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케 헌드레드와 해외 증류소에서 찾은 류(RYU)의 다음 만남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서 선물 상자가 하나둘 도착합니다.
그중에 올해도 류 증류소(RYU Distillery)의 상자가 있었습니다. 강화도 마니산 자락에서 소주를 빚는 곳입니다. 명절마다 빠지지 않고 보내 주신 덕분에 매번 잘 마시고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이번에는 답례를 조금 다르게 해 보려 합니다.
좋은 술을 마셔 보는 것과 그 술의 팬이 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맛있게 마신 술도 다시 찾을 계기가 없으면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납니다. 브랜드가 한 번 만난 사람을 어떻게 다시 만날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팬이 되고 팬덤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국내외 사례를 찾아 정리했습니다. 이번 FanCase가 제가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하는 답례입니다.
류는 2025년 7월 강화에 양조장을 열었습니다. 원료는 강화의 섬쌀과 물입니다. 효모는 마니산에서 채집한 야생 효모를 오랜 시험 끝에 직접 개발했습니다. 이름은 'RYU-YEAST'입니다. 효모가 다르면 발효의 흐름과 향, 여운이 달라집니다. 류는 이 효모를 브랜드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대표 제품 류40 오리진(RYU 40 ORIGIN)은 증류 원액 가운데 도수 80%에서 59.9% 구간만 모아 만듭니다. 증류할 때 처음 나오는 초류와 마지막의 후류를 버리고 가운데 부분만 쓰는 방식입니다. 원액의 일부는 오크통에 숙성합니다. 숙성실에는 수백 개의 배럴이 놓여 있습니다. 국내 전통 증류소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입니다.
주력 제품은 식중주인 류24 클래식(RYU 24 CLASSIC), 천천히 음미하는 류40 오리진, 진(Gin) 스타일의 서해25(WEST SEA 25) 세 가지입니다. 병은 직접 금형을 떠서 만들었습니다. 류의 병은 강화의 갯벌을, 서해의 병은 파도를 본떴습니다. 양조장은 생산 동과 방문객 동, 두 동으로 지었습니다. 처음부터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전제로 설계한 것입니다.
류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무대에 섰습니다. 2025년 경주 APEC CEO 서밋 만찬에 올랐고, 이를 기념한 리더스 에디션을 한정으로 냈습니다. 불가리 긴자 바(BVLGARI GINZA BAR)와 도쿄 마쓰야(Matsuya) 팝업에도 진출했습니다. 올해는 정관장과 함께 홍삼주 '류 레드 53(RYU RED 53)'을 내놓았습니다. 웹사이트 아카이브에는 이런 대외 활동과 협업이 11편의 에피소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오크숙성실에서 원액을 직접 맛보는 도슨트 투어도 시작했습니다.
브랜드 슬로건은 'Refine Soju. Redefine Korean Spirit.'입니다. 소주가 원래 가진 가치를 다듬고, 한국 증류주의 기준을 새로 정의하겠다는 뜻입니다. 홍원섭 대표는 한국인이 중요한 사람에게 자부심을 갖고 선물할 수 있는 술을 만들고 싶다고 말합니다. 해외에서 한국 술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재료와 철학, 이력은 이미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팬덤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팬덤브랜딩에서 팬은 브랜드의 철학을 지지하고, 그 지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한 번 사서 마신 사람이 곧 팬은 아닙니다. 다시 찾고, 남에게 권하고, 브랜드의 일에 자기 시간을 쓰는 사람이 팬입니다. 그리고 팬덤은 팬과 브랜드, 팬과 팬 사이의 관계가 이어질 때 유지됩니다.
류와 관계를 맺는 경로는 여러 가지입니다. 직접 사서 마신 사람이 있습니다. 명절 선물로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호텔이나 바에서 한 잔을 경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도슨트 투어로 강화에 다녀온 사람도 있습니다. 류를 메뉴에 올린 셰프와 바텐더도 있습니다. 그런데 공개된 채널에서는 이들이 류와 한 번 만난 뒤 다시 이어질 통로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류는 이 사람들과 어떻게 다음 만남을 만들 수 있을까요?
사케 헌드레드(SAKE HUNDRED)는 2018년 일본의 클리어(Clear Inc.)가 만든 고급 사케 브랜드입니다. 첫 제품 백광(百光, BYAKKO)의 출시가는 16,800엔이었습니다. 1년 반 동안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코마 류지(生駒龍史) 대표는 이름 없는 벤처의 술을 그 가격에 살 사람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2년은 매출보다 '믿을 근거'를 쌓는 데 집중했습니다. 미쉐린 레스토랑 납품과 국제 품평회 수상 이력이 그 근거가 됐습니다.
2020년에는 브랜드를 전면 개편했습니다. 계기는 에르메스(Hermès) 본사 부사장을 지낸 사이토 미네아키(齋藤峰明)의 바카라이었습니다. 이코마 대표는 이 바카라을 읽고 '프리미엄'과 '럭셔리'를 구분하게 됐습니다. 그가 이해한 프리미엄은 다른 제품보다 드물다는 상대적 가치입니다. 럭셔리는 만드는 사람이 쌓아 온 것의 높이입니다. 이후 백광의 가격은 38,500엔까지 올랐습니다. 2024년에는 1만 병 추첨에 7만 명 넘게 응모했습니다.
백광은 지금도 추첨으로 판매합니다. 그런데 대표는 추첨으로만 팔리는 상황을 문제로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백광을 마시고 사케가 맛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술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24년 겨울,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원료미로 바꿨습니다. 희소성에만 기대지 않고 제품의 가치로 수요를 만들겠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류가 참고할 것은 희소성을 만드는 기술보다, 먼저 믿고 선택할 근거를 쌓았다는 점입니다.
사케 헌드레드의 팬덤을 이해하려면 5주년 기념 기획을 봐야 합니다. 이코마 대표 인터뷰에 따르면, 브랜드는 고객에게 사케 헌드레드와 얽힌 추억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캐나다 북쪽 끝으로 오로라를 찍으러 간 사진가의 사연이 왔습니다. 그는 '천채(天彩)'를 챙겨 가서 오로라가 뜬 밤에 마셨습니다. 산악구조대원의 사연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구조한 사람에게서 '심성(深星)'을 선물로 받았고, 동료들과 산에서 별을 보며 마셨다고 했습니다. 상견례 자리에서 이 술 덕분에 분위기가 풀렸다는 사연도 여럿이었습니다.
이코마 대표는 이 사연들을 읽고 생각을 바꿨다고 말합니다. 브랜드가 이상적인 음용 장면을 정해 두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표가 소개한 고객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고객들은 결혼, 승진, 퇴직처럼 삶이 바뀌는 순간에 이 술을 찾았습니다. 구매 동기 2위는 브랜드의 비전에 공감해서였습니다. 고객은 맛뿐 아니라 사케 산업에 도전하는 브랜드의 방향을 함께 산 것입니다.
여기서 류의 아카이브와 차이가 드러납니다. 류의 11편은 브랜드의 대외 활동과 협업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케 헌드레드의 에피소드는 고객의 식탁에서 나옵니다. 브랜드의 무대를 보여 주는 기록은 신뢰를 만듭니다. 고객의 장면을 모으는 기록은 관계를 만듭니다.
다만 모으는 것만으로는 관계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사연을 보낸 사람에게 브랜드가 답해야 합니다. 그 사연을 아카이브에 싣고, 보낸 사람에게 알리고, 다음 소식이나 자리에 초대해야 합니다. 류를 산 사람, 선물한 사람, 받은 사람, 바에서 처음 마신 사람에게는 각자의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듣고 응답하는 일이 류의 다음 아카이브가 될 수 있습니다.
홋카이도의 아케시 증류소(厚岸蒸溜所, Akkeshi Distillery)는 장기 시리즈로 팬과의 관계를 이어 갔습니다.
2020년 10월 '한로(寒露)'를 시작으로 24 절기 이름을 붙인 위스키를 1년에 네 번 냈습니다. 6년 동안 이어진 시리즈는 2026년 8월 '추분'으로 끝났습니다. 발매 순서는 실제 절기 순서와 달랐습니다. 그래도 24칸을 하나씩 채우는 구조는 다음 병을 기다릴 이유가 됩니다. 아케시는 완결 직후 매년 한 병씩 내는 12지 시리즈를 예고했습니다. 틀은 바꾸되 팬과 다시 만날 약속은 이어 가려는 것입니다.
류에게 맞는 틀은 쌀일 수 있습니다. 류의 원료는 강화 섬쌀이고, 쌀은 해마다 작황이 다릅니다. 수확 연도를 붙인 빈티지 라인은 절기처럼 외부에서 가져온 틀이 아닙니다. 류가 이미 가진 사실에서 나온 틀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연도별로 원료를 구분해 관리해야 하고, 그해 농사와 발효의 기록을 함께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라벨에 연도만 붙이면 제품이 하나 늘어날 뿐입니다. 한 해의 기록이 함께 가야 팬이 그 해를 함께 지켜본 사람이 됩니다.
가노스케 증류소(嘉之助蒸溜所, KANOSUKE)는 류와 가장 비슷한 출발점을 가진 곳입니다. 모회사 고마사 양조는 140년 넘게 가고시마에서 소주를 빚어 왔습니다. 1957년에는 일본 최초로 나무통에 숙성한 쌀소주 '메로 코즈루(メローコヅル)'를 만들었습니다. 쌀 증류주를 오크통에 숙성한다는 점에서 류와 방향이 같습니다.
2026년 2월 가노스케는 '오너스 캐스크(OWNER'S CASK)'를 추첨 판매했습니다. 캐스크(cask)는 술을 숙성하는 나무통입니다. 5년 숙성한 원액을 한 통 단위로 파는 프로그램으로, 10통만 준비했습니다. 가격은 한 통에 435만 6천 엔부터였습니다. 통당 198병을 공급하기로 하고, 모든 병 라벨에 오너의 이름을 넣었습니다. 증명서와 통 번호가 새겨진 뚜껑 판도 함께 줍니다.
신청 방식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신청자는 가노스케에 보내는 메시지와 이 프로그램에 거는 마음을 적어 냈습니다. 추첨은 그다음입니다. 증류소가 내건 용도도 인생의 전환점, 회사의 이정표, 가족의 기념일이었습니다. 사케 헌드레드 고객들이 이 술을 찾은 순간과 같습니다. 구매 신청 단계에서부터 브랜드와의 인연을 묻는 설계입니다.
류는 수백 개의 오크통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가격을 낮춘 공동 오너 방식도 가능합니다. 일본의 온라인 주점 크란도(KURAND)는 오키나와의 전통 증류주 아와모리를 한 통 단위로 여러 사람에게 나눠 파는 공동 캐스크 오너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개인 애호가뿐 아니라 류를 다루는 레스토랑과 바도 오너가 될 수 있습니다.
가노스케와 크란도는 이미 숙성한 원액을 나눠 공급하는 방식입니다. 류가 이 방식을 장기적인 관계로 발전시키려면, 병을 나눠 갖는 데서 더 나아가 숙성 중인 통을 함께 기다리는 방식으로 설계할 수 있습니다. 같은 통의 오너들은 몇 년 동안 같은 술을 기다리게 됩니다. 증류소는 그동안 숙성 상태를 정기적으로 알릴 수 있습니다. 해마다 오너들을 강화로 불러 같은 통의 원액을 함께 맛보는 자리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병을 받은 뒤에는 각자 그 술을 누구와 나눴는지 다시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통을 나눠 산 사람들은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됩니다. 공동 구매가 공동 경험으로 바뀌는 지점입니다.
나가노현의 마르스 코마가타케 증류소(Mars Komagatake Distillery)는 해발 798m에 있습니다. 찾아가기 쉬운 곳이 아닙니다. 그래도 방문객들은 매장에서만 파는 한정 위스키를 샀다는 후기를 남깁니다. 도착해야만 살 수 있다는 조건이 이동을 만듭니다.
아일랜드의 제임슨(Jameson)은 이 조건을 하나의 의식으로 만들었습니다. 2015년부터 증류소 방문객은 버번 캐스크에서 직접 술을 받아 병에 담을 수 있습니다. 이를 핸드필(hand-fill)이라고 부릅니다. 방문객은 라벨에 이름과 날짜, 통 번호를 손으로 적습니다. 마지막으로 'Bottle Your Own' 장부에 자기 정보를 기록합니다. 그 병은 증류소에 다녀왔다는 증거가 되고, 장부는 증류소가 방문객을 기억하는 기록이 됩니다.
류의 도슨트 투어에는 이미 오크숙성실에서 원액을 맛보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날 맛본 통에서 직접 병에 담아 가는 방식을 검토해 볼 만합니다. 다만 주세법과 현장 운영 여건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 제안입니다. 제임슨의 장부처럼 방문객을 기록해 두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방문이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소식과 다음 방문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아직 도슨트 투어에 가 보지 못해 공개된 소개를 바탕으로 제안했습니다. 이미 방문객을 기록하고 있다면, 그 기록을 다음 소식과 연결하는 데서 시작하면 됩니다.
이 글에서 소개한 사례에는 모두 제약이 있습니다. 아케시는 한 번에 한 절기씩만 냈습니다. 가노스케는 10통만 팔았습니다. 코마가타케와 제임슨의 한정 병은 증류소에 가야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정판은 모두 좋은 방법일까요?
기준은 한정했느냐가 아니라, 그 제약이 어떤 경험으로 이어지느냐입니다. 숙성 소식을 받고, 함께 맛보고, 증류소를 찾는 경험이 있으면 제약은 다음 만남의 이유가 됩니다. 그런 경험 없이 수량만 줄이면 사람들의 관심은 술보다 되팔 때의 가격으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가노스케는 이 차이를 운영 규칙으로 정해 두었습니다. 병째 되팔기 위한 구매는 제한하고, 음식점에서 잔으로 나눠 제공하는 판매는 허용한 것입니다. 리셀 플랫폼과 연계한 한정판 드롭을 권하지 않는 이유도 같습니다.
팬덤브랜딩은 뚜렷한 철학에서 출발합니다. 류에게는 'Refine Soju. Redefine Korean Spirit.'이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마니산 효모와 강화 쌀이라는 근거도 있습니다. 사케 헌드레드가 처음 2년 동안 쌓은 '믿을 근거'를 류는 이미 상당 부분 갖췄습니다.
사람들이 류를 만나는 경로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투어로 처음 알게 된 사람이 나중에 선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매장을 찾거나 곧바로 강화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고객이 밟아야 할 단계가 아니라, 어느 접점에서 만나든 다음 만남으로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류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물 상자 안에 한 장의 안내를 넣을 수 있습니다. 이 술을 어떻게 마시면 좋은지 알려 주고, 누구와 어떤 자리에서 마셨는지 남길 수 있게 하고, 다음 소식을 받아 볼 수 있게 하는 안내입니다. 바와 레스토랑, 도슨트 투어에서도 같은 통로를 열어 둘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인 이야기에 응답하는 것이 첫 순서입니다. 빈티지와 공동 오너, 증류소 한정 병은 그 관계 위에 하나씩 더할 수 있습니다.
이번 추석에 받은 류는 아직 열지 않았습니다. 이 술을 누구와 어떤 자리에서 마셨는지 적어 두려 합니다. 류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기 시작한다면, 그 기록을 가장 먼저 보내겠습니다.
매번 좋은 술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류도 잘 마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