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주의 서중일이다

by신지승

2015년 나는 아이들과 함께 제주 북촌리를 찾았다. 당시 대학살 현장인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였던 생존자들과 일주일을 함께 지냈고, 오사카로 밀항했던 사람과 마을에 남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때의 아이들의 나이쯤 되었던 그 마을의 아이들을 만났다. 나는 그 아이들과도 한 편의 영화를 찍었다.

이후 난 제주 4.3에 대한 새로운 영화 한 편을 구상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제주 땅이 아니라 제주의 바다위에서 밀항 전문 목선 선주의 아들 서중일의 이야기이다 물론 가상의 인물이다. 45년 이후 바다에서 죽은 제주 사람들도 너무 많다.그 아픔과 4.3의 희생을 막으려 했던 온건주의자 실제인물 조몽구의 이야기이다,


조몽구는 제주 남로당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지만, 김달삼과는 달리 온건주의 노선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신촌회의에서는 무장투쟁을 할 것인가, 때를 기다리며 준비할 것인가를 두고 19명의 남로당 간부들이 며칠에 걸쳐 향후 전략을 논의했다. 신촌 회의가 마을의 민가 땅굴 회의실에서 열렸다. 서중일은 낮에 마을의 경비를 맡았다. 그는 조몽구의 친구였다. 신촌회의 결과는 무장투쟁 12명, 온건투쟁 7명이었다.


조몽구를 비롯한 온건·신중파(7표)는 성급한 무장투쟁은 조직의 전멸과 무고한 도민들의 희생을 초래할 것이라며 끝까지 반대했으나, 5표라는 표차로 밀리며 도당의 노선은 결국 '무장항쟁'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조몽구는 회의 중간중간 서중일을 만나 화병에 걸린 것처럼 들떠 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토벌대차원에서 신원이 확실한 이들이 오고 가며 감시를 철저히 했다. 나를 불러들인 이유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밀항을 해야 할 상황을 대비한 것이다


그 이후로 김달삼이 무장 투쟁의 바카라임을 지고 조몽구는 일체의 정치적 권한을 잃었다,

지금 생각하면 19명의 핵심 남노당원의 손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안개처럼 사라져 갔다는 게 참 지랄 같다

조몽구는 항상 한국사의 황당 사건중 하나가 동학 사건 당시의 우금치전투라고 생각하고 또 4.3 무장 투쟁론이라고 떠벌렸다. 게릴라 전투로 희생을 최소화하고 최대의 성과를 내려는 전술을 고민하지 않고 그냥 맨땅에 헤딩하듯 전면전을 하는 건 대체 제정신이 있는 짓인가?라고 흥분했다.

결국 조몽구는 헤게모니를 김달삼에게 넘기고 한라산으로 함께 들어가 숨어 지냈다. 물론 나는 선주의 아들이고 배를 아버지와 함께 움직여야 하기에 신원이 누구보다도 안전했다. 마을에 남아 내가 해야 할 일은 밤에 내려오는 당원들을 안전하게 땅굴로 안내하고 안전하게 다시 산입구까지 이동시키는 일이었다.

어느 날 조몽구의 아내와 자식들은 토벌대에 의해 해변에서 학살당한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김달삼은 다른 배로 서해안을 따라 월북을 하고 조몽구는 나에게 자신도 북으로 가야 한다고 함께 밀항을 부탁을 한다. 그는 북한으로 가면 자신의 전략과 김달삼의 강경전략의 실패를 중앙당에서 판단해주고 자신의 정치적 권력이 복원될 것으로 기대했다. 해주에서 전문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리고 예상과는 달리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은 모두 대의원으로 선출되지만 유일하게 조몽구는 대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한다. 그 모든 건 그의 온건한 정치적 성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몽구는 정치적으로 위치를 가지지 못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농민지도원으로 일하였다. 물론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다시 제주로 어두운 밤 서해안으로 혼자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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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트머리국제마을영화제 집행위원장 -생활인과 공동창작 ,탈상업적 상상력의 대중창작시대 돌로 영화만들기 저자.현재 5060영화제작단 ,부산국제마을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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