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와 준이

by지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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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와는 일방적이고 얕은 연이 있다. 나는 준이의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반대로 준이는 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딱 한 명의 연이 겹친다. 특수교사이자 내 남자친구인 규다. 전해 들어온 준이는 자주 까불고 자주 대들며 자주 혼난다. 준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규는 한숨부터 내뱉는다. 사제 모두 반골이면 각자 하교와 퇴근을 포기하기도 한다. 규가 한껏 지친 얼굴로 늦은 저녁에 퇴근한 날이었다. 짙은 피로가 그의 이목구비를 덮어버렸다. 소파에 풀썩 쓰러져 갈갈한 목소리로 그가 운을 뗐다.

“준이랑 2시간이 넘도록 인사로 실랑이했어.”


그날, 하교 시간이 되고 준이는 빛의 속도로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규에게 고개만 까딱하고 교실을 나서려다 붙잡혔다. 준이가 선생 복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규는 짧은 잔소리도 길게 하는 선생이었다. 게다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에게 준이의 까딱 인사가 몹시 거슬렸다. 불만 가득하고 심술궂은 얼굴로 준이도 툴툴거렸다.


“처음엔 좋게 말했지. 다시 인사하라고. 근데 보란 듯이 더 대충해.”


준이의 까딱 인사는 규의 간단명료한 ‘다시’ 호령에 계속되었다. 퇴근과 하교 시간을 훌쩍 넘긴 후에야 준이가 한풀 꺾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끝에 일단락되었다. 지친 규를 매일 보는 사람으로서 팔이 안으로 바짝 굽은 나는 준이를 실제로 만난다면 머리에 꿀밤 한번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준이는 다시 까불거릴 텐데 그가 가끔은 느슨하게 일했으면 했다. 모른 척하고 눈을 감으면 일이 쉬워지긴 하니깐. 하지만 규는 그러지 못했는데 그걸 나는 대단한 사명감으로 치하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내가 매사 느슨하게 일하는지라 좀 유별나고 유난이다 싶기도 했다. 그는 사명감이 아니라는 말을 이렇게 둘러댔다.


“준이가 남의 집 귀한 자식이 되는 순간을 봐버린 이상, 헐렁해지는 건 어려워.”


학기 초, 학부모 면담에서 준이 엄마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규는 준이 엄마가 꼭 쥔 휴지가 너덜너덜해지면 새로 휴지를 뽑아 건넸다. 뇌전증 아들의 부모 심정을 다 알 수는 없어도 휴지 정도 건네는 건, 그 깊이를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규는 특수 교과 과정을 안내하러 면담을 요청했을 뿐인데 준이 엄마는 선생인 규 앞에서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준이 엄마에게 학교 호출은 좋지 않은 무언가였다. 준이가 중학생이던 작년, 학교로부터 성추행 징계위원회를 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규도 생활기록부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계단을 오르던 원어민 강사의 엉덩이를 준이가 만졌으며 특별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앙상한 기록이었다. 원어민을 부르기 위해 가볍게 툭 쳤다는 준이의 변호와 분명히 가랑이 사이로 속이 쑥 들어왔다는 원어민의 호소와 목격자가 없다는 기록은 준이 엄마를 통해 들어야 했다. 준이의 담임마저 원어민 강사의 말에 힘을 실어주며 준이는 당연히 정학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규에게 사건을 전해 들었던 나도 그 목소리의 한 가운데에 섰다.


“당연한 거 아냐. 툭 쳤든 가랑이로 훅 들어왔든 원어민 선생이 수치심을 느꼈다는 거잖아. 그러면 학생이라도 실수라도 벌은 받아야지.”

“남 일이라서 네가 쉽게 말하는 거야.”


예상과는 다른 규의 뽀족한 태도에 적잖이 충격이었다. 떡잎부터 권선징악의 서사를 읽고 자라왔기에 피해자 중심으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건, 나에겐 당연한 이치이고 순리였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고, 그 벌이 피해 규모와 비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다들 솜방망이 판결에 해외 사례와 비교하며 대한민국은 멀었다고 혀를 끌끌 차고 내 일 같이 화내지 않던가. 규는 준이의 편에 서서 이치와 순리를 거슬렀다. 나는 남 일이라 쉽게 말한 게 아니라, 준이보다 원어민 선생에게 더 이입했다. 계단을 오르면 항상 뒤를 살펴야 하는 불안하고 괜히 피곤해지는 마음을 잘 아니깐.


“의도야 어찌 되었든 원어민 선생은 계단 오를 때마다 준이의 손이 떠오르겠지. 끔찍하잖아. 이 세상에 계단이 얼마나 많고 올라갈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의도를 왜 퉁 치고 넘어가. 의도가 얼마나 중요한데. 실수에는 악의가 없어.”


규도 어쩔 수 없이 팔이 안으로 굽는구나, 싶었다. 준이와 그렇게 투덕거려도 미운 정도 정이었다. 준이에겐 어떤 잘못도 없다는 뜻으로 들려 불쾌해지기도 했다. 그는 잘못 없다고 주장하려던 게 아니라며 처벌이 내려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그는 이어 짚었다.


“그 일에서 가장 안타까운 건, 그때의 준이 담임이 일을 쉽게 처리했다는 거야. 나쁜 놈 하나 만들어서 처벌 내리면 처리할 서류상 머리 복잡할 일이 없었겠지.”

복잡하게 뒤얽힌 일은 정리하기가 불편하다. 선과 악이 뚜렷하게 구분될수록 조치와 처벌이 다소 편리하다는 걸 그는 기민하게 감지했다. 나는 원어민 선생의 수치심 외에는 딱히 덧붙일 말이 더 생각나지 않았다. 준이에 대해서, 그 일에 대해서 규보다는 얄팍하게 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권선징악의 서사는 다른 맥락에서 동화 이야기다. 동화처럼 나쁘기만 한 놈이 없다. 일상에선 나쁜 놈의 경계가 희미하다. 사람이라면 나쁘고 구질구질하고 안쓰럽고 착하고 멋지고 다정하고 섹시한 구석이 한데 섞이기 마련이다.


규는 여전히 학교를 어렵게 다닌다. 이젠 잔소리하기 전 짧은 숨소리만 내어도 준이는 기겁한다. 준이 엄마가 흘린 눈물의 총체인 준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규의 잔소리 실력도 학기 초보다 늘었다. 또 얼마나 퇴근과 하교가 늦어지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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