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크고 작은 포기를 연속하는 나날이야. 오늘은 어떤 포기를 했냐면 말이야. 옷장 구석에서 오랜만에 발견한 하얀 바지를 포기했어. 지난주에 산 베이지색 니트랑 입으면 끝내주게 멋있을 것 같았거든. 근데 다시 넣어둬야만 했어. 지난번에는 요가를 포기했어. 아무래도 다리를 찢고 벌리는 게 신경 쓰였거든. 사소해도 포기는 포기야. 맞아. 생리한다는 건, 참 피곤해. 생리에 큰 불만이 있는 건 아니야. 아빠가 첫 생리에 맞춰준 금반지 덕분이야. 아빠가 무슨 의미로 사준 건지 말해주지 않은 것도 좋아. 덕분에 기분에 따라 의미를 알아서 붙이고 있어. 생리통이 없는 날에는 아빠가 날 여성으로 존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가, 생리통이 심한 날에는 위로의 의미였나 싶기도 해. 제발 잃어버리지만 말라는 아빠의 간곡한 부탁을 18년째 잘 지키고 있어. 이제 왼손 검지에 아무것도 없다는 상상만 해도 허전해. 아빠도 잘 알겠지만, 나 진짜 허술하잖아. 허술한 애가 생리하면 이불킥할 일이 많더라. 남자친구네 조카들을 처음 보러 간 날이었어. 태어난 지, 겨우 두 달 된 쌍둥이였어. 하필, 그 날에 생리통도 제일 심하고 양도 엄청난 거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누군가 허리에 로우킥을 날린 것처럼 아팠어. 급한 대로, 타이레놀을 먹고 대형 생리대를 깔고 꾸역꾸역 나섰지. 쌍둥이네 부부가 밥을 먹을 때까지 우리가 쌍둥이를 한 명씩 맡아서 돌보고 있었어. 근데 소파에서 남자친구가 바닥에 앉은 나를 급하게 부르는 거야. 겨우 잠든 아기가 깰까 봐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거든. 근데 남자친구가 가까이 와서 귓속말로 말하더라.
“너 생리 샌 거 같은데. 바닥이 난리 났어.”
남자친구가 잘못 봤기를 간절히 바라며 바닥을 보는데 정말 피가 덕지덕지 묻은 거야. 더 최악은 남자친구의 귓속말이 꽤 컸는지 밥 먹던 남자친구 형이 와서 수건을 살포시 주더라고. 집에 오는 내내 생리하는 주제에 외출한 나 자신을 탓했어. 생리하면 외출은 포기했어야지. 인터넷에 본 한 여자가 생각이 났어. 지하철에 피가 묻은 의자 사진이 하나 올라왔거든. 생리 중인 여자가 앉았다가 일어났는데 의자에 피가 묻었나 봐. 피 묻은 의자를 보고 여자가 ‘어머나’ 하더니, 냅다 지하철에서 내려버렸대. 그걸 다 지켜보고 있던 맞은 편 남자가 의자 사진을 찍어 올리면서 닦지도 않고 도망갔다고 양심 없는 년이라 하더라고. 다른 네티즌도 똑같이 욕했어. 나는 내 생리 단속만 철두철미하게 관리하면 양심 없는 년은 되지 않겠다 싶었어. 화장실에 더 자주 가고 더 자주 생리대 갈면 저런 일은 없겠거니 했지. 근데 이런 일이 생긴 거야. 남자친구 형의 집에서 피 묻은 바닥을 닦으면서 여기가 지하철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 여겼어. 나는 수건도 있고, 사진 찍어서 퍼트릴 승객도 없으니깐. 생리를 안해 봤다면 충분히 욕할 수 있다고 생각해. 생리가 새지 않았을까 보이는 거울마다 확인하는 피로감을 모른다면 그럴 수 있어. 그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로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의 댓글을 읽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그녀도 나처럼 외출을 포기했어야 했다고 자신을 탓했을까. 아빠. 나를 더 서글프게 하는 건, 따로 있어. 대학생 때 친했던 태수라는 애가 있었어. 아빠에게 여러 번 고백하게 되지만, 그때도 남자친구가 있었거든. 내가 생리통에 허리도 못 펴고 있으니깐 태수가 웃으며 했던 말이 기억나.
“오. 오늘은 남자친구랑 섹스해도 자동으로 피임되는 날이네.”
곱씹을수록 화나지. 뺨따귀를 날려줬어야 했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튀어나오려는 분노를 틀어막은 건, 다름 아닌 생리였어. 왜 다들 조금만 신경질적이어도 생리해서 예민하다고 하잖아. 내가 지금 화를 내면 원인을 나한테서 찾을 것 같은 거야. 내 생리나 호르몬을 탓하지 말고 네 폭언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라고 나중에 꼭 말해야지 싶어서 꾹 눌렀어. 아빠. 화내는 것도 타이밍이 중요하더라. 멀쩡하게 밥 먹고 있는데 갑자기 지난 이야기를 하는 건 쪼잔해 보일 수 있잖아. 결국엔 생리가 화도 포기하게 해. 나는 생리 중에 드는 기분을 못 믿어. 기분이 좋으면 호르몬 때문이라는 생각에 누르게 돼. 우울하면 호르몬에 절대 속지 않겠다는 듯이 혼자 춤추거든.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차리는 것도 엄청 힘들어. 생리하고 있는 친구일수록 기분을 파악하기가 더 힘들어. 알수록 더 복잡한 법이잖아. 내 말이 맞지? 생리는 참 피곤한 일이지? 생긴 대로 살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
아빠.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닌 건 알아. 그렇지만, 아빠가 무언의 금반지를 줬을 때만큼 생리해서 참 좋다고 느낀 적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나 봐. 내가 생리대 들고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가면, 아빠도 봤는데 모른 척하기 민망해서 일부러 더 놀린 것도 알아. 괜찮아. 나도 당하고만 있기 싫어서 아빠 바지를 악착같이 끌어 내린 것도 있으니깐. 요즘은 그런 에너지조차도 피곤해. 아빠만큼은 생리에 대해 아무 말 말아줘. 아빠만큼은 내가 포기한 걸 알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