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나를 연구하기로 했다 253

다시 보게 된다면



버티는 날들 사이로, 평안이가 왔다


눈이 아파 읽던 글을 덮는다. 잠시 쉬면 나아질까 싶어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간다. 잠이 오지 않는 날에도 공원을 걷는다. 걷다가 멈추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햇볕이 드는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요즘은 건강하기만 해도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잘 보고,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 몸을 일으키는 일이 이렇게 큰일인 줄 몰랐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온 날들이 뒤늦게 귀해진다. 그때는 그날들이 평범해서 내 것인 줄 알았다.


“또 아프네.”


또야가 먼저 와 앉는다. 언제 괜찮아질지, 내일도 이러면 어쩔지 묻는다. 대답을 찾으려 할수록 마음이 바빠진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다른 목소리가 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신명기 33장 29절이다.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기도 전에, 모세는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건강한 사람, 가진 것이 많은 사람, 남들이 알아주는 사람이 먼저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부른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모세는 지금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이끌고 나왔다. 홍해를 건넜고,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냈다. 백성은 배가 고파 원망했고, 목이 말라 다투었으며, 두려워질 때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모세는 그들의 원망을 들었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위해 간구했다. 오래 이끌어 온 만큼 오래 지쳤을 것이다.


그 자신도 온전하지 않았다.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한 일로, 그토록 바라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신명기 32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산에 올라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고 하신다. 볼 수는 있지만 건널 수는 없다. 그의 여정은 거기까지다.


오늘의 축복은 그 말씀 뒤에 놓여 있다.


자신은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들어갈 사람들을 향해, 모세는 복을 빈다. 내 수고를 알아달라는 말도, 나를 잊지 말라는 당부도 아닌 축복을 남긴다. 자기 삶의 끝에서 다른 사람의 앞날을 바라본다.


나는 그 대목에서 오래 머문다.


내가 애쓴 일의 마지막 장면에 내가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준비한 자리를 다른 사람이 이어받고, 내가 바라던 열매를 누군가가 거둘 수도 있다. 그때도 나는 그 사람의 앞날을 축복할 수 있을까.


모세는 지파마다 다른 말을 건넨다.


갓에게는 사자처럼 힘 있는 모습을 말하면서, 그 힘이 여호와의 공의와 법도를 행하는 데 쓰였음을 짚는다. 힘이 있다는 것만으로 복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구나. 그 힘으로 무엇을 지켰는지, 누구를 위해 움직였는지가 남는구나.


단은 뛰어나오는 사자 새끼에 비유된다. 앞으로 나아갈 기세가 느껴진다. 납달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가득하고, 서쪽과 남쪽을 차지하리라는 말씀이 주어진다. 아셀에게는 풍요와 형제들의 사랑이 함께 놓인다. 발을 기름에 담근다는 표현에서는 넉넉한 땅이 떠오르고, 철과 놋으로 된 문빗장에서는 삶을 지켜 주는 든든함이 느껴진다.


누군가에게는 힘이, 누군가에게는 땅이, 누군가에게는 풍요와 사랑이 주어진다. 복의 모양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축복의 끝에서 모세는 그 모든 것을 바쳐 주는 분을 가리킨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내 아래에 팔이 있다는 말.


나는 자꾸 내 발로 얼마나 오래 설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얼마나 더 일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남에게 기대지 않고 해낼 수 있는지를 살폈다. 그런데 말씀은 내 힘이 닿지 않는 아래쪽을 보게 한다. 내가 주저앉을까 두려워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팔이 있다고 한다.


평안이가 조용히 곁에 앉는다.


“오늘은 잠깐 기대도 돼.”


몸이 갑자기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눈은 여전히 불편하고, 내일의 상태도 알 수 없다. 다만 이 몸을 데리고 오늘을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 마음까지 숨긴 채 행복한 척할 필요는 없겠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말은 내 고통을 지우라는 명령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일러 주는 말처럼 들린다.


축복을 마친 모세는 다음 장에서 느보산에 오른다. 약속의 땅을 바라본 뒤 생을 마친다. 백성은 그를 위해 울고, 여호수아가 그 뒤를 잇는다. 모세의 시간은 끝나지만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하시는 시간은 이어진다.


모든 일을 끝내 놓아야만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한 사람의 몫에는 끝이 있구나.


공원에 앉아 남은 날들을 헤아려 본다. 앞으로 삼십 년을 더 산다고 가정하면 크리스마스도 서른 번쯤이다. 그 가운데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는 몇 번이나 만날까. 서너 번일까. 더 많을까. 알 수 없다. 삼십 년이라는 시간조차 내게 약속된 것은 아니다.


끝없이 남은 줄 알았던 날들이 손으로 셀 수 있는 계절이 된다.


그렇다고 하루하루를 다급하게 채우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묻고 싶어진다. 그렇게까지 바쁘게 해서 무엇을 더 얻으려 했을까. 더 큰 집에서 더 편히 쉬려고, 정작 오늘은 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좋은 옷이 좋아서 샀던 날도 있지만, 그 옷을 입은 나를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바랐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 살려고 좋은 음식을 고르면서, 길어진 시간에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나눌지는 얼마나 생각했을까.


햇빛이 무릎 위로 내려온다.


이 볕을 쬐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도 값을 치르지 않는다. 숲을 바라보다가 집에 돌아가 따뜻한 밥 한 끼를 먹는 일. 오늘의 나는 그 정도로도 조금 누그러진다.


아프지 않았다면 이 시간을 누렸을까. 잠깐 비어 있는 틈에도 일을 찾아 넣고,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을지 모른다. 내가 연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동안,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오늘 오빠가 한국에 왔다.


오빠는 이십 년째 인도네시아와 슬로바키아, 베트남을 오가며 일한다. 예순인데 늦둥이 막내가 아직 대학교 이 학년이다. 더 일해야 한다는 말 뒤에 놓인 시간을 나는 조금 짐작한다. 자신만 생각해서는 내려놓기 어려운 짐이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백내장 진단을 받았다. 내일 검사하고 금요일에 수술한다. 며칠 경과를 살핀 뒤 다음 주 월요일이면 다시 출국한다. 꼬박 일주일의 일정이다. 오래 머무를 틈도 없이 눈을 치료하고 일터로 돌아간다.


다시 잘 볼 수 있게 되는 일.


그것은 일을 더 오래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오빠가 좋아하는 얼굴을 조금 더 또렷이 보고, 익숙한 풍경을 조금 더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오늘 지친 오빠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 내 몸도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또야가 얼른 묻는다.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갔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대답 대신 잠깐 눈을 감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에게 갈 수 있는 힘이 늘 같은 크기는 아니다. 이제야 그 사실을 배운다.


평안이는 오늘 못 간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내일 몸이 허락하면 가 보자고, 오래 앉아 있지 못하더라도 얼굴을 보고 오자고 한다. 거창한 위로를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겠다. 오빠의 말을 듣고, 수술을 기다리는 마음 옆에 잠시 앉아 있으면 되겠다.


나도 눈이 아픈 뒤에야 오빠의 눈을 더 생각한다. 내 연약함이 다른 사람의 연약함 쪽으로 고개를 돌려준다.


모세가 마지막에 남긴 축복을 다시 읽는다. 그는 자기에게 남은 날을 늘려 달라는 말 대신, 남겨질 사람들을 하나님의 팔에 맡겼다. 내게도 그런 마음이 조금은 생겼으면 좋겠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 앞에서 내 사정만 길게 늘어놓지는 않았는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할 일을 자꾸 뒤로 미루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더 오래 볼 수 있다면, 무엇을 볼 것인가.


더 오래 살 수 있다면, 누구의 곁에 있을 것인가.


내일은 오빠 얼굴을 보고 싶다.


조금 덜 아픈 눈으로, 조금 더 알아듣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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