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버지니아 울프다

by신지승

1

온천천에는 징검다리가 있다.

넓적한 콘크리트 블록을 물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아둔 것이다. 물이 얕아서 잠기는 법이 없고 이끼도 잘 안 낀다. 나는 애써 징검다리를 건너고 다시 돌아 다시 건넌다.

바닥이 다 보인다. 잉어가 있고 어떤 날은 왜가리가 한 마리 서 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지나가고 돌아올 때도 왜가리를 찾는다.

양쪽은 산바카라로가 있고 산바카라로 위로 지하철이 지나간다. 고가로 지나가며 3분에 한 번씩 자신의 존재를 다른 물질의 소리로 드러낸다 .

2

오벨뒤주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신지님."

병원을 들르고 시장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오늘은 어떠세요."

"이리저리 묻고 아버지의 기억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날 작가의 전시회를 보고 난 이후 오벨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아버지의 자서전을 글과 물건, 흔적을 통해 만들어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오리 네 마리가 줄지어 하류로 내려갔다.

"저, 신지님."

"예."

"여쭤볼 게 있습니다."

그가 걸음을 조금 늦췄다.

"남을," 그가 말했다. "남을 온라인카지노 글에……."

나는 기다렸다. 기다린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아차렸다.

왜 자신을 인질로 삼는 거냐고 묻는 거였다. 그가 그 말에 닿기까지 서너 초가 걸렸고 나는 그 서너 초 동안 이미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질로 삼는 거 아니냐는 거죠?"

"인질요? 그 표현은 좀…… 왜 등장시키는지요. 물론 적절히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것이기도 하지만요."

지하철이 지나갔다. 소리가 지나갈 때까지 우리는 둘 다 말을 안 했다. 나는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저는 관계가 없으면 글 하나도 쓸 수 없더라고요. 전 관계로 창작하는 사람이에요."

"아닙니다. 죄송한 건 아니고요, 궁금하기도 하고……"

"혼자서는 한 줄도 못 씁니다. 방에 앉아서 뭘 지어내는 게 안 돼요. 사람이 앞에 있어야 글이 나오고 상상이 돼요. 그러니까 오벨 씨가 지금 옆에서 걸어서 내가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오벨 씨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가 너무 숨 쉬기가 힘듭니다."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저에게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을 알아가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저를 도와주고 살려주시는 거예요. 글을 쓰고 상상하다보면 뭘 한것 같고 숨도 쉬어지는 것 같고요."

그는 나를 보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신지님 글의 인질이 되어 저도 고맙기도 합니다. 살아온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어서요."

우리는 한참 서 있다가 다시 걸었다.

3

용문산에 살 때는 개울을 건너야 집에 갔다.

무허가 컨테이너 집이었다. 슬레이트로 외벽을 대서 멀리서 보면 2층 저택 같았다. 마당 앞에 돌을 쌓아서 작은 원형극장을 만들어놨다. 돌극장이라고 불렀다. 스무 명쯤 앉을 수 있었다.

비가 사흘 오면 개울물이 불어서 징검돌 두 개가 잠겼다. 그러면 큰 돌을 굴려다 가운데에 놓아야 했다. 손님이 오면 내가 먼저 건너가서 돌을 놨다.

개가 네 마리 있었다. 사람이 오면 다 몰려나왔다. 사람 구경을 못 해서 그랬다.

신문사에서 왔었다. 기자가 장맛비 오는 날 왔는데 그날도 물이 불어서 내가 돌을 굴렸다.

4

"점심을 도서관에서 먹었어요."

"도서관에서요."

"식당이 있어요. 싸요. 벽에 디지털 액자가 하나 걸려 있는데 거기서 그림이 돌아가요. 드가 나오고 모네 나오고 고흐 나오고. 십오 초에 한 장씩 바뀌어요."

"보십니까."

"나만 봐요. 밥 먹는 사람들은 아무도 안 봐요."

우리는 다리 밑을 지났다. 그늘이라 갑자기 서늘했다.

"밀레라고 알죠."

"압니다. 교과서에."

"나는 밀레를 육 년 봤어요."

"육 년이요."

"이발소에서. 우리 동네 이발소 거울 위에 만종이 붙어 있었어요. 유리 액자에 넣어서. 한 달에 한 번씩 머리 깎으러 갔으니까 초등학교 육 년을 그거 봤죠. 나중엔 이발소에 들어가면 그 그림부터 찾았어요. 그게 거기 있어야 앉아지더라고요."

"그때 누가 그린 건지는 알았어요?"

"몰랐죠. 그냥 그림이었어요."

"……"

"노을이 있고, 남자하고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발치에 바구니가 하나 있고, 갈퀴가 꽂혀 있고, 뒤에 수레가 있어요. 멀리 교회가 하나 있고. 종소리가 나서 일손을 놓고 기도하는 거예요."

"좋은 그림 아닙니까."

"좋죠."

나는 잠깐 걸었다.

"얼마 전에 테무에서 모네를 하나 샀어요. 오천 원이요. 언덕 위에 여자가 양산 쓰고 서 있고 밑에서 아들이 올려다보는 그림. 그걸 문 위에 걸었어요. 애들한테는 그게 딱 그 거리일 거예요. 내가 이발소에서 만종 보던 거리."

"오천 원이요."

"오천 원이요."

"싸네요."

"싸죠."

"그런데 나중에 밀레에 대해서 알게 됐어요."

"뭘요."

"가난한 화가인 줄 알았거든요. 농사꾼 그리는 사람이니까 자기도 농사꾼 옆에서 사는 줄 알았어요. 나는 그게 좋아서 그 사람을 좋아했던 거예요."

"아니었습니까."

"애가 아홉이었고, 중년 넘어서는 성공했어요. 훈장도 받고. 전쟁 나니까 국경 넘어서 피난 다니고. 그러니까 그 사람은 농부하고 같이 밭을 간 게 아니라 농부를 보고 그린 거예요. 작업실에서."

"보고 그리는 게 나쁩니까."

"나쁜 건 아닌데."

벤치가 비어 있었다. 우리는 앉았다. 앉으니까 물이 눈높이 아래로 내려갔다.

"만종에 나오는 그 부부요. 이름이 없어요."

"……"

"그림 안에 두 사람이 있는데 이름이 없어요. 어느 동네 사람인지도 몰라요. 그냥 농부들이에요. 백 년 넘게 전 세계 이발소에 걸려 있는데 당사자들의 이름을 우리는 몰라요."

오벨뒤주가 물을 봤다.

"달리라고, 시계 녹아내리는 그림 그린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했어요. 저 바구니가 사실은 관이라고. 감자 담는 바구니가 아니라 죽은 아기 관이라고. 저 부부는 지금 애를 묻고 기도하는 거라고."

"……"

"근데 엑스레이를 찍어봤더니 바구니 자리에 뭐가 있었대요. 상자 같은 게. 밑그림에."

"진짜였습니까."

"모르죠. 지금도 싸워요."

지하철이 지나갔다. 나는 소리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만약에 그게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저 그림은 애를 묻는 그림인데, 그걸 지우고 저녁 기도로 바꾼 거예요. 제일 참혹한 걸 제일 경건한 걸로 덮은 거죠.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육 년 동안 이발소에서 보고 느꼈던 건 뭐였나?"

"……"

"밀레는 농부를 그렸어요. 그런데 농부한테 가지는 않았어요. 땅의 무게는 그렸는데 그 무게를 지고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부르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그 부부는 끝까지 농부들이에요. 관계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시선 안에 있는 거예요."

6

"영화 처음 할 때 나도 그림을 하나 찍으려고 했어요."

"그림을요."

"몽유도원도라고. 안견이 그린 거. 안평대군이 꿈을 꿨는데 복숭아밭이 나오는 꿈이었대요. 그 꿈 얘기를 듣고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렸어요. 나는 그걸 영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어떻게요."

"러시아제 35미리 카메라를 샀어요. 그리고 여고괴담 찍은 후 남은 35미리 자투리 필름을 얻어다가, 복숭아밭에 조명 걸고 스태프 부르고. 다 밤 장면이에요. 꿈이니까."

"찍으셨습니까."

"일박 이일 촬영했어요. 밤을 꼬박 새웠어요."

"……"

"콘티를 반도 못 찍었어요. 내가 못 찍은 거예요. 새벽이 오는데 시간은 가고 사람들은 지쳐 있고. 결국 아침까지 다 찍지를 못했어요. 돈이 없으니 촬영을 이어갈 수 없었어요."

"아까우셨겠습니다."

"펑펑 울었어요."

나는 그 말을 하고 좀 웃었다. 웃을 얘기가 아닌데 웃었다.

"그리고 그날 정했어요. 돈 들여서 하는 영화는 다시 안 한다고. 돈에 매달리는 영화는 안 한다고."

오벨뒤주가 손을 모았다가 폈다.

"저, 여쭤봐도 됩니까."

"물어보세요."

"능력이 안 되셔서 그만두신 겁니까, 안 하기로 하신 겁니까."

나는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자전거가 지나갔다. 그가 뒤로 빠졌다가 다시 옆으로 왔다.

"둘 다죠."

"예."

"둘 다예요."

"예."

그는 더 묻지 않았다.

7

"고흐는 아를에 노란 집을 얻었어요. 화가들끼리 같이 살자고. 파리를 떠나서 남쪽에 가서, 서로 그림 그려주고 밥해 먹고."

"몇 명이나 모였습니까."

"한 명이요. 고갱 하나."

"……"

"두 달 만에 깨졌어요."

"찰스턴 농장이라고 또 있어요. 영국. 버지니아 울프 언니가 살던 데예요. 작가하고 화가하고 경제학자하고 다 모여서 시골집 하나에서 지냈어요. 벽에도 그리고 문짝에도 그리고 식탁에도 그리고. 캔버스가 따로 없어요. 사는 데가 전부 캔버스인 거예요."

"거기는 오래갔습니까."

"오래갔죠. 지금 관광지예요. 표 끊고 들어가요."

나는 말을 계속했다. 러시아에 아브람체보가 있고 미국에 블랙마운틴 칼리지가 있고 일본에 시라카바파가 있다고. 중앙을 등지고, 일상 속에서 만들고, 혼자 천재가 아니라 여럿이 부딪혀서 창작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고. 버지니아 울프도 그 그룹 속에 있었다고.

"선생님은 그, 그거 다 가보셨습니까."

"못 가봤죠. 유튜브로 봤지요."

8

몇 해 전에 몇몇 감독이 찾아왔다. 미국 UCLA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 한국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 유명한 방송 PD. 다들 나를 찍고 싶다고 했다. 다큐멘터리로.

나는 그들과 얘기를 하고 싶었다. 이 작업이 무슨 의미인지, 그 사람들이라면 알까 싶어서. 그런데 그들은 나를 찍으러 온 사람이었고 나는 찍히는 쪽이었다.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들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그 얘기를 오벨뒤주한테 해줬더니 그가 물었다.

"왜 안 하셨습니까."

"내가 안 한다고 했어요."

"왜요."

"퍼포먼스로 보니까요. 다들 그렇게 봐요. 산속에 들어가서 트럭 몰고 다니면서 마을영화 찍는 사람. 그게 하나의 행위예술처럼 보이는 거죠. 어차피 그 철학이나 깊은 내용은 안 봐요."

나는 말을 골랐다.

"내 얘기를 할 사람이 없었어요. 산에 십몇 년을 살았는데 내 영화 얘기를 할 사람이 없었어요. 그냥 산에서 나무하고 개 키우고, 인터넷도 안 되는 곳이라 세상의 깊은 대화가 그리웠어요."

"……"

9

왜가리가 자리를 옮겼다. 세 발짝쯤 옮기고 다시 섰다.

"울프가 죽은 나이가 쉰아홉이에요."

"……"

"1941년. 그 여자가 쉰아홉에 죽었어요. 강에 걸어 들어갔어요. 주머니에 돌을 넣고. 우즈강이라고, 집 근처에 있는 강인데 걸어서 십 분 거리예요."

"돌을요."

"돌을 넣고요. 안 뜨려고 그랬을까? 얼마나 큰 돌인지는 알아봐야겠어요."

오벨은 스마트폰에 '버지니아 울프, 1941'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32세의 베토벤이 청력 상실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귀머거리라는 걸 들키느니 자살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내 안의 예술이 나를 붙들었다. 내게 주어진 것을 다 만들어내기 전에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는 결심과는 다른 울프의 선택이 머리안에서 충동했다 .


10

"울프한테 이모가 있었어요."

"이모요."

"이모가 죽으면서 돈을 남겼어요. 일 년에 오백 파운드씩. 그래서 그 여자가 방을 가진 거예요. 자기만의 방. 여자가 글을 쓰려면 돈하고 방이 있어야 한다고 강연을 했는데, 정작 그 돈은 자기가 번 게 아니에요. 이모가 준 거예요. 인도에서 말 타다가 떨어져 죽으면서."

"그, 그럼 신지님 이모님은요? 돈을 안 버시고도 살고 계시잖아요."

나는 좀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는 게 스스로도 좀 이상했다.

"나의 이모가 삯바느질을 했어요. 할 줄도 모르면서 했어요. 그게 웃긴 거예요. 처음에는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었죠. 바느질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아파트 단지 입구에 박스를 차렸어요. 솔기가 삐뚤어져서 옷이 돌아갔죠. 아주머니들이 와서 뭐라고 하면 그냥 다시 해드릴게요, 그러고 밤에 뜯었어요."

"뜯어요."

"실 뜯는 소리요. 그 소리 아세요? 톡, 톡. 그게 새벽까지 났어요. 나는 그 소리 들으면서 잤어요."

오벨뒤주는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하숙도 쳤어요. 부산대 학생들이 우리 밥상에 앉아 있었죠. 계란이 하나 나오면 그 사람들 밥그릇에 올라갔어요. 제가 대학 때였어요. 그런데 나는 학교에서 뻘짓만 하고 다녔죠. 어쩌면 희망이 없었던 거였어요. 아마 우리 아들도 지금 나의 대학 생활 단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의 이모는 어머니입니다."

"……"

나는 말을 이었다.

"울프는 돈을 받았고 나는 어머니에게서 몸을 낮추고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법을 받았어요. 그게 내가 영화 만드는 방식이에요."

11

컨테이너 집은 2017년에 불에 탔다.

밤에 개들이 짖어서 나갔더니 벌써 지붕이었다. 슬레이트가 터지는 소리가 총소리 같았다. 소방차는 산 아래에서 못 올라왔다. 길이 하나였고 그 길로 차가 안 들어왔다.

다행히 아이들이 다친 곳이 없었다. 집 2층에 자던 '동'이라는 개 한 마리가 나오지 못했다. 아마 1층과 2층 사이로 먼저 불이 번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개도 하얀 개였어요." 나는 오벨을 보며 말했다.

대학 때부터 전국을 다니며 이삼십 년 동안 모은 영화 자료와 원고, 기록이 모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한국의 방방곡곡 마을을 다니며 남겨진 영상, 노트, 메모, 많은 농촌의 아이들과의 수많은 기억할 수 없는 흔적들. 5톤 트럭만 남았다.

"백업은요." 오벨뒤주가 물었다.

"백업을 했어도 타버렸겠지요. 외딴, 인터넷도 안 되는 곳이었으니."

12

"그 다음에 어디로 가셨습니까."

"트럭이요."

"예?"

"5톤 트럭이 남았잖아요. 그 안에서 살았어요. 원래 영화 찍으러 다니려고 개조해놓은 거니까 자고 씻고 밥해 먹는 게 다 돼요."

"식구가 다요?"

"복실이라는 개도 있었고."

우리는 걸었다. 앞에서 노인 둘이 팔을 흔들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지나갈 때 한 사람이 우리를 봤다.

"주차장에서 잤어요. 여기 주차장, 저기 주차장.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고."

"……"

"주차장에서 밥 먹고 있으면 사람이 와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불법 캠핑입니다. 그러면 짐 싣고 다음 주차장으로 가요."

오벨뒤주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때 방송에 한 번 나갔어요."

"방송이요."

"개까지 데리고 캠핑 다니는 가족이라고. 그렇게 나갔어요."

"캠핑이요?"

지하철이 지나갔다. 나는 소리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13

그해 십이월에 강원도로 들어갔다.

인제. 산 하나 넘어서 육 킬로를 가면 휴전선이 나오고 거기서 사 킬로를 더 가면 북한이다. 그 산은 못 올라간다.

"처음 갔을 때 밤에 잠을 못 잤어요."

"추워서요?"

"확성기요."

"확성기."

"북에서 틀고 남에서 틀어요. 소리가 하늘에서 부딪혀요. 그러면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안 들려요."

오벨뒤주가 걸음을 조금 늦췄다.

"소리는 엄청 큰데 말은 없어요. 양쪽이 다 말을 하는데 아무 말도 안 들려요."

"……"

"아침 일곱시엔 부대에서 기상나팔이 나와요. 그러고 국민체조가 나와요. 그거 듣고 일어났어요. 몇 년을 그렇게 일어났어요."

마을 북쪽은 산이 병풍처럼 막고 있었다. 그 너머는 아무도 못 가는 땅이었다. 그런데 남쪽 마을은 조용했다. 요양원처럼 조용했다. 노인들이 하루 종일 앉아 있고 파프리카 농장에서 외국인들이 바쁘게 오갔다.

"그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집 없는 거 알았어요. 같이 영화 찍었어요. 경로당에서 밥도 주고."

14

마을에 빈집이 하나 있었다. 집단 축사하고 파프리카 농장 사이에 끼여 있었다. 칠십 년대 팔십 년대에는 군인 가족이 살았고 다방 아가씨들이 살았고 구십 년대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살았다. 원래 논이었던 자리에 칠십구년에 마을을 세웠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땅 밑에는 논이 있다.

"나는 그 집 보고 노란 집 생각했어요."

"아까 그 고흐요."

"고흐는 두 달에 한 명이었잖아요. 우리는 열 명이 몇 달을 있었어요."

"열 명이요."

"전국에서 왔어요. 코로나 때였고 장마가 길었는데도 왔어요. 마당에서 삼겹살 구워 먹고 김장하는 날은 다 나가서 같이 하고. 마을 애들이 와서 그림 그리고 사진 배우고. 벽에는 육이오 때 삐라를 벽화로 다시 그렸어요. 저쪽에서 뿌린 종이를 이쪽 벽에 그린 거죠."

"재밌었겠습니다."

"재밌었죠."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앞을 봤다.

"끄트머리국제마을영화제 본부로 삼았죠. 백 개 마을을 세계로 엮겠다는 거, 그 본부가 그 빨간 집이었어요."

"……"

"북한에서 제일 가까운 극장이었어요. 휴전선하고는 십 킬로예요."

오벨뒤주가 뭔가 말하려다가 말았다.

"싸움도 났어요." 내가 말했다. "고흐하고 고갱처럼."

"어떻게요."

"작가들은 맨날 빨간 집에서 마을 할머니들하고 놀았어요. 그런데 한 사람은 방문을 잠갔어요."

"잠가요?"

"안 나왔어요. 밥때도 안 나오고. 노크하면 지금은 좀, 그러고."

나는 잠깐 걷다가 말했다.

"나는 잠근 쪽이 이해가 안 됐어요. 거기까지 와서 왜 문을 잠그나."

"……"

"다치기도 했어요. 한 사람은 청소하다가 찬장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고 한 사람은 연장 쓰다가 아킬레스건이 나갈 뻔했어요. 그건 좀 심각했어요."

"지금은요."

"예?"

"강원도 빨간 집은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 다리 밑까지 그냥 걸었다.

15

빨간 집에 손님이 하나 왔었다.

페이스북에서 내 글을 보고 온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내 영화가 보고 싶다고 했다. 마당에 상을 펴고 소주를 놓고 노트북으로 한 편을 틀었다. 팔십 분짜리였다.

중간쯤에서 그가 말했다.

"마을영화가 이런 드라마가 있는 영화인 줄 몰랐어요."

그러고 조금 있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건 키아로스타미를 뛰어넘네요."

키아로스타미를 아는 사람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 사람 얼굴을 다시 봤다.

"음악감독이 있어야겠는데요."

빈틈을 잘 보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영화는 음악을 따로 안 만들었다. 마을회관에서 틀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컴퓨터에 있는 음악을 급하게 갖다 붙인 거였다.

영화가 끝나고 그가 말했다.

"이제 다시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겠네요. 다 이루었네요."

"……"

"이건 음악이니 편집이니 하는 게 문제가 안 되는 작품입니다. 이미 거장 반열이에요. 작가나 감독의 시선이 아니라 제일 낮은 자의 시선으로 삶하고 역사를 보고 있어요."

"……"

"평범한 사람들은 감당 못 합니다. 봐도 뭘 봤는지 모를 거예요."

그는 랑시에르한테 보내야 한다고 했고 부산에 있는 평론가 이름을 하나 댔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두서없음 같은 것도 좀 보이고요."

나는 웃었다.

우리는 소주를 더 마셨고 그 사람은 다음 날 갔다.

오벨뒤주가 물었다.

"좋은 말입니까."

"좋은 말이죠."

"……"

"근데 다 이루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나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

"칭찬 같기도 하고 그만하라는 것 같기도 하고."

지하철이 지나갔다.

"그 뒤에 어떤 영화 만드셨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16

분교였다.

부모가 일 때문에 나가면 애도 같이 나갔다. 하나씩 빠졌다.

마지막에 우리 아들 딸 둘이 남았다.

"둘이요?" 오벨뒤주가 물었다.

"우리 애 둘이요. 남매예요. 아들 딸."

"전교생이 둘입니까."

"둘이요."

"……"

"교실에 둘이 앉아 있고 선생님이 둘 보고 수업을 해요. 아침 일곱시에 기상나팔 듣고 일어나서 그 학교에 가는 거예요."

우리는 걸었다. 물에서 오리가 한 마리 날아올랐다가 열 걸음쯤 가서 다시 내려앉았다.

"애들이 친구가 없었어요. 학교에 친구가 없어요. 친구가 없는 학교라는 게 존재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

"나는 내가 선택해서 거기 있는 거니까. 근데 애들은 선택한 적이 없잖아요. 군인들 땅에서, 확성기 소리 들으면서, 둘이서."

"그래서요."

"그래서 나왔어요. 부산으로."

"부산이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여기 사세요.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살던 집이에요."

오벨뒤주가 나를 봤다.

"늦은 나이에 그 집에 다시 들어가 사는 거죠. 고등학교 때 나온 집에."

오벨뒤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자제분들은 여기서 친구가 생겼습니까."

"생겼죠."

"다행입니다."

"다행이죠."

17

"트럭 몰고 다닌 거예요. 5톤짜리. 안에서 자고 씻고 편집하고. 한 마을에 들어가면 짧으면 열흘, 길면 두 달. 그 마을 사람들이 배우고 감독이고 스태프예요. 시나리오는 없어요."

"왜 백 개나요."

나는 그 질문을 기다렸던 것 같다.

"하나의 작품은 나에게 의미가 없어요."

"백 개면요."

"질의 전쟁이 아니라 양의 전쟁이라고 생각했죠."

"양의 전쟁이요?"

"이게 양의 전략이에요. 나는 질로는 못 이겨요. 우수한 인재가 아니니까. 그런데 양으로는 이길 수 있어요. 지지 않으려는 능력은 없어도 질긴 집착은 가지고 있다고, 그것 하나는 제가 믿는 구석이니까요."

"대단하시네요."

"마을은 바로 밀레의 창작 공동체, 고흐의 노란 집, 버지니아 울프의 창작 공동체 블룸즈버리 그룹을 넘는 생활인 중심의 창작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인 것이었죠. 밀레, 고흐, 버지니아 울프가 있었던 한국에 백 개의 창작 공동체를 만들었다고 생각해봐요."

오벨뒤주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거대 자본이니 정치니, 그런 거 나는 이길 자신 없어요. 세상은 안 바뀌어요. 정권 바뀌어도 안 바뀌고. 그런데 마을회관에서 자기들 얘기 보면서 웃는 거요, 그건 있잖아요. 나는 그게 인문학이 시작되는 것이고 창작과 예술이 생활과 일체화되는 것이며 삶의 웃음과 위안이라고 생각해요. 허무를 이기는 게 아니라 그냥 허무 옆에 웃음을 하나 놔두는 거요."

"웃으셨습니까."

"예?"

"그 마을 사람들이요. 웃었습니까."

"잠시 바람처럼."

나는 웃었다. 오벨뒤주는 웃지 않았다.

18

"아버님 얘기를 좀 해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오늘은 신지님을 알고 싶어요."

"울프 아버지도 그랬어요. 레슬리 스티븐이라고. 재산이 멀쩡한데 파산한다고 매일 울었대요. 장부를 딸들 앞에 펴놓고 우리 집이 거지가 된다고. 그러면 여자들이 달래줘야 되는 거예요. 그게 그 집 저녁이었어요."

"똑같습니다."

"저도 똑같죠."

나는 그 '똑같다'가 좋았다. 그 말을 오벨뒤주가 해줘서 좋았다.

"울프는 열세 살에 어머니가 죽었어요. 마흔아홉에. 남 간호하다가 죽었어요. 남편 간호하고 애들 간호하고 동네 아픈 사람들 간호하고, 그러다가 소진돼서 죽었어요. 그 다음에 이복언니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그 언니도 이 년 만에 죽었어요. 그 다음이 언니 바네사고."

"자리가."

"예?"

"자리가 계속 있었네요. 사람만 바뀌고."

"울프는 열세 살에 무너졌어요. 첫 붕괴가 그때예요. 평생 반복됐고. 나는 그게 이해가 돼요. 나는 그 여자가 이해가 돼요."

19

"내 아내가 버지니아 울프예요."

"예?"

"아까부터 얘기했잖아요. 울프. 내가 울프가 되고 싶었는데, 울프는 내가 아니에요. 우리 집에서 울프는 그 사람이에요."

"……"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자기 걸 하고 싶어했고."

"여자가 작가가 되려면 돈과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 하네요. 방을 안 주셨나요?"

"빨간 집이요. 아이들과 내가 나왔으니까 주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시간이 끝날 줄을 몰라요."

"그 사람은," 내가 말했다. "그 사람은 램지 부인이 되기를 거부한 거예요."

"램지 부인이 누굽니까."

"버지니아 울프의 어머니죠. 사실은 울프의 작품 『등대로』에 나오는 이름이긴 한데요. 온 집안을 다 돌보는 여자요. 남편 기분 맞춰주고 애들 챙기고 손님 밥 먹이고, 저녁에 다 모아놓고 웃게 만드는 여자. 울프의 어머니. 울프가 그랬어요. 여자가 글을 쓰려면 그 여자를 죽여야 된다고. 집안의 천사요. 그걸 목 졸라 죽이지 않으면 글을 못 쓴다고, 강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면."

"그러면 뭐요."

"내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기를, 내 아내가 되기를 거절한 거예요. 혼자서 버지니아 울프가 되겠다고. 그러면 나는 뭐가 되냐고요. 결국 나는 아이들 때문에 내가 램지 부인이 되고 아이들의 램지가 되기도 해야 했죠 울프는 여자가 작가가 되려면 돈과 자기 방을 가져야 한다고요 그런데 모든 여자가 돈과 자기 방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울프를 비웃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했어요 ' 여자는 방이 없어서가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라고요 물론 그 말은 그 시대에 나올 수 있는 말이지만 어느 순간 나도 그 말을 아내에게 하게 되더라고요.

"..."

오벨뒤주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그가 뭐라고 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곧 이야기했다.

"나의 전 아내는 버지니아의 어머니가 아니라 버지니아도 아니라 채털리 부인이 되기를 바란 거네요. 첫사랑을 찾아갔어요."

" 안나 카레니나이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뷰캐넌같은 것인가요?"

" ...."

처음이었다. 그나 나나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은.

20

그는 지하철역 쪽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반쯤 올라가다가 돌아서서 뭐라고 했는데 전철 소리 때문에 안 들렸다.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그가 다시 뭐라고 했다. 이번에는 들렸다.

"내일도 나오십니까."

"나올 거예요."

"예."

그리고 올라갔다.

나는 왔던 길로 돌아갔다. 왜가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22

울프한테는 이복오빠가 둘 있었다. 어머니가 앞에서 낳은 아들들. 그중 하나가 울프가 예닐곱일 때 그 애를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만졌다. 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죽고 나서, 그러니까 그 여자가 열세 살 지나고부터 스물 몇까지, 밤에 방으로 들어왔다.

울프는 그걸 나이 오십 넘어서 글로 썼다. 오십 년을 지나서 썼다.



25

뉴스를 본다.

'북의 김정은과 미국 대통령 트럼프 전제조건 없는 대화가능성'

울프가 마지막 소설 『막간』을 쓸 때 독일이 폴란드를 밟았다. 런던 하늘에 폭격기가 지나갔고 그 여자는 시골집에서 마을 야외극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나라 역사를 연극으로 하는 이야기. 아마추어들이 하는 연극. 바람이 대사를 날려버리고, 축음기가 걸리고, 빈자리를 소 울음이 대신 채우는 연극.

그 울프는 그 작품을 하찮다고 생각했다. 출판을 미루려고 했다. 자기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소설을 오늘 밤 유튜브 낭송으로 들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 역사를 연극으로 하는 이야기. 울프가 마지막에 쓰고 있던 게 그거였다는 것.

울프는 그걸 소설로 말했지만 나는 몸으로 뛰며 백 개의 막간을 만든 사람이다.

나는 울프가 그 작품이 실패라고 생각했기보다는 자신의 창작이 대중에게 인정 받지 못할 것에 좌절했을 것이다 . 하지만 내 작업은 버지니아 울프의 창작 공동체, 개인창작과 비교될 수 없는 작업이다.그런데 내 아들의 시선이 떠오르면 나는 힘이 빠진다. 아들은 의미나 가치보다는 약한 이에 대해 응원을 보내지 않는다 . 무능하고 약하면서 의미있다고 스스로 자족하는 사람에 대해 경멸할 뿐이다 .

여기서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모를 일이다 . 울프처럼 좌절 할 수 있을 것이다 . . 오벨의 모습이 사라지고 보이지도 않는 전철역 계단을 보며 한참 동안 왜가리처럼 서 있었다. (수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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