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성 동문입구, 성벽을 따라가다가 길이 끊어진 성벽 근처의 옴팍한 곳에 다섯 명이 모여 있었다. 모두 모자와 안경,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하면서 위로를 찾는 ‘우울한 이들의 아침 식사’라는 자조모임이었다. 당근에서 우연히 보고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전 알렉산더입니다. 각자 짧게 자기소개를 하시죠.” 유일하게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다. 그의 동굴을 드러내 놓고 있는 사람. 이 모임의 방장이다.
“가온입니다.” 닉네임을 말하고 나자 가온은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자기를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긴 할 것이다. 알렉산더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가온은 무슨 뜻이에요?” “중심이라는 순우리말이에요. 중심을 잡지 못해 결국 이 자리까지 왔네요. 그냥 깨어 있다는 게 힘들어요. 매일 자고 싶어요. 어제는 저녁 6시에 약을 먹고 잠이 들었어요. 약이 아니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이모임을 통해 약을 천천히 줄여보려고요” "예 줄여가야 하지요 그리고 약을 통해 무기력해지 않도록 처방을 부탁하세요 의사에게" 알렉산더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저는 상송입니다.” “저도 프랑스 노래 좋아해요.” “제 닉네임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럼 무슨 뜻인가요?” “상송은 프랑스혁명 때 단두대, 기요틴의 집행인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인 샤를 앙리 상송이라는 사람입니다. 상송 가문은 대대로 사형 집행을 맡았고, 프랑스혁명 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도 집행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도요.” “와, 보통 샹송, 프랑스 노래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건 chanson, 샹송. 노래라는 뜻입니다.” 닉네임 하나가 사람들을 지적으로 압도할 수 있다는 게 흔치 않았다. “왜 하필… 아, 죄송해요. 왜 그런 닉네임을?” 약간 시간을 두고, 마스크와 검은 안경과 모자를 둘러쓴 남자, 상송이 말을 이어갔다. “그냥 상송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되고 싶어요. 지금도.”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 침묵을 끊으려 한 여자가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자보입니다.” “자보? 무슨 뜻이에요?” “영화 '그루미 선데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보셨나요? 영화에서 젊은 독일인 한스가 실연 때문에 자살하려고 다뉴브강에 뛰어들었을 때 자보가 그를 구해줍니다. 그런데 한스는 독일로 돌아갔다가 나치 장교가 되어 부다페스트로 돌아옵니다. 자신을 살려준 자보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수용소로 보내지요.. 한 여자때문에 ” “그 영화 저도 봤어요.” “저도 배신을 당하고 사람에 대한 공포가 생겼어요. 정말 오랜만에 알렉산더 님이 모임을 만들고 문자를 주셔서 이렇게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랬다. 모임을 만든 알렉산더는 줄곧 모임 안에 잠입해 약이나 상담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를 펼치는 이들과 부딪혔다. 우울한 사람들이 약이나 어설픈 상담에 의존해서는 오히려 그들의 호구가 되어 절대 우울을 극복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이 게시판을 한바탕 시끄럽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많은 가입자들이 모임을 떠났다. 그 뒤 게시판은 조용해졌고 활동도 끊겼다. 알렉산더는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한 명씩 문자를 보내 금정산성에서 오늘 첫 오프모임이 이루어진 것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저는 톨스토이입니다.” “작가 톨스토이 작품을 좋아하나 봐요?” “솔직히 전 톨스토이 작품을 하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기억은 없어요. 영화로 '전쟁과 평화'는 본 것 같은데.” “그런데 왜 닉네임을 톨스토이라고 정했나요?” “작품보다는 그의 죽음이 나와 비슷한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아서요. 언제 어느 외진 곳에서 쓸쓸히 죽어갈 그런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고독사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아요" "저도요 " “톨스토이가 어떻게 죽었는데요?” “작은 간이역 역장실에서.” 요즘은 뭔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모두들 스마트폰부터 꺼내든다. 사실 따지고 보면 스마트폰은 나의 적이기도 했다. “아스타포보 역입니다. 현재 명칭은 레프 톨스토이 역으로 변경되었다네요.” 자보가 스마트폰의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톨스토이는 집을 떠난 뒤 여행 중 병에 걸렸고, 아스타포보 역의 역장 관사에 머물렀습니다. 당시 역장 이반 오조린이 자신의 집을 내주었고, 전 세계 기자들이 작은 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와, 갑자기 톨스토이에 대해 관심이 생겼어요. 난 유명하고 세계적인 작가라고 해서 그렇게 쓸쓸하게 죽었다고 생각을 못했는데, 갑자기 친근함이 들어요.” 가온이 웃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오랫동안 아내와 싸웠어요.” 나는 순간 나의 말을 톨스토이의 상황과 혼동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아 넘어갔다. “원래 나이가 들면 여자가 다 남자를 잡고 흔들죠. 남성 호르몬 때문이잖아요. 여자는 남성 호르몬이, 남자는 여성 호르몬이…” 나는 그 말을 듣다가 웃었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말을 이어갔다. “평생 같이 살고, 같이 작품을 필사하고, 구술받고, 그런데도 말년에는 서로를 견디기 힘들어했던 모양이에요. 재산 문제도 있었고, 톨스토이가 자신의 저작권과 재산을 가족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했던 것도 갈등의 이유였다고 해요. 아내 소피야는 남편이 가족을 버리고 자기만의 잘난 도덕적 삶을 살려고 한다고 생각했고, 톨스토이는 또 그런 아내를 속물 취급했던 것 같고.” “그래서 집을 나온 거예요?” 상송이 물었다. “아니요. 아내와 딸만 떠났죠.” 순간 다시 나와 톨스토이를 혼동하여 내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나는 그 대답이 잘못되었음을 눈치채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네. 여든두 살에 딸과 함께 집을 떠났죠 어디에 머물다 주치의도 같이 동행했었고…” "주치의도 딸도 그건 가출이 아니라 여행 같은데요?" “여든두 살에?” 이번에는 모두가 웃었다. 하나의 문장에 한 사람은 나이에 한 사람은 주치의의 존재에 대해 반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이에 집을 나왔다는 게 저는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요. 젊은 사람도 아니고, 이제 살 만큼 산 사람인데, 그래도 더는 못 견디겠다고 집을 나간 거잖아요.” 나는 그때 요양병원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노망 아닌가요?”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좀 숭고한 뜻이 속물 같은 아내 때문에 억압되어 우울증이 심했던 것 아닌가?” 우울증이라는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이제 다시 자기를 향해 달려드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아내는 평생 남편과 함께 글을 필사하고 정리하고 돌보았고, 마지막에는 남편이 죽어가는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요양병원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만나면 싫고, 전화를 받으면 화가 나고, 가끔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해지는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아버지만은 아니었다. 톨스토이처럼 아내도 어느 순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은 역장실 안에 있었고, 한 사람은 밖에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기자들이 있었다. 세계는 위대한 작가의 마지막을 보고 있었지만, 정작 아내에게는 남편의 마지막 얼굴을 볼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모욕감 그리고 톨스토이의 복수는 지독하고 세계적이었다.
필요 없이 길러진 것 같은 어떤 말도 중간에 자르는 법이 없는 '알렉산드'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잦아들자 그때서야 운을 뗐다. "처칠이 그랬답니다.'검은 개가 나를 따라다닌다.'라고요 '블랙독' 우울증을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우울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 찾아오는 하나의 손님처럼 생각하는 것이었답니다. 항상 우울하더라도 손님이 오래 머무네라고 생각하십시다. 생각 하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너무 덥지요 이 더운 여름 집으로 검은 개가 찾아옵니다. 손님이지 않습니까? 짜증 나고 힘들고 싫어도 그냥 언제 간 갈 손님이라고 생각하자고요 " 첫마디부터 달랐다. 상송이 감동스러웠는지 두 손을 모아 박수 흉내를 내었다. 그러자 앉자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진짜 박수로 쳤다. '아 알렉산더다. 나는 속으로 감탄이 나왔다.
뭐라도 말의 꼬투리를 잡거나 분위기를 자기 주도로 이끌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작은 모임의 제우스 신처럼 군림하려 드는 수많은 모임장의 분위기는 그에게 찾아볼 수 없었다. 첫 모임에서 가장 예민하게 걱정하던 부분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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