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아버지를 가리켜 “흥감이 많다”라는 말을 했다. 실제보다 지나치게 늘려 떠벌리는 짓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냥 대강 넘어가도 될 것을 핑계로 잡고 상대를 비난하는 태도들이 나도 싫었다.
최근에도 요양병원 다른 층에 있는 어머니의 병실을 찾아가서 무좀 발톱을 두고 몇 번이나 요청을 했는데 손도 대지 않고 관심도 없다며 간호사나 간병인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그 이야기를 또 병원을 찾아온 나를 앉혀 놓고 “이 병원 사람들은 도저히 안 되겠다”라고 비난과 과장을 둘러댔다.
너무 딱딱해진 무좀 발톱은 나이가 들면 으레 생기는 것으로, 그렇게 길지도 않은 상태라 오히려 너무 짧게 깎을 수도 없다는 간호사의 이야기는 나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논리는 아버지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었다.
나에게 기질적 대물림은 끔찍한 공포다.
물론 그런 기질을 대물림받은 나는 나의 과거에 대해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지우고 싶은 흑역사 같은 것인데, 그 흑역사의 기원인 이가 떡하니 앞에 버티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헤밍웨이의 자살이 떠오를 만큼 끔찍하다.
헤밍웨이는 1961년 산탄총으로 자살했고, 그의 아버지 클래런스 헤밍웨이는 1928년 권총으로 자살했다. 헤밍웨이 가족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자살이 반복되었고, 형제자매 우르술라와 레스터, 손녀 마고 등에게도 자살이 이어졌다. 자료에 따라 가족 전체를 다섯 명 또는 일곱 명으로 세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숫자 자체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죽음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남성다움에 대한 활동과 강박도 이 가족의 비극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헤밍웨이가 만들어낸 남성성은 사냥, 전쟁, 투우, 낚시,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과 연결되어 있었고, 강인함과 용기를 남성의 중요한 덕목처럼 내세웠다. 아버지 클래런스 역시 의사이면서 사냥과 야외 활동을 즐겼고, 가족 안에는 남성적인 강인함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챗지피티는 자살의 원인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단다. 유전적 취약성, 정신적 고통, 가족의 관계, 시대적 문화가 어떻게 서로 얽혀 있었는지를 따져봐야 한단다.
가족의 죽음의 기억도 대물림될 수 있고, 고통을 처리하는 방식도 대물림될 수 있으며, 사람들과 관계하고 대화하는 것, 가족적 행동 양식도 문화적으로 대물림될 수 있다.
내가 80년대 당시 정치나 운동권 문화에서 보고 배운 연설적 관계, 영화판에서 배운 영화 한 편을 만들어 내기 위한 유격적 태도, 사실 그것은 그 문화의 아주 작은 일부일 수도 있었는데, 그 밖에 진짜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한 것도 어쩌면 그 흥감스러운 기질 탓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모든 운명에는 바탕이 가장 큰 작용을 하게 마련이다.
그게 ‘피’다.
그래서 그런지 운동권과 영화판의 수직적 문화가 아버지를 보는 것처럼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며 나에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힘 뺀 이들의 생활 속 흥이었고, 넉넉한 멋이었다. 마을을 다니며 본 수평적 공동체 문화였다.
난 어쩌면 마을이라는 절의 행자 생활이 그토록 좋았던 것이다.
그 다듬지 않은 사람의 향기들을 통해 정치와 역사, 예술을 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하고, 80년대의 절망에 빠진 나를 새로 살게 하였다.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권위와 돈과 명망, 힘을 떠나서도 존재했던 숨어 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만난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고 여행을 자주 시킨다고 해서 그 유토피아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핫플에 가서 사진을 찍고 맛난 음식을 먹고 멋진 카페에 간다고 만날 수 있는 그런 유토피아는 아니다. 사람을 한두 명 만난다고 그 유토피아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들과 살고, 음식을 얻어먹고, 같이 웃고, 같이 영화를 만들고, 함께 마을의 광장에서 별을 보며 잔치를 벌이지 않는다면 볼 수 없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요양병원 3층 수간호사의 목소리는 긴장과 피로에 젖어 있었다.
“아드님, 다름이 아니라… 어머니 무릎이 지금 많이 붓고 아프시다고 하셔서요. 원장님께서 큰 병원에 모시고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시는 게 어떨까 하시네요.”
주말을 앞둔 토요일 오후, 평온해야 할 시간이 한 통의 전화로 금이 갔다.
“왜요?”
“무릎이 퉁퉁 붓고 아프신데, 여기서 일시적으로 물을 뺄 수는 있어도 영구적인 치료는 아니니까요. 어제, 수요일부터 아프셨나 봐요. 목욕을 시키다 우리가 발견했어요. 그리고… 거기에 한방 침도 맞았단 말이에요. 오늘은 저혈압에다 산소포화도가 80으로 떨어졌네요.”
어머니의 상태는 점차 가라앉고 있었고, 컨디션도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었다고 했다. 당장 서지도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고 했다. 나는 일단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정형외과에 있는 지인에게 상담이라도 받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잠시 후, 병원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같은 요양병원 1층 아버지가 문제였다. 각 층마다 다른 수간호사가 있었다.
“아드님, 죄송한데요… 목욕을 가든 저희가 여기서 시켜드리겠다고 시도를 해도 안 되고, 지금 고함만 지르고 있고 약도 안 드시고… 제발 얼굴을 한번 비치시고요. 저희도 업무에 마비가 올 지경이에요.”
요양병원이라는 거대한 유령의 성 안에서, 아버지는 지독하게 싸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요양병원 생활 1년 만에 어느 정도 허리 통증이 사라지자, 굳이 다른 사람들이 요일을 정해 하는 공동 목욕에는 응하지 않고 목욕도 이발도 내가 가서 휠체어를 밀고 외출을 해서 병원 밖에서 해야 했다. 아버지는 멀쩡한 자기가 굳이 이 요양병원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떼를 썼고, 직원들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참이었다.
가슴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여름 방학에 사춘기 아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건 그야말로 악마와 함께 사는 경험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 키보드로 목탁을 치는 듯 옆방의 아들의 존재를 잊어야 했다. 헤밍웨이는 술과 글쓰기, 위험한 행동을 고통을 견디는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정신의학적 분석도 있다
그래서 그의 '남성성'은 단순히 멋있는 마초 이미지가 아니라,
고통을 견디기 위해 자신에게 씌운 갑옷이었다고 챗지피티는 말한다.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아버지는 저렇게 흥분해 가지고…”
“지금 강원도에 있어서 부산에 내려오지 못한다고 하세요. 병원 안 목욕탕을 사용하시라고 하고요.”
일단 어머니를 큰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하기에 더 이상 강원도 핑계를 댈 수 없었다. 알리바이를 위해 그날을 보내고 다음날 일찍 병원을 찾았다.
일단 2층 아버지 병실로 갔다. 아버지는 워커로는 병원 어디로든지 다닌다. 간혹 3층의 어머니 병실에도 가기도 하지만 남자 화장실은 절대 가지 않고 기저귀 생활을 계속 고집한다.
게으른 것도 아닌데 어떤 공포가 있는 것일까? 한 번 더 넘어지면 영원히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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