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 계절과 계절 사이, 이 바다와 저 바다 사이에 경계선이 금을 긋는다.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하는 그 선은 어지간한 떠밀림에 꿈쩍 않는 고집쟁이다.
내 것은 내 것이어야만 하고 네 것은 네 것이어야만 하는 구분을 짓는 완강함이다.
해안선을 따라서 끝이 없는 바다인 줄 알았는데 이 바다와 저 바다는 많이 달랐다.
수평선은 같지만 바다를 끌어안는 육지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홍련암으로 가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입고 간 반소매가 추워서 손수건으로 목을 둘렀다. 수시로 뒤집히는 우산을 부여잡고 우의를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느긋한 태도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물보라가 이는 파도를 찍을 땐 우산을 포기해야만 했다.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두어 시간 달렸을 뿐인데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왔다.
2005년 화마에 녹아내린 동종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면서 시의적절한 비의 효용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지금은 실내에 진열돼 있지만 야외에서 이 비를 맞았더라면 애달픈 모습 조금 더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암자를 돌아 다래헌으로 가는 길 "저어 말씀 좀 물을게요."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건넸다.
순간 길을 물으면 어쩌나 긴장했다.
뒤돌아보니 짧은 단발머리 수수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입고 계신 옷 어디 거예요?"
그 말을 듣고는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홍련암에서 잠시 마주친 얼굴이었다.
"그래서 아까 빤히 보셨군요. 이거 H... 브랜드예요."
"그 브랜드 비싸서 못 사 입었는데..."
"요즘 세일 많이 해요. 여름 다 가기 전에 예쁘게 입으세요."
그녀는 좀 쑥스러운 듯 먼저 앞서 가는 남편에게로 가볍게 뛰어갔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였다. '저런 질문 길 가는 낯선 이에게 쉽게 못 할 텐데.. 한편으론 그런 질문 무례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내가 편하게 보였나 보다. 누군가는 비싸서 못 사 입었다는 브랜드를 나는 손쉽게 사 입었나?' 하는 생각이... 짠한 마음과 함께 누군가의 시선을 끌어당긴 푸른 블라우스를 내려다보았다.
여름 파도를 닮은 이 옷이 그렇게 예쁜 옷이었나. 비에 젖은 주름을 살며시 매만져 본다.
조선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잠시 머물다 간 곳으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부르게 된 유래가 있으며, 하 씨 집안의 총각과 조 씨 집안의 처녀가 이룰 수 없는 사랑 끝에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하조대에는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절벽 구간 들리는 거라곤 무섭게 할퀴는 파도 소리뿐.
바위가 아니고선 막아서지 못할 괴력이었다.
그 절벽에 새초롬 얹힌 새하얀 등대는 바다에 대항하는 구원의 좌표, 경계를 가늠하는 불빛, 여기서 한 발 삐끗하면 생과 사를 가르는 이정표가 된다. 이편에서는 아찔하고 저편 밤바다에선 간절한 등대 불빛이 목적지가 되어선 좌초되듯 겉보기 황홀한 이끌림에는 그만큼의 무분별한 거리가 존재한다.
그 거리만큼 눈금을 새기는 분별력과 사려 깊은 재고가 거듭되어야 한다.
벼랑에도 길이 있다는데 단층 해안에 발길이 닿고 보면 돌아서는 수밖에 길이 없다.
무엇이 저 바다를 몹시 성나게 만들었던가.
강과 강이 맞부딪는 굉음에 소스라쳐 놀란 발걸음은 뒤로 물러서기 바쁘다.
거대한 쓰나미를 몰고서 오디세이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가 저벅저벅 저 먼 수평선으로부터 걸어올 것만 같다. 저녁비마저 부슬부슬 내리는 해안 절벽길을 따라서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무섭고 소름이 끼쳤다.
부랴부랴 차에 시동을 걸고서도 언덕길을 오르고 파도를 따돌리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하룻밤 지난 고향 바다 백사장에도 성난 파도가 거칠게 때린다.
지난봄 노란 부표가 가까이 떠있고 테트라포드 위에서 갈매기들이 숙박하던 연안 앞바다가 저만치 멀어지고 테트라포드는 바닷물에 잠겨버렸다. 늘 서서 감상하던 작은 곶처럼 형성된 모래톱이 다 깎여나가서 가파른 사구가 만들어졌다.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듯 해진 붉은색 깃발이 꽂힌 연안 침식이 심각하다. 어떻게 올해 봄에 봤던 바다가 여름에 달라질 수 있는지 마치 찬바람이 불면서 갑자기 달라진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연안 침식이 심해진 데는 뜨거워진 바다가 있다고 한다. 해수면 온도가 높을수록 바다 위 대류 활동이 활발해지고, 파도의 높이는 올라간다. 이런 파도가 백사장을 반복해서 때리고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모래를 끌고 가게 된다. 백사장은 주로 겨울엔 깎였다가 파도가 잔잔한 봄이나 가을에는 다시 모래가 쌓이면서 복원된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이러한 균형이 깨지면서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는 모래밭이 사라지면 태풍이 몰고 오는 바닷물이 내륙으로 더 깊숙이 밀려와서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고 한다.
8월의 바다
같은 장소 올해 6월의 바다
먼바다 비켜가는 태풍의 위력 만으로도 이토록 들썩거리는 바다를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향 집 인근 해안마을 깊숙이 들어가 보았다. 그곳을 전에도 여러 번 가보고 싶었다. 고향 마을 바다와 건넌 마을 바다를 가로지르는 경계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었다. 바다로 성큼 뻗어나간 산과 뾰족한 갯바위 사이에는 철바카라선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되는 경계선이 가로놓인 이편과 저편.
자연마저 가로막는 인간들의 경계, 그 경계 앞에 엘니뇨 현상 파고도 다소곳이 숨을 죽인다.
멋 모르고 바다를 좋아했나 보다.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사람이 되고프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벼이삭이 피는 들판을 휘- 둘러보고는 상경하는 길에 무덥던 여름이 어느새 그쳤다.
각얼음처럼 얼려둔 여러 생각들, 천둥 번개 내리치는 몇 밤이 지나고 나면 무성하던 무더위도 물러날 것이다.
여름 바다가 달라졌다, 빙하가 녹은 것 같은 서늘하고 무서운 빛깔.. 지켜보는 갈매기들도 알까?
상경길 고속도로 IC 진입 전 아주 멋드러진 쉼터를 발견하였어요.
소백산 아래 우람한 고목 수목원이 통유리창 너머 바라보이는 카페 정원에는 유난히 색이 진한 보라색 도라지 꽃들이 바위 아래로, 물이 담긴 돌확에도, 길가에도 버젓이 고개 내민 도라지꽃 카페는 에그타르트 맛집이더군요. 차 막히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답니다. 소백산 넘어가기 전 주막 같은..앞으론 쭉 단골 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