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by남연우

양산을 받쳐 동그랗고 작은 그늘을 만들면서 걷는다.

늘 실내에서 바라보던 바깥은 현실감 없는 아이맥스 스크린 같았다.

투명한 스크린을 접고 오늘은 바깥으로 나가봐야겠다고 작정하고 발을 디딘 순간 농후한 빛의 밀림은 엄청난 열기를 가동시켰다. 우주에 나 홀로 뜬 불덩어릴 자그만 양산으로 버티면서 빨리 숲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늘이 그늘을 거느리는 우람한 삼나무가 도열한 숲길 시원한 음이온을 마신다.


알루미늄 캔에 담아 팔아도 손색없는 산소 가득한 피톤치드 공기 속에는 온통 이 여름을 구가하는 참매미 소리,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들어있다. 평일임에도 휴가철 사람들이 물소리 따라 빼곡히 들어앉아있다. 깊어봐야 종아리 반쯤 잠기는 물에 사람들은 접이용 의자와 테이블을 첨벙 담근 채 휴식을 취한다.

점심 식사를 하는 사람들, 돗자리를 깔고 폰을 보는 사람들, 연세가 지긋하신 어떤 여성분은 물속을 거닐며 바카라을 펼쳐 들고 읽는다. 움직이는 물속 도서관 같다.


저 아래 공영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온 이유도 이 계곡의 물소리를 감상하고 싶어서이다.

장맛비가 그친 지 한참 되었는데 물이 마르지 않은 걸 보면 산이 깊은가 보다.

데크길을 내려가서 시원한 개울물을 만져본다.

수평 지점에선 소를 이루고 계곡의 경사를 따라서 흘러내린다.

물은 바위를 만나서 제 안에 갇혀있던 소리를 낸다.

울퉁불퉁한 바위들은 물의 음성을 연주하는 악기가 된다.


듣는 두 귀를 간지럽히며 자신이 살았던 옛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흐르는 현재에 집중할 뿐 경쾌하고 낙관적이다. 그 소린 시름을 덜어주며 잡념 지우개 역할을 한다.

바깥세상과 차단된 이 공간에선 두고 온 근심 걱정 불안이 저만치 물소리에 휩쓸려 나가고 매 순간 숨 쉬는 존재 그 자체로서 물가에 노니는 물고기처럼 자유롭기만 하다. 가르랑 가르랑 물소리에 두 귀를 씻는다.


평지보다 지대가 높은 계곡 물소린 음성이 하이톤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주인공 마리아가 부르는 도레미송 같기도 하고, 저 높은 알프스 산정에 올라 부르는

"The hills are alive with the sound of music..."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다.

"시" 음계에서 시작한 리듬이 "라솔파미레도" 저음으로 내려오며 흐르다가 또다시 물굽이를 만나면 음계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러운 멜로디가 생겨난다. 해맑은 멜로디에 감동적인 치유의 힘이 들어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위무하는 듯하다.

그렇게 흘러 흘러 저지대로 나아가면 물의 음성은 나직해져 안으로 숨죽인다.

바다를 목전에 둔 강물은 깊은 울림으로 대양과의 합일을 염원한다.

우리도 어깨가 축 처지는 날에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 일상의 리듬이 되살아나 좋지 않을까.


절마당 빼곡히 걸린 연등이 실시간 빛을 조율하며 던진 그림자가 일정한 패턴을 그린다.

동그라미는 그림자요, 다이아몬드는 연등 사이로 투과하는 빛이요, 이들이 연속적인 사슬을 얽어맴으로써 땅바닥은 온통 그림자 공화국이다. 연등 그림자에 얼룩덜룩 얼굴을 물들이는 맨바닥에 앉아서 이 더위에 수행 공부를 하는 보살 한 분을 지나 법당에 오른다. 부처님께 삼배를 하고 일어서는데 간절한 염원을 비는 신도 한 분이 뜨거운 사선을 타고 들어오는 염천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진 중이다.


잠시만 서 있어도 땀이 비 오듯 어질어질한데 꼿꼿이 하늘을 향해 극락세계를 열어 보이는 연꽃들이 태양과 통정하는 모습이 신비롭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이 열기를 즐기도록 만드는지 궁금하다. 고통의 절정에 이르는 통점이 건드려지는 순간 개화하는 DNA를 보면서 고통이야말로 지각을 여는 열쇠가 아닐까. 잘 쓰면 행운, 잘못 쓰면 불행. 연등과 연꽃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절마당에서 더위의 절정에 이르러 당도한 입추 절기는 상극의 조화임을, 이 또한 지나가리니..


절 카페에 들러 더위를 다스리고 가기로 한다.

냉미숫가루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맞은편에 어린 손자를 데리고 온 장년의 부부가 앉아있다. 남편분은 법당에서 간절히 기도를 하던 그분이었다. 멀뚱멀뚱 있는데 그분은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어디에서 왔느냐. 우리는 이 절에 위패를 모셔두었다. 등등.. 사는 지역도 서로 가까웠다. 카페 관리인은 그분 손자에게 동자가 연꽃 위에 앉아있는 기념품을 주면서 내게도 선물이라고 주셨다. 아이고, 구슬땀을 흘리며 한적한 삼복더위 찾아왔더니 선물도 주신다. 감사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렀다.

요즘 출판 트렌드를 익힐 겸 바카라 몇 권을 둘러보고는 나오는데 서점 옆에 새로이 생긴 가게가 눈에 띄었다.

유럽 선물 전문점에는 목각 오르골, 양장 표지가 고급스러운 수첩들, 에코백들이 걸려있었다.

그중 고흐의 그림을 표지로 입힌 수첩들에 눈길이 갔다.

임파스토 기법 푸른 물결이 굽이치듯 꿈틀대는 '붓꽃' 그림에 반짝이는 펄 소재 코팅을 입혀 더 사실적이고 생동적이다. 영국산 수첩을 집어 들었다가 고가여서 망설이던 중 이 그림 다른 상품도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파일 홀더가 있다면서 보여주는데 가격은 더 저렴하면서 액자로 감상하기에 딱 좋은 크기였다.

서늘한 청보라색 반짝거리는 붓꽃들을 내 바카라상 한가운데 세워두었다. 왼편에 핀 딱 한 송이 흰색 아이리스는 꽃무리에서 독보적이지만 어딘가 외로운 고흐를 닮아있다. 삶에의 진한 의지와 색채를 잃어버린 채 별이 되려는 고흐의 모습이.. 이 도시의 복사열에 갇혀 지내는 한여름 내게 청보랏빛 붓꽃들이 푸른 파도처럼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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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촛불

연꽃봉오리의 기도하는 모습..

간절한 염원이 꽃을 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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