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이 오고 있었다. 새벽이 지나면 아침이 올 것이다.
편의점 옆에 앉아 있던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울던 오벨뒤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캔 음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알렉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처럼 두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갔다가 다시 내렸다.
도로 건너편 목욕탕 굴뚝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한 번 정도는 그냥 잠들어 아침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아버지가 요양병원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나에게 아침은 전쟁이었다. 1층에 있는 두 아이들의 밥을 챙겨야 했다. 나는 2층에 있어도 1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CCTV 화면을 들여다보며 누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확인했다. 아버지의 어머니를 향한 잔소리는 어릴 때부터 나의 여린 영혼을 갉아대는 소리이기도 했다.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아침의 집을 나와 산사를 찾거나 도서관을 홀로 찾았다.
부산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내려온 이후 집을 나가라는 고함 소리와 짜증은 나의 아침을 울게 만들었다. 자식에 대한 걱정과 자기의 전략을 관철하기 위한 발악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나를 무력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한 무식한 본능이었다.
전라도 해남 에루아헌에서 네팔, 헝가리, 브라질 감독들과 노마드 영화제를 하고 있을 때 들려온 소식. 아버지가 넘어져 척추가 골절되었다고 했을 땐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서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있겠구나. 근데 그 모든 걸 내가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군대의 아침보다는 나았다.휠체어의 아버지는 나의 인질이 되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휠체어에서도 상전짓을 멈추지 않았다.
부산의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다 결국 요양병원으로 가면서 나의 아침은 조금 편안해 지기는 했다. 그래도 아침은 그런대로 편안해졌지만, 곧 아들의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결국 1층의 어머니도 요양병원으로 보냈다.
나의 영화 일을 모두 손에서 놓아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의 시간이 나는 우군 하나 없는 사면초가로 패망한 항우가 되어 버렸다. 혼자 혈혈단신 전국을 노마드하는 한 달간의 핫한 국제영화제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홀로 전전긍긍했던가. 그 몇 년간의 동분서주한 시간이 손 안의 물처럼 흘러내렸다.
둘은 내 이야기를 오벨의 벽처럼, 말처럼, 곰처럼 듣고 있었다.
아들은 방학이면 밤을 꼬박 새우고 12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딸은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들은 어떤 때에는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들은 오히려 나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나는 온전히 혼자인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잘 쓰겠단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다른 소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쓰자고 생각했다. 오래 붙잡고 궁리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핸드폰에 메모한 문장들은 쌓여 갔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내 글이 되지 못했다. 어디엔가 적어두었지만 다시 찾지 않는 문장들. 마치 쓰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아들이 일어나기 전의 자유시간 .
다시 군대의 아침처럼 다가올 것이다. 요양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집으로 오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양병원에서 아버지가 부활했다.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던 아버지. 이제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나이 90살에 통증이 사라지고 워커에 의지해서 이동이 가능해져 버렸다. 부활했다.
이제 나의 아침은 다시 군대의 기상 나팔소리와 애국가가 울릴 것이고 동원 예비군의 어설픈 인질이 될 것이다. 요양병원 퇴원을 요구하는 아버지의 전화를 차단했다. 아들이 나를 싫어하고 아내가 희망없는 나의 뒷바라지를 두려워해 이혼을 요구하듯이 나도 아버지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나를 요양병원에서 죽게 버릴 것이냐? 요양병원에서 죽기는 싫다"는 아버지의 간절함을 결국 무시하지 못한다. 내가 부산에 내려와 받은 그 학대와 폭력을 떠올린다면 나는 아직도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무시하면 할수록 나에게 다쳐올 죄의식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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