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깨우침이 있었다. 우리 아파트 분리수거 요일은 화요일이지만, 월요일 늦은 밤부터 분리수거를 할 수 있다. 한주간 쌓인 닥터페퍼 수십 캔과 배달음식 플라스틱 용기를 분류해 품에 가득 안고 현관을 나서던 순간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진짜 사랑을 구분하는 방법에 대하여.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떻고 저떻고 너를 위해 나는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 진짜 사랑은 뭘 더 하려는 것보다 상대가 그어둔 선을 넘지 않게끔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러 번 언급해도 간과한다. 눈치보다 염치를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공식 분리수거 전야 닥터페퍼 캔 수십개와 배달음식 플라스틱 용기를 잔뜩 지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문득. 당신이. 당신이 나를 위해. 당신이 무엇을. 이야기와 욕망의 남발. 당신이 나와 함께 하고 싶은 무엇들. 이것은 내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주어는 당신. 당신 스스로가 당신만의 욕망을 토대로 당신만의 선택 당신만의 미래 당신만의 가능성 당신만의 감정을 주체로 한. 나는 피사체 소비재. 이 당신들은 목을 조르고 길을 막고 시야를 흐린다. 지긋지긋해.
존재가 흐려지는게 맞다. 당신들이 그 사랑해 마지않는 상대를 진정으로 위하고 아끼고 해방시키고 싶다면 상대에게 무게를 지울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무게를 지워야 한다. 너무 무겁다. 상대와 협의되지 않은 '우리'라는 것도 문제다. 애초에 '우리'자체가 허상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하는 '우리'를 원한적이 없으므로. 경계가 있기에 관계가 숨쉴 수 있다. 함부로 포괄해서는 안된다. 그 욕심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