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에 지친 극장에서 만난 보랏빛 소, 그리고 달라지는 승리의 방식
저도 이쯤에서 영화 <호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최근 몇 년간 극장을 나서며 비슷한 한숨을 쉬는 일이 잦았습니다. 기승전결의 안전한 서사.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 예상 가능한 감동의 타이밍. 한 해에 수백 편의 영화를 보는 저에게 이 반복은 꽤 고역입니다. 그러던 차에 나홍진 감독의 <호프>를 드디어 만났습니다. 세스 고딘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런 소들의 들판에서 보랏빛 소를 마주친 기분이었습니다. 잘 만들었는가를 따지기 전에, 일단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시선을 붙잡는 존재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보랏빛 소가 한 마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사를 거의 비워낸 액션 영화가 베니스에 초청됩니다. 같은 복도를 수십 번 걷는 영화가 게임을 원작으로 만들어집니다. 유튜브에 괴담 영상을 올리던 10대가 할리우드 최연소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물론 극장의 중심은 여전히 프랜차이즈와 속편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도 장르도 규모도 다른 이 사례들이 동시에 돌출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설명형 서사만 잘 갖추면 통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극장 영화가 승리하는 방식이 더 이상 단일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오늘 떠올려 보려는 것은 바로 그 신호입니다.
<호프>는 이상한 영화입니다. <추격자>, <황해>, <곡성>의 나홍진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 SF라는 점부터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작 극장에서 체감하는 낯섦은 장르가 아니라 구성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인물의 배경 이야기를 쌓고 갈등을 심고 해소하는 전통 서사의 길을 걷지 않습니다.
호포항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타납니다. 그 순간부터 영화는 그저 사건이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갑니다. 왜 왔는지, 무엇인지, 설명은 유보됩니다. 156분 동안 관객은 인물들과 함께 그 시간 속에 던져져 있을 뿐입니다.
당연히 호불호가 갈립니다. 최악의 엔딩이라는 혹평과 한국 장르영화의 스케일을 끌어올렸다는 상찬이 공존합니다. 흥행 성적은 분명합니다. 개봉 첫날 33만 명, 개봉 5일 만에 200만 명. 올해 최고 오프닝이자 최단기간 흥행 기록입니다. 다만 이 숫자는 정직하게 읽어야 합니다. 폭발적인 출발은 형식 실험에 대한 승인이 아닙니다. 10년 만의 복귀, 칸 경쟁 진출, 초대형 캐스팅이 만든 사전 기대감의 분출에 가깝습니다.
진짜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기대감이 데려온 관객들이 극장을 나서며 실망 대신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영화는 외계 존재의 실체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관객은 액션과 서스펜스를 따라가며 스스로 서브텍스트를 체감합니다. 이 불친절한 구성이 흥행을 꺼뜨리는 리스크가 아니라, 화제를 연장하는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관람한 날 밤 문득 다시 생각나, 같이 본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지는 영화였습니다.
제목 이야기도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공포와 사투로 가득한 영화의 제목이 왜 하필 희망을 뜻하는 호프인가. 나홍진 감독은 처음부터 제목을 '희망'으로 떠올렸다고 밝혔습니다. 마을을 구할 수 있다는 인물들의 희망. 관점을 뒤집으면, 외계 존재가 품은 희망. 설명하지 않는 영화가 제목 하나에 해석의 열쇠를 걸어둔 셈입니다. 관객들은 극장을 나선 뒤에도 그 열쇠를 돌려보며 저마다의 답을 만들어 갑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설계라는 점입니다. 개봉 직후 열린 장재현 감독과의 GV에서 나홍진 감독은 그 설계도를 직접 공개했습니다.
영화를 비틀거나 어렵게 만들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받아들이는 하나의 결론을 만들 생각 또한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다르게 느끼도록 영화를 설계한다고 말했습니다. 감독이 결론을 정해주는 대신, 관객 각자가 영화를 완성하고 결론을 내려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호프>의 논쟁적인 결말은 미완성이 아닙니다. 극장 밖에서 시작될 토론까지 계산에 넣은 완성입니다. 상영이 끝나는 순간 영화가 끝나지 않습니다. 관객의 수만큼의 결말이 그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개봉 후 쏟아지는 결말 해석 영상과 리뷰, GV 릴레이가 그 증거입니다. 저에게는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호프였습니다. 반복에 지친 극장에도 아직 다른 길이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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