체에서 나온다. 명품샵에 침입해 가격표를 모조리 뜯어와도 표상을 포획한 손에 가치 자체가 남지 않는다.
그러나 객체가 곧 가치인 것도 아니다. 앞서 인권이 육체에 귀속하면서도 육체에 환원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과 같은 구조다. 가치는 객체에 깃들면서 객체 위의 해석 체계로 존재한다. 객체는 가치의 자리이지, 자리가 곧 거주자는 아니다.
그러므로 길은 한 가지로 좁혀진다. 무가치를 직접 겨누는 것도, 가치를 직접 좇는 것도 아닌, 무가치의 반대편에 놓인 객체를 향해 걷는 것. 그리고 그 객체를 디딤돌 삼아 객체 너머의 가치 체계로 진입하는 것. 결여는 향함으로 닿지 않고, 가치는 부름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길은 언제나 객체를 거친다.
...라는 상념을 떠올려보지만, 아직 드라마조차 보지 않았기 때문에 상념은 그저 상념일 뿐이다. 결국 객체에 닿지 않는 글은 헛소리일 것이다. 헛소리가 제일 쉽다. 드라마 만드는 것보다, 드라마 보는 것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