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나에게 죽음을 선언한 걸까? 겨우 한 번 만난 사람인데, 두 번째 자리에서 죽음을 선언하다니
그래도 내가 마음이 편치 않을 거라는 걸 모르고, 자기 참을 수 없는 절망감을 애먼 나에게 퍼부어버리더니.
저런 인간과 너무 깊이 엮이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어쩌면 나에게 살고 싶다는 호소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 또 가련해진다.
기다리던 2차 당선 작가가 왔다.
굳이 본명을 요양병원 자서전 작업에 쓰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는 그 남자에게 '이(차당) 선 작가'로 부르기로 서로 약속했다.
곧이어 그 남자가 들어왔다.
서로 가벼운 목례를 하고 나는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이선 작가님, 이쪽은—" 하며 그 남자의 이름이 스스로 나오길 기다렸으나, 남자는 가벼운 목례만 한다.
이선 작가는 그 남자에게 묻는다. "성함이?"
"제가 이름을 잊어버렸어요."
"예?"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다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농담인데요. 그냥 제 이름을 내세우는 게 요새 좀 부끄럽고 힘들더라고요. 아버지 자서전 작업을 하면 금방 알려질 텐데요."
뭔가 불편한 구석이 있는가 싶어 우리는 눈짓으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이선 작가님은 출판 지원을 받아 두 달 안에 수정 작업을 해야 하는 바쁜 시간인데, 이 작업을 맡아주실 만한 분이 마땅치 않아서… 그래도 요양병원에서 이런 작업을 허락해 주는 게 쉽지 않았어요. 행정 실장도 처음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냐며 펄쩍 뛰었어요."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그런 말을 했으면 아마 더 의아해했을 거예요."
"저야 아드님이 강하게 원하시고, 꽉 막힌 두 분을 소통시키는 데 그만한 게 없다고 옆에서 거든 것뿐인데요."
"그래도 이런 작가님을 소개해주시고, 수간호사님과 행정실장님들과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가신다고 일주일 동안 병원을 오가셨잖아요. 제가 이야기했을 땐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원고 수정 작업 시간도 촉박할 텐데." 나는 이선 작가에게 미안함이 묻은 고마움을 표현했다.
"괜찮아요. 일주일에 한 번 , 두 시간이잖아요. 제 원고는 새로 쓰는 것도 아니고 수정 작업인데요. 그리고 글과는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고 감성적인 자극을 받는 시간도 필요한 것 같아요. 너무 오래 같은 원고를 수정하는 데는 기술이 아니라 어떤 생각의 전환점이 필요하거든요. 요양병원이라는 공간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어요. 얼씨구나 좋다 싶었어요"
순간 이선 작가는 그 남자를 보면서 미안함을 느끼는 눈치를 보였다.
"괜찮아요, 솔직하신 거죠. 작가 입장에서는."
"이선작가님 부모님께서는 아직 건강하신가 봐요?"
"저 부모님 두 분 다 안 계세요."
그 남자와 나는 두 눈을 마주쳤다.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어떤 감당 못 할 표현에 놀라 겁 많은 토끼가 찾아드는 작은 동굴 같은 것일까. 그의 동굴은 분명 아직 어두웠다. 그런데
이선 작가가 그 불편함을 알아챘는지 "아버지는 5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그보다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무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궁금함이 밀려왔지만.
오늘부터 요양병원으로 이선작가가 들어가 그 남자의 아버지와 구술작업을 하기로 했다.
"침상에 누워서 구술을 받는 거라, 옆에 앉아 작가님 핸드폰으로 음성 녹음 하시고요."
그리고 오늘 오기 전에 다이소에서 산 스마트폰 거치대를 꺼냈다.
"침상 반대편에 이걸 고정하고, 또 다른 핸드폰으로"
그 남자가 자신의 핸드폰을 이선작가에게 건네준다.
"끼워주시고 녹화 버튼을 누르시면 됩니다. 한번 연습해 보세요. 그래도 자주 해오신 거니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일단 대화를 이끌어 내보세요. 오늘은 두서없이 대화해 보고, 다음 주에 구술 매뉴얼을 같이 한번 회의하면서 나이순으로 하든 주제별로 하든, 사실 저도 이런 건 처음이라"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떠올리는 게 누구에게나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특히 상처나 아픔이 있는 분들 에게는요."이선작가가 말했다.
나는 그 남자를 변호하는 변호사처럼 거든다 "그냥 같이 살아도 묻기가 힘들잖아요, 먼저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다들 데면데면해요. 어떤 아버지들은 아들을 키울 때 남의 아이를 키우는 것 같은 마음을 갖죠. 특히 사춘기쯤 되면 옆집 아들이나 다름없어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선 작가는 웃으며 두 남자를 본다.
"저는 아버지나 남동생이 없어서 그런 문화를 이해 못 했는데, 이번 경험이 저에겐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아버님이 살아온 시간을 이해할 기회도 되고요." 이선작가의 그 말이 떨어지자 말자 그 남자는 약간 흥분하듯 말을 이었다.
"전 그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온 건지 알고 싶어요. 이렇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그 기원을 그냥 알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그러고 나서라도 죽어야지, 도대체 왜 태어나서 남들에게 이렇게 고통을 줬는지, 그냥 그게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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