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절하의 방어기제
현실 속의 존재보다 지나치게 좋은 존재로 느끼는 방어기제로는 이상화가 있습니다. 이상화(idealization)은 마치 콩깍지가 씌워지는 것과 같다고 설명드렸지요. 그런데 이상화와 반대로 작용하는 방어기제도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오해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때로는 타인을 현실 속의 존재보다 지나치게 못난 존재로 느낄 수도 있는데, 이것이 평가절하의 방어기제입니다.
평가절하(devaluation)은 상대를 실제보다 훨씬 더 부족하고 나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만을 혹은 단점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평가절하의 덫에 빠진 사람에게는 상대방의 단점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정말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야' 혹은 '이 사람은 어떻게 나쁜 점들만 가득 가지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장점 하나 없이 단점만이 눈에 들어오니 더욱 상대를 미워하고 원망합니다. 그만큼 상대와의 관계에서 느끼게 되는 실망과 분노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이상한 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평가절하도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마음의 방어기제입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가치 있게 여기게 되면 내 마음이 더 아픕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준 상처는, 세상에서 가장 필요 없는 사람이 준 상처보다 아픕니다. 설령 100%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길수록, 보다 가치 있게 여길수록 관계에서 아픔은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평가절하의 방어기제를 나도 모르게 쓰는 것입니다.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최소화한다는 목적만을 두고 봤을 때는, 상대방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이 어느 정도는 효율적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가절하의 방어기제에는 뚜렷한 한계점도 있습니다. 평가절하의 끝에는 슬롯적 고립과 정서적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고 해서 매번 상대방의 가치를 깎아내리다 보면, 결국 내 곁에는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됩니다. 관계에서 겪어야만 했던 아픔들은 최소화할 수는 있었겠지만, 평가절하를 반복하다 보면 관계 자체가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더라도, '상대방은 내게 필요 없는 존재야'라고 내심 여기게 되면 언젠가는 상대방도 알게 됩니다. 은연중에 행동에서 평가절하하는 측면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도 '저 사람에게는 내가 쓸모없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거리를 두게 되고, 평가절하를 사용했던 사람도 '저 사람은 내게 쓸모없어'라는 생각을 가지고서 거리를 둡니다. 결국 양쪽의 사람이 거리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가절하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사람의 인간관계는 불안정할 때가 많습니다. 괜찮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마다, 상대방의 장점은 미처 보지 못하고 단점만을 보고서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평가절하의 방어기제는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극약처방처럼 상대와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최고로 소중한 사람으로 여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은 설령 내게 상처를 주는 일이 생겼더라도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을 견뎌내 보며 기회를 한번 주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기에 원망스럽고 머리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있습니다. 그것도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을 견뎌내고 평가절하하지 않으면서 '저 사람에게는 괜찮은 점도 있고 모난 부분도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의 관계는 서로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상대뿐만 아니라 내게도 좋은 일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