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의 스토리텔링과 세계관 IP 기반 절차적 창작
이 글은 칸아카데미에 있는 픽사의 훌륭한 교육 과정 Pixar in a Box 중에서 이야기에 대한 지침과 가이드를 참고하여 쓰였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칸아카데미가 공동 제작한 무료 온라인 강좌로, 그중에서도 단원 1 "시작해 보세요"와 단원 2 "스토리텔링의 기술"이 이 글의 주된 참고 대상이다. 원 자료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 글을 쓰게 된 까닭부터 밝힌다. 세계관 IP 기반의 절차적 창작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독자는 대부분 기계적 대량 생산을 떠올린다. 규칙과 확률 테이블이 이야기를 자동으로 찍어내는 그림, 작가의 영혼 없이 공장처럼 이야기가 나오는 그림, 그래서 "그것이 정말 창작인가"라는 의심. 이 상상은 절반만 맞다. 절차가 있다는 점에서는 맞지만, 그 절차가 영혼을 배제한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틀리다.
절차적 창작이 실제로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나라는 주관성조차 조건의 일부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는 것. 주관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관을 절차의 한 단계로 정식화하는 것이다. 주관이 절차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차의 가장 안쪽 재료가 된다. 이 낯선 표현이 낯설지 않게 들리려면 친숙한 예가 필요하다. 그래서 픽사를 빌렸다.
칸아카데미에 공개된 픽사의 스토리텔링 교육 자료를 들여다보면, 거기서 픽사의 작가들이 설명하는 "이야기가 태어나는 과정"은 세계관 IP 기반 절차적 창작이 말해 온 것과 사실상 같은 이야기이다. 접근하는 언어가 다를 뿐, 도달하는 원리는 같다. 특히 주관성을 어떻게 절차의 재료로 삼는가라는 핵심 지점에서 그렇다. 이 글은 픽사의 이야기를 빌려 그 일치를 보여주기 위한 글이다. 다소 낯선 접근을 낯설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세계관 IP 기반 절차적 창작이라는 이름이 지닌 오해를 걷어내기 위해서이다.
절차적 창작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부터 꺼내 놓자.
“절차적 창작은 창작자의 개인적 경험이 중요하지 않다. 규칙이 이야기를 만드니까.”
이 오해는 세계관 IP라는 단어를 들을 때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제로 절차적 창작은 창작자의 개인적 경험을 배제하기는커녕, 그것을 가장 먼저 발굴해야 할 일차 자료로 취급한다. 이 점을 픽사의 몬스터 주식회사 일화가 정확하게 보여준다.
몬스터 주식회사의 최초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아이들을 놀래키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괴물들의 세계. 괴물이 일을 하고, 도넛을 먹고, 회사 이야기를 한다는 설정이 재밌을 것이라고 창작자들은 확신했다. 실제로 아이디어 자체는 반짝였고, 그림도 좋았고, 캐릭터도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초기 버전을 본 관객의 반응은 이상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이해가 안 된다.” 괴물들이 회사에 다닌다는 재밌는 설정이 있고, 그 설정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왜 관객이 못 알아듣는가.
그러다 어느 순간 창작자 중 한 사람이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사실 아이들을 겁주는 괴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려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신에게 그 시기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던 일이었다. 아이를 맡게 되는 일. 처음에는 무섭다가 점점 사랑하게 되는 일. 그 감정이 괴물이라는 소재 속에 이미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 반전이 의미하는 바는 창작의 순서가 통념과 정반대라는 점이다. 통념은 "좋은 아이디어를 고른 다음 그 안에 감정을 불어넣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작동하는 순서는 정반대이다. 내 안의 감정이 어떤 형태의 아이디어를 알아보고 거기에 들러붙는다. 소재는 표면이고, 감정은 그 소재를 고른 이유이다. 괴물이라는 소재는 부성(父性)이라는 감정의 의상이었다. 감정이 먼저 있었고, 그 감정이 담길 그릇을 찾다가 괴물을 고른 것이다. 의상이 바뀌어도 알맹이는 같다.
여기서 절차적 창작의 첫 단계가 분명해진다. 절차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된다. 픽사 작가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아는 것을 써라(write what you know)"는 흔한 조언이지만, 진짜 의미는 정반대이다. 조용한 동네의 따분한 이야기 말고, 괴물과 자동차 추격전에 대해 그냥 써라. 단,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거기에 조금 첨가해서. 소재 선택의 현실성이 아니라 감정의 진실성을 가져오라는 이야기이다.
이 원칙을 증명하는 창작 역사는 많다. J.R.R. 톨킨은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양탄자의 까만 구멍을 들여다보며 "땅속 구멍에 호빗이 살았다"고 썼다. 그 순간 톨킨은 호빗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까만 구멍을 들여다보는 감각적 경험에서 한 문장이 나온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진 묘사, "그 구멍은 너무 축축하지도 않았고, 너무 마르지도 않았다"도 양탄자 구멍의 감촉에서 그대로 온 것이다. 톨킨의 진짜 직업은 언어학자였고, 그는 핀란드어의 음운 체계에 집착하고 있었다. 요정어 퀘냐와 신다린은 그 집착에서 나왔고, 그 언어들이 사용될 세계를 필요로 해서 중간계가 탄생했다.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 소설을 쓰겠다는 기획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언어에 대한 한 학자의 집착이 자연스럽게 뻗어 나간 결과였다.
조지 루카스는 조지프 캠벨의 신화론에 빠져 있었다. 캠벨이 정리한 "영웅의 여정"이라는 서사 구조가 스타워즈의 뼈대가 되었다. 루카스가 발명한 것은 광선검이나 데스스타가 아니다. 자신이 이미 흡수한 신화적 구조를 우주라는 무대 위에 재배치한 것이다.
독창성이란 이런 것이다. 없던 것을 발명하는 일이 아니라, 창작자만이 가진 고유한 편향, 즉 남들은 스쳐 지나가지만 자신만은 유독 오래 들여다보는 대상을 어떻게 재조합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절차적 창작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외부를 향해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내부에 쌓여 있는 데이터를 꺼내어 정리하는 것이다. 주관성이 절차의 첫 단계가 되는 것이다.
픽사의 작가들은 이것을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 “내가 최근에 행복했거나 슬펐거나 화났거나 울었던 순간이 언제일까?” 이 자기 심문이 스토리의 진짜 시작점이다. 이야기는 기성품이 아니며, 아이디어들을 모아 뭉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경험 중 영감을 받았거나 배웠거나 세상과 나누고 싶은 순간을 되감는 데서 시작된다. 중요한 점은 이 자기 심문 자체가 하나의 절차라는 사실이다. 영감이 저절로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정해진 질문을 던져 감정 데이터를 끌어올리는 것. 주관이 절차의 첫 스텝으로 이미 등록되어 있다.
여기서 감각에 관한 한 가지 원칙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발굴해야 할 내부 자료는 생각이 아니라 감각이다. 인스턴트 커피가 말라붙은 일회용 종이컵 하나가 눈앞에 있다고 하자. "이 장면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이 장면이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고민한다. 외로움의 상징일까, 야근의 흔적일까, 도시인의 피로일까. 그런데 이건 감각이 아니라 해석이다. 해석은 나중에 와도 된다. 먼저 와야 할 것은 이 컵이 손끝에서 어떤 감촉을 내는가, 말라붙은 커피 자국은 바삭거리는가 축축한가, 컵을 엎으면 질척거리는가 소리가 나는가, 향은 아직 남아 있는가 눅눅하게 가라앉았는가 같은 질문들이다.
이 감각들을 언어로 변환하는 훈련이 창작자의 내부 광산을 개발하는 일이다. 톨킨의 호빗이 양탄자 구멍의 감촉에서 나왔듯, 이야기의 씨앗은 어떤 장면의 질감을 오래 들여다본 그 경험에서 나온다. 이것이 세계관 IP 절차적 창작이 말하는 오감 데이터 채굴이며, 그 채굴의 대상이 다름 아닌 창작자 본인의 감각 기록이다. 주관이 절차의 재료로 들어와 있다는 말은 이런 것을 가리킨다. 감각도 감정도 편향도 집착도, 전부 절차가 요구하는 입력값이다.
그리고 픽사가 남긴 결정적인 한마디. “당신이 겪은 일들이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 둘 없으므로, 같은 이야기를 할 확률도 없다. 이것이 당신이 지닌 초능력이다. 오직 당신만이 세상을 당신의 방식으로 본다.”
이 문장이 절차적 창작에 대한 오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절차가 있다는 말은 주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절차가 주관을 체계적으로 발굴해 조건화한다는 뜻이다. 창작이 어려운 이유는 아이디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자기 안에 이미 쌓여 있는 편향을 발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 편향이 너무 사소하거나, 너무 개인적이거나, 너무 특수해서 보편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픽사 작가들이 말하는 바는 정반대다. 바로 그 특수성이 초능력이다. 보편적이려고 애쓸수록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나오고, 가장 개인적인 지점으로 파고들 때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닿는다. 괴물 이야기가 가족의 완성, 아이를 보호하고 보살피는 아버지 되는 이야기가 되는 순간, 전 세계 아이와 어른이 그 앞에서 울었다.
이 원리는 콘텐츠가 넘쳐 흐르는 시대에 특히 결정적이다. 알고리즘이 문지기 역할을 하는 환경에서는, 모두에게 어느 정도 괜찮은 작품보다 특정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작품이 훨씬 유리하다. 좁을수록 강하고, 깊을수록 오래 간다. 그 좁고 깊음의 원천이 바로 창작자 본인의 고유한 편향이다. 절차적 창작은 그 편향을 체계화하려는 시도이다. 편향을 몰래 감추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명시적으로 끌어내어 절차의 첫 입력값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축이다. 이야기는 내부에서 나온다. 그리고 절차적 창작은 그 내부를 체계적으로 발굴해 조건화하는 작업이다. 발굴의 축이라 부르자.
발굴된 주관을 전달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다음 단계가 있다. 픽사는 이 단계를 위한 공식 포맷을 갖고 있다. “만약에…(What if…)” 라는 질문이다. 거의 모든 픽사 영화의 출발점이 이 질문 한 줄로 요약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만약 우주 밖 어딘가에 생명체가 있다면 어떨까?”
“만약 쥐 한 마리가 고급 음식을 만들고 싶어했다면?”
“만약 우리 장난감들이 사실 지각력이 있고 살아 움직일 수 있다면?”
“만약 아이들이 방을 비우면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이 한 줄들이 영화 한 편의 DNA이다. 각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장대한 답변이다.
"만약에…"가 하는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압축과 전달이다. 한 줄로 아이디어를 요약해 누구에게나 들려줄 수 있게 만드는 것. 픽사 작가들이 강조하는 기준은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이다. 두 시간 동안 설명해야 전달되는 아이디어는 애초에 작동하지 않는다. 한 줄로 친구에게 말했을 때 친구의 눈이 반짝이지 않으면, 그 아이디어는 다시 공들여야 한다.
다른 하나는 창의적 프로세스의 시동이다. 픽사 작가들은 이 기능을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에 질문들은 상상력의 동력원이에요. 잠긴 문을 열어주는 열쇠와 같죠. 우리 두뇌의 이성을 담당하는 부분을 잠시 멈추고, 꿈을 담당하는 부분에 접근하게 해주죠.” 이성이 닫아 놓은 문을 여는 열쇠라는 비유가 정확하다. "이게 가능한가?"라고 물으면 이성이 먼저 대답한다. “안 된다.” 그런데 "만약 가능하다면?"이라고 물으면 이성은 잠깐 물러난다. 그 물러난 자리에 상상력이 들어간다.
최고의 "만약에…"는 개인적 울림을 가진다. 픽사의 한 단편 애니메이션은 이 한 줄에서 출발했다. “만약 어린아이였던 내가, 내 아버지가 마음속에서 정신성과 믿음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마침내 볼 수 있게 된다면?” 이 질문 하나가 한 편의 단편 전체의 지시서가 되었다. 제작진에게 감독이 준 유일한 지시가 이 한 문장이었다고 한다. 이 한 문장 안에 주인공(어린아이였던 나), 대상(아버지), 동기(마침내 이해하고 싶음), 수단(볼 수 있게 된다면), 정서적 핵심(정신성과 믿음)이 전부 들어 있다. 이 한 줄이 있으면 나머지는 따라온다.
여기서 절차적 창작과 픽사의 방식이 겹치는 지점이 분명해진다. "만약에…"는 주관을 객관의 형식으로 번역하는 장치이다. 앞 절에서 발굴한 개인의 감정과 편향은 그 자체로는 전달될 수 없다. 누구에게 들려줘도 “그게 뭐” 하는 반응만 돌아온다. 그런데 그 감정과 편향을 "만약에…"라는 질문의 형식에 담으면, 갑자기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시드가 된다. 주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달 가능한 조건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질문의 형식 자체가 주관을 절차의 재료로 만드는 기제이다. 절차적 창작이 말하는 "주관의 조건화"가 바로 이 지점에서 구체적 도구로 드러난다.
이 “만약에…” 포맷은 세계관 창작의 맥락에서 시드 키워드의 정규 포맷과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한다. 세계관 창작에서 시드는 거대한 세계가 뻗어 나가기 위한 단 하나의 날카로운 출발점을 가리킨다. 시드가 될 수 있는 것은 여섯 가지이다. 법칙, 장면, 캐릭터, 키워드, 스토리, 장르. 이 중 어느 것이 시드가 되든, 그것을 질문형으로 재배치하면 "만약에…"가 된다.
“거짓말을 하면 신체에 물리적 변화가 생기는 세계라면?” (법칙 시드)
“1910년 만주, 영국의 여의사가 기차에서 내린다면?” (장면 시드)
“녹슨 금속, 붉은 달, 유랑하는 성직자가 공존한다면?” (키워드 시드)
서술문 "1910년 만주, 영국의 여의사가 기차에서 내린다"와 질문문 "만약 1910년 만주에 영국의 여의사가 도착한다면?"은 같은 데이터를 담고 있다. 그러나 후자는 독자를 공범으로 초대한다. 질문 부호 하나가 만드는 차이가 이것이다. 서술문은 독자에게 "이런 세계가 있다"고 알려주지만, 질문문은 독자에게 "이 세계의 답을 함께 상상해 보자"고 손을 내민다. 해석자가 공범이 되는 순간이 질문 부호 하나에서 시작된다. 픽사의 "만약에…"와 세계관 IP의 시드가 같은 원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둘 다 주관을 객관의 형식으로 번역해 타인을 창작의 공범으로 초대하는 장치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한 줄의 "만약에…"가 진짜 날카롭기 위해서는 그 뒤에 수백 수천 개의 사용되지 않은 "만약에…"가 버티고 있어야 한다. 가능한 모든 질문을 던져본 뒤에 남은 하나만이 압축력을 가진다. 처음부터 날카로운 한 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충분히 많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핵심 키워드 하나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버려지는 시드 키워드가 수천 개 필요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게임에서 레어 아이템이 의미를 가지려면 수백 개의 일반 아이템이 존재해야 한다. 일반 아이템이 없으면 레어 아이템이라는 구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관의 핵심 한 줄은 이것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으려면, 그 아래에 수천 개의 사소한 설정과 소소한 감각과 버려진 대안이 있어야 한다. 그 두꺼운 아래층이 위의 한 줄을 단단하게 만든다.
창작자가 "내 세계관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한마디의 문제가 아니라 아래층의 부피가 부족하다는 신호이다. 절차적 창작은 바로 이 아래층을 대량으로 쌓기 위한 시스템이다. 여기서 절차적 창작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가 풀린다. 대량 생산이 주관을 배제한다는 오해. 대량이라는 단어가 기계적 반복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읽히지만, 실제로 대량 생산되는 것은 완성품이 아니라 주관의 변주이다. “이 감정을 저 형태로 담아보면?” “이 편향을 저 장르로 재배치하면?” “이 장면을 저 시대로 옮기면?” 이런 실험이 수천 번 반복되는 것이 대량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이다. 주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을 대량으로 실험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실제로 태어나는 지점에 관해 픽사는 매우 명료한 정의를 갖고 있다. 먼저 용어를 정리하자.
세계(World)란 무엇인가. 픽사 작가들의 정의는 이것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일어날 환경, 혹은 일련의 법칙.” 이 정의의 두 번째 부분 — 일련의 법칙 — 이 중요하다. 세계는 지도나 설정집이 아니라 작동하는 규칙들의 집합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덧붙인다. “산호초와 같이 피상적인 것일 수도 있고 한 여자아이의 마음처럼 추상적인 것일 수도 있죠.” 니모를 찾아서의 산호초 바다와 인사이드 아웃의 한 여자아이 머릿속이 같은 층위의 "세계"라는 것이다. 외부 공간이든 내면이든 상관없다. 법칙이 작동하는 어떤 영역이기만 하면 세계가 된다.
캐릭터(Character)란 무엇인가. “이야기의 여행 속에서 따라가는 대상 혹은 개인.” 단순한 정의이다. 독자가 눈을 붙이고 따라가는 존재. 그것이 캐릭터이다.
이제 흥미로운 질문. 세계관과 캐릭터, 무엇이 먼저인가? 픽사 내부에서도 입장이 갈린다고 한다.
한쪽은 캐릭터 우선주의이다. “캐릭터는 왕이다.” 그들이 드는 예가 기가 막히다. “바지 입는 것을 잊어버리고 출근하는 눈먼 사람은, 앞이 잘 보이는 사람이 바지 입는 것을 잊고 출근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죠.” 사물과 배경이 전부 똑같은데, 주인공의 시각 유무 하나만 바뀌어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캐릭터가 바뀌면 세계가 같아도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른 쪽은 세계관 우선주의이다. 먼저 무대를 정해야 여러 명의 다른 캐릭터가 들어가 이야기를 만들어낼 공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세계가 정해지면 그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종류가 걸러지고, 그 걸러진 사건들을 겪는 인물들이 캐릭터가 된다.
그리고 픽사 작가들의 결론. “어떨 때는 세계관이 먼저이고, 어떨 때는 캐릭터가 먼저이죠. 어느 쪽이든, 이야기는 두 가지 요소가 만나는 순간에 태어납니다.”
이 결론이 절차적 창작과 만나는 지점이 중요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잘못된 질문이다. 진짜 질문은 "닭과 달걀이 어떻게 만나는가"이다. 세계관 창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만 쌓아 두면 그것은 설정집일 뿐이다. 캐릭터만 만들면 그것은 인물 소개서일 뿐이다. 둘이 만나는 순간, 즉 이 세계의 법칙 안에서 이 캐릭터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제야 이야기가 발생한다. 절차적 창작은 바로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발생하게 만드는 설계이다. 세계와 캐릭터가 한 번 만나서 한 편의 이야기가 태어나는 것은 영감이지만, 같은 세계관 안에서 새로운 캐릭터가 매번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게 만드는 것은 절차이다. 절차적 창작이 세계와 캐릭터를 분리해 관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분리되어야 다시 만날 수 있다. 분리되지 않으면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난다.
스타워즈를 생각해 보자. 픽사 작가 중 한 명은 스타워즈가 자신을 매혹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엄청난 만약에 질문을 품고 있었어요. 만약 반란군이 있었는데 그들이 인간 영혼의 수호자가 되고 싶어하고, 만약 감정이 없는 기계가 미묘한 인간 감정을 없애기 위해 엄청난 전쟁을 벌이고 있다면 어떨까.” 이 “만약에…” 질문은 세계관 쪽에 속한다. 이 질문이 제기되는 순간, 그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종류의 캐릭터가 걸러진다. 루크 스카이워커라는 청년은 이 걸러짐의 결과이다. 세계가 먼저이고, 그 세계가 호출한 캐릭터가 루크이다. 같은 세계가 한 솔로를 호출하고, 레아 공주를 호출하고, 다스 베이더를 호출한다. 한 번의 만남이 아니라 수십 번의 만남이 같은 세계관 안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토이 스토리는 반대 방향일 수도 있다. 장난감이라는 캐릭터가 먼저 떠오르고, 그 장난감들이 살 수 있는 세계가 그에 맞춰 구축되었을 수도 있다. 픽사 작가들은 토이 스토리의 세계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성장에 대한 정말 아름다운 비유를 담고 있어요. 밖에서 보기엔 정말 단순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주 복잡하고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장난감이 주인 아이로부터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는 이야기는 결국 성장하는 아이가 자신이 사랑한 것과 이별해야 한다는 보편 경험의 우화이다. 캐릭터(장난감)의 두려움이 먼저 있었고, 그 두려움이 살 수 있는 세계(장난감이 실제로 생각하고 느끼는 세계)가 뒤따라 지어졌다.
코엔 형제의 레이징 애리조나는 또 다른 방향이다. 이 영화에서는 세계관이 뒷짐을 지고 주인공에게 주도권을 맡긴다고 한다. 세계는 소박한 미국 서부의 사막 동네이고, 그 안에서 주인공의 욕망이 이야기를 전부 끌고 간다. 세계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 영화도 있다는 것이다.
세 방향 모두 유효하다. 공통점은 단 하나. 어느 쪽이든, 세계와 캐릭터가 만나는 순간에 이야기가 태어난다는 것이다. 만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난 이후에야 사건이 발생한다.
이 만남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실무적으로는 네 개의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인물, 사건, 사물, 장소. 캐릭터는 "인물"로 세분되고, 세계는 "사건, 사물, 장소"로 세분된다. 픽사가 말하는 2축 체계(세계 vs 캐릭터)를 더 작은 단위로 쪼개면 이 4축이 된다. 2축은 사람이 이야기를 설계할 때의 직관이고, 4축은 그 설계를 실제로 조립할 때의 스키마이다. 직관과 스키마는 모순되지 않는다. 같은 대상을 다른 해상도로 본 것일 뿐이다. 절차적 창작이 4축을 쓰는 이유는 AI와 같은 외부 도구가 읽을 수 있는 구조화된 데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물만 따로 추출해 변수로 다루고, 장소만 따로 교차 링크를 걸어야 같은 세계관 안에서 새로운 조합이 자동으로 생성될 수 있다.
그리고 세계가 "환경, 혹은 일련의 법칙"이라는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보면 한 가지 구분이 추가로 필요해진다. 법칙(law)과 규칙(rule)은 다르다. 법칙은 그 세계에서 위반이 불가능한 자연의 질서이다. 지구에서 물체는 아래로 떨어진다. 이것은 의지로 거스를 수 없다. 창작자가 설정한 물리적, 마법적 기본 질서가 법칙이다. 규칙은 다르다. 규칙은 그 세계 안의 슬롯적 약속이다. 법은 지켜야 하지만 어길 수 있다. 어겼을 때 처벌이 따른다. 도덕도 규칙이다. 이 구분이 실무적으로 왜 중요한가 하면, 주인공이 법칙을 어기면 세계관의 정합성이 무너지지만, 주인공이 규칙을 어기면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법칙은 단단하게, 규칙은 어길 수 있게. 이 두 층위가 공존해야 세계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이야기를 계속 낳을 수 있다. 세계와 캐릭터가 만나는 자리에서 실제로 부딪히는 것은 바로 이 규칙이다. 법칙은 무대의 바닥이고, 규칙은 그 위에서 깨지고 다시 세워지는 벽이다.
스타워즈가 이 원리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스타워즈 우주에서는 소리가 들린다. 실제 우주에서는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데, 영화에서는 스타 디스트로이어가 화면을 가로지를 때 굉음이 난다. 이것은 과학적 오류가 아니다. 조지 루카스가 "나의 우주에서는 소리가 들린다"고 선언한 것이고, 그 선언이 이 세계의 법칙이 되었다.
관객은 이 법칙에 동의한다. 그 뒤부터 이 세계에서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불변의 사실이다. 팬들은 나중에 "이 우주에 에테르가 가득 차 있어서 소리가 전달된다"는 해석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세계 내부의 일관성이 현실의 물리 법칙을 압도하는 순간이다. 이것이 세계관이 작동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이다.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 일관되느냐 아니냐가 관객의 몰입을 결정한다.
이것이 두 번째 축이다. 이야기는 두 요소가 만날 때 태어난다. 그리고 절차적 창작은 그 만남을 우연이 아니라 반복적 사건으로 만드는 설계이다. 만남의 축이라 부르자.
세 번째 축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을 먼저 공유해야겠다.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빛의 입자로 둘러싸인 그 독특한 캐릭터는 최종 공개까지 17번째 버전을 거쳤다고 한다. 17번이다. 한 번의 성공적인 디자인이 나올 때까지, 16번의 "이건 아니다"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숫자를 기억해 두자. 픽사가 아무나 일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애니메이터, 작가, 감독들이 모인 곳이다. 그런 사람들조차 한 캐릭터를 위해 17번의 불합격을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숫자가 바로 절차적 창작이 왜 영혼 없는 기계가 아닌지를 설명해 준다.
픽사는 이 과정을 피칭(Pitching)과 피드백(Feedback)이라는 공식 절차로 갖추고 있다. 피칭은 스토리보드나 간단한 형상화를 통해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피드백은 피칭 관객으로부터 어떤 점이 좋았거나 그렇지 못했는지 듣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 반복된다. 스토리보딩 → 피칭 → 피드백 → 다시 스토리보딩 → 다시 피칭 → 다시 피드백. 픽사 작가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몇 번이고 반복하며 스토리를 계속 다듬습니다.” 몇 번이고, 라는 표현이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정말로 몇 번이고 반복한다.
여기서 픽사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다. 이야기는 단일 발상이 아니라 수년에 걸친 반복 수정의 산물이다. 통념은 천재적인 한 사람이 영감을 받아 한 번에 걸작을 쓴다고 말한다. 그런 통념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나는 영감이 없으니 쓸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픽사의 제작 현장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이 통념을 산산조각 낸다. 그들은 영감에 의존하지 않는다. 절차에 의존한다. 그리고 여기서 절차적 창작이 왜 영혼을 배제하지 않는지가 드러난다.
절차는 영감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영감이 한 번만 오고 끝나지 않도록 그것을 16번 더 호출하는 구조이다. 첫 번째 영감은 첫 번째 버전을 만들고, 피드백은 두 번째 영감을 호출하고, 그것이 두 번째 버전이 된다. 17번째까지 오는 길은 16번의 영감을 조직적으로 호출한 길이다. 영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영감이 한 사람의 운에 맡겨지지 않도록 절차가 보호한다는 뜻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대답은 현실적이다. 대중문화가 통속적인 것은 결함이 아니라 설계이다. 사람들의 에너지 예산은 생계, 가족, 자기계발에 먼저 배분된다. 남은 에너지로 콘텐츠를 소비한다. 그런데 소비자들은 매일 소비하고 싶어한다.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읽고 싶어한다. 한강 작가님이 매일 글을 써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불가능하다. 작가의 영감으로 불타오르는 작품은 10년에 하나 나온다. 그걸 매일 소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절차적 방식, 반복 수정 방식, 공장형 품질 관리 방식이 필요하다. 픽사의 피칭-피드백 루프는 영감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영감을 절차의 첫 단계에 배치하고, 나머지 단계가 그 영감을 다듬고 확장하고 보호하게 하는 설계이다.
이 원리는 일상의 한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넷플릭스를 켜 놓고 30분 동안 무엇을 볼지 고르다가 결국 예전에 봤던 것을 또 보는 경험. 많은 사람이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 번도 선택해 본 적 없는 타이틀들이 끊임없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미 재미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또 본다.
이 현상의 본질은 신용이다. 새로운 콘텐츠에는 신용이 없다. 이것이 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보증이 없다. 신용을 얻으려면 이미 내가 선택한 것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달라야 한다. 익숙하면서 새롭고, 새로우면서 익숙한 그것. 장르라고 부르는 영역에 들어가야 겨우 선택받는 것이다.
픽사의 17번째 버전이라는 숫자는 바로 이 신용을 만들기 위한 반복이다. 16번의 불합격은 모두 "관객이 이 버전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의 약속을 믿을 수 있게 만들기"까지 가기 위한 걸음이었다. 익숙함과 새로움이 동시에 성립하는 지점은 영감으로 도달할 수 없다. 절차로만 도달한다.
세계관 IP 기반 절차적 창작에서 이 반복 구조는 설계서 작성, 세계관 리서치, 집필, 검수의 네 단계로 공식화되어 있다. 피칭-피드백이 "스토리보드 → 관객 반응 → 재스토리보드"의 외부 루프라면, 이 네 단계는 "설계 → 집필 → 검수 → 재설계"의 내부 루프이다. 외부 루프는 공동체와의 대화이고, 내부 루프는 기준과의 대화이다. 두 루프의 역할은 다르다. 외부 루프만 있으면 남의 말에 휘둘리고, 내부 루프만 있으면 자기만족에 갇힌다. 두 루프가 모두 있어야 17번째 버전까지 갈 수 있다. 절차적 창작이 이 두 루프를 동시에 설계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절차는 창작자를 외롭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남의 말에 끌려다니게도 만들지 않는 장치이다.
그리고 여기서 픽사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조언이 나온다. 미켈란젤로의 지우개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픽사 스토리보드 아티스트가 고등학교 미술 선생으로부터 들은 말이라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남긴 선 자국 중 많은 것은 실수다. 그는 원하는 자국을 남기려고 고심했고, 맞는 선을 찾기까지의 흔적을 지울 필요는 없었다. 선생의 가르침은 이러했다. “지우개를 버려라. 아니지, 사실은 지우개를 사용해. 없애는 대신 무언가 그려보도록 해라. 너희가 자꾸 망치고 있다면 적어도 원래 시작했던 곳에서 더 나은 곳으로 진전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이 조언이 창작에 관한 통념을 하나 더 수정한다. 통념은 "좋은 창작자는 실수를 지운다"고 말한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대리석과 드로잉에 남은 흔적을 보면 정반대이다. 좋은 창작자는 실수를 덮어 그린다. 지우면 사라지지만, 덮어 그리면 다음 층이 된다. 첫 번째 선이 틀렸어도, 그 위에 두 번째 선을 그으면 두 선 사이의 거리가 다음 방향을 알려준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맞는 선을 찾는 것보다, 틀린 선 옆에 다음 선을 그어 거리를 좁혀가는 것이 훨씬 빠르다.
이 원칙은 세계관 창작의 모순 처리 원칙과 정확히 같다. 세계관을 확장하다 보면 설정 모순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제 적은 캐릭터의 나이와 오늘 적은 사건의 연도가 맞지 않는다. 이 세계의 경제 체제와 저 지역의 문화가 서로 안 맞는다. 초심자는 이런 모순을 발견하면 괴로워한다. 전부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베테랑은 모순을 덮는다. 모순 자체를 다음 이야기의 재료로 만드는 것이다.
“왜 이 캐릭터의 나이와 저 사건의 연도가 안 맞는가?” 이 질문 자체가 새로운 설정을 부른다. 어쩌면 이 캐릭터는 시간 여행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사건의 공식 연도가 조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모순을 지우는 대신 덮어 그리면, 모순은 더 이상 결함이 아니라 다음 층위의 재료가 된다. 세계관 IP 기반 절차적 창작이 "세계관은 100개를 전부 집어넣어야 풍부해진다. 약간의 설정 모순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나중에 잡으면 되는 문제이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켈란젤로와 세계관 작가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이 세 번째 축이다. 이야기는 절차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절차는 영감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을 반복 가능하게 보호하고, 실수를 지우개가 아니라 덧그림으로 처리하는 설계이다. 구조의 축이라 부르자.
구조의 축을 조금 더 파고들면 한 가지 실용적인 조언에 도달한다. 완벽주의를 해체하는 법에 관한 것이다. 이 주제가 중요한 이유는, 절차적 창작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와 정확히 반대되는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해는 이렇다. “절차가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진실은 정반대이다. 절차는 완벽하지 않은 초안이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장치이다.
픽사 작가들은 아이디어의 생애 주기를 세 단계로 설명한다.
첫 단계는 생성이다. 픽사 작가의 표현이 이것이다. “아이디어는 보통 처음 생겨날 때 어떤 개념에 불과하죠. 만약에, 글쎄? 같은 느낌이죠.” 이 표현이 정확하다. 초안은 확신이 아니라 “만약에, 글쎄?” 정도의 주저함이다. 완성된 아이디어가 머리에서 튀어나오기를 기다리면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초안은 원래 약하다. 약한 것이 정상이다.
두 번째 단계는 보완이다. “견고하고 뭔가 해볼 만한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계속 보완해 나가야만 해요.” 그리고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이 붙는다. “매 버전에 불합격을 줄 때마다 최종 아이디어에 더욱 가까워지는 거죠.” 불합격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불합격은 지도이다. 한 번의 불합격은 "이 방향은 아니다"라는 한 개의 정보이다. 그 정보가 쌓여야 맞는 방향이 드러난다. 불합격을 두려워하는 창작자는 자기도 모르게 지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전이이다. 나를 움직인 아이디어가 타인에게도 호소력을 갖는다는 보장은 없다. 타인을 그들 자신의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이야기에 지성을 부여하고, 감정에 직접 접근하게 해서 캐릭터에 몰입시켜야 한다. 이 과정이 전이이다. 나만 끌리는 것이 아니라 남도 끌리게 하는 단계. 이것이 보완보다 어렵다.
이 세 단계를 관통하는 원칙 하나가 있다. 처음의 감정적 끌림을 기억하라. 픽사 작가들의 표현은 이것이다.
“아이디어가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아도 돼요. 더 중요한 것은 감정적으로 여러분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느냐죠. 만약 있다면, 계속 아이디어를 바꾸고 보완해 나가면서도 처음 그 아이디어에 여러분을 끌어당겼던 그 느낌을 항상 기억하세요.”
시드의 정체는 데이터가 아니라 이 끌림이다. 1절의 논의와 여기서의 논의가 다시 만난다. 괴물 이야기를 만들던 창작자를 끌어당긴 것은 "괴물이 회사에 다닌다"는 설정의 아이디어적 참신함이 아니었다. 그 뒤에 숨은 자신의 부성에 대한 감정이었다. 톨킨을 끌어당긴 것은 "호빗"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양탄자 구멍의 감촉이었다. 루카스를 끌어당긴 것은 "우주 전쟁"이 아니라 영웅의 여정이라는 신화 구조의 아름다움이었다. 각자의 끌림이 있고, 그 끌림만이 16번의 불합격을 견디게 해 준다. 끌림이 없는 아이디어는 두 번째 불합격에서 버려진다.
여기서 절차적 창작과 완벽주의의 관계가 선명해진다. 완벽주의는 주관과 절차 사이의 오해에서 생긴다. 완벽주의자는 주관이 완벽한 상태로 먼저 성립해야 절차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머릿속의 아이디어가 완성되기 전에는 한 글자도 쓸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픽사가 보여주고 절차적 창작이 주장하는 것은 정반대이다. 주관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절차에 진입하고, 절차가 그것을 완성한다. “만약에, 글쎄?” 수준의 주저함이 1번째 버전으로 등록되고, 피드백을 거쳐 2번째가 되고, 16번의 불합격을 거쳐 17번째가 된다. 주관이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가 없다. 절차가 그 불완전함을 품어 주고, 단계마다 한 조각씩 다듬어 주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의 정체는 실은 외부의 시선이다.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 충분히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평가만 하고 있는 상태이다. 마법과 뱀파이어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이 유치하게 느껴지는 순간, 그것은 창작자가 자신의 세계 바깥에 서 있다는 신호이다. 프로 창작자는 이 경계를 넘는다. 자신이 설계한 세계의 배역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그 세계의 논리를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끼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 들어가는 상태를 나는 다이브(dive)라고 부르는데, 다이브의 반대가 완벽주의이다.
다이브한 사람은 자기 세계의 내부 논리에 몰입해 있고, 바깥의 평가가 들리지 않는다. 반대로 완벽주의자는 자기 세계 바깥에 서서, 밖에서 들어오는 가상의 비평만을 듣고 있다. 그 비평은 대개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독자의 목소리이고, 창작자 본인이 투사한 불안이다. 다이브가 깊어지면 완벽주의는 자연히 해체된다. 내부에 충분히 들어간 사람은 바깥의 시선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절차적 창작에 대한 오해가 여기서도 한 겹 더 벗겨진다. 절차는 다이브를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이브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지지대이다. 매일 다이브해도 지치지 않도록 설계된 루틴이 절차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진전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앞에 그림이 쌓여 있거나 종이가 산처럼 쌓여 있다면 이미 진전하고 있는 것이다. 작업의 부피 자체가 진전의 증거이다. 17번째 버전까지 가는 길은 아름답지 않다. 16번의 불합격은 아마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17번째가 나온 것은 16번을 버려 낸 덕분이다. 버려진 16번이 쌓여 있는 자리가 곧 17번이 서 있는 자리이다. 버려진 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버려진 것 위에 다음 층이 얹힌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지우개가 다시 돌아온다.
여기까지 와서 세 개의 축을 다시 바라본다.
첫째, 발굴의 축. 이야기는 내부에서 나온다. 창작의 원재료는 외부가 아니라 창작자 자신의 편향과 집착과 감정이다. 괴물 이야기가 부성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양탄자 구멍이 중간계의 샤이어가 되는 순간, 캠벨의 신화론이 스타워즈의 뼈대가 되는 순간, 모두 내부의 무언가가 외부의 형식을 알아보고 거기에 들러붙은 것이다. 절차적 창작은 이 내부를 체계적으로 발굴해 절차의 첫 입력값으로 등록하는 작업이다.
둘째, 만남의 축. 이야기는 두 요소가 만날 때 태어난다. 세계만 있으면 설정집이고, 캐릭터만 있으면 인물 소개서이다. 둘이 만나야, 즉 이 세계의 법칙 안에서 이 캐릭터가 움직이기 시작해야, 비로소 이야기가 발생한다. 네 개의 서사 축 — 인물, 사건, 사물, 장소 — 도 같은 원리의 더 세밀한 버전이다. 절차적 창작은 이 만남이 한 번의 우연이 아니라 같은 세계관 안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도록 설계하는 작업이다.
셋째, 구조의 축. 이야기는 절차로 만들어진다. 단일 발상이 아니라 반복 수정의 산물이며, 영감이 아니라 피칭-피드백 루프가 질을 결정한다. 17번째 버전이 최종본이 되는 이유는 한 명의 천재가 있어서가 아니라 16번의 불합격을 견딘 절차가 있어서이다. 미켈란젤로의 지우개는 이 절차의 은유이다. 실수를 지우지 말고 덮어 그려라. 모순을 결함으로 취급하지 말고 다음 층위의 재료로 삼으라.
세 축은 독립적이지 않다.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나는 자리에는 세 축이 동시에 작동한다. 내부에서 끌림이 일어나고(발굴), 그 끌림이 세계와 캐릭터라는 두 요소를 호출해 만나게 하고(만남), 그 만남을 절차적으로 반복 수정하여 다듬어 낸다(구조). 이 세 가지가 함께 돌아가야 이야기가 된다. 하나만 부족해도 이야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절차적 창작은 영혼 없는 기계적 대량 생산인가?
답은 명확하다. 절차적 창작은 주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을 가장 먼저 발굴해 조건화한다. 영감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이 한 사람의 운에 맡겨지지 않도록 16번 더 호출한다. 완벽한 초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초안이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보호한다. 기계처럼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변주를 대량으로 실험한다. 픽사의 몬스터 주식회사가 17번째 버전까지 오는 길이 영혼 없는 공정이었는가? 그 길 위의 모든 걸음은 창작자의 개인적 부성(父性)이 더 정확하게 보이도록 주관을 다듬는 작업이었다. 절차는 그 다듬기를 16번 가능하게 해 준 장치였다. 주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관이 16번 정제된 것이다.
이것이 픽사의 Pixar in a Box가 보여주는 것이고, 세계관 IP 기반 절차적 창작이 오래 설명해 온 것이다. 두 이름이 다를 뿐, 말하는 것은 같다. 이야기는 주관에서 시작해 절차를 거쳐 다시 주관에게 돌아간다. 돌아오는 주관은 처음 나갔던 주관보다 더 정확하고, 더 전달 가능하고, 더 깊다. 그것이 창작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실체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미지를 남기고 싶다.
세계관 창작을 종이접기에 비유할 수 있다. 한 장의 종이를 접고 또 접으면 학이 된다. 접는 순서가 틀리면 학이 아니라 구겨진 종이가 된다. 픽사의 Pixar in a Box가 가르쳐주는 것, 그리고 세계관 IP 기반 절차적 창작이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접는 순서이다. 내부를 먼저 발굴하고, 세계와 캐릭터가 만나게 하고, 그 만남을 반복 수정하는 순서. 이 순서를 지키면 학이 된다. 학은 날 수 있다.
구겨진 종이에도 학의 가능성은 있다. 다만 펼쳐서 처음부터 다시 접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미 구겨진 종이를 갖고 있을 것이다. 괜찮다. 접는 순서를 알면 된다. 그리고 그 순서의 첫 단계는, 바깥의 완벽한 아이디어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괴물이 사실은 아버지 되는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거기가 이야기가 태어나는 자리이다.
김동은WhtDrgon @MEJE.kr의 세계관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