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만 원짜리 카시오가 롤렉스보다 부러운 순간
지난 6월 국내 첫 카시오 플래그십 스토어 '카시오 스토어 도산'의 개점 1주년 행사에 배우 정해인과 황인엽, 트와이스 나연이 포토월에 섰다. 학창 시절 시험장 바카라상 위에 올려 두던 디지털시계 브랜드가 스타들을 불러 모았다.
일본에서 '저렴한 카시오'를 뜻하는 '치프카시오(チープカシオ)'라 불리던 시계는 젊은 층의 레트로 패션으로 돌아왔고, 손목시계는 콜롬비아 출신 팝스타 J 발빈의 손가락 위 반지가 됐다. 급기야 태국에서는 8만 원짜리 카시오가 총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새로운 지위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계산기로 이름을 알린 카시오는 1983년 내놓은 지샥(G-SHOCK)을 성공시켰지만, 스마트폰 시대를 거치며 외형은 크게 줄었다. 2018년에는 디지털카메라 사업에서 철수했고, 2008년 3월 결산 때 6230억 엔(약 5조 7000억 원)이던 연 매출은 올해 3월 결산에서 약 2760억 엔(약 2조 5000억 원)으로 절반 아래로 줄었다. 한때 전자제품의 기능으로 성장한 회사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기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누틴 찬위라꾼 태국 총리는 60달러(약 8만 원)가 안 되는 카시오 디지털시계 AE-1200WH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장관과 고위 관료, 정치적 동맹에게 건넸다. 정부는 정치적 신호가 아니라고 했지만, 시계를 찬 이들은 현지 정계에서 '카시오 커넥션'으로 불린다.
아이러니는 총리 본인이 고급 시계 22개, 신고가액 6000만 바트(약 25억 원) 어치를 가진 명품 시계 수집가라는 데 있다. 비싼 시계는 무엇을 가졌는지 보여 주지만, 총리가 건넨 카시오는 누구와 이어져 있는지 보여 준다. 왜 하필 카시오였을까. 장관과 고위 관료, 정치적 동맹의 손목에 같은 시계가 등장하면서 대중적인 AE-1200WH는 권력과의 거리를 보여 주는 표식이 됐다. 누구나 살 수는 있었지만, 누구나 받을 수는 없었다. 제품은 흔했지만 관계는 희소했다.
카시오 안에서도 서열이 뒤집히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저가 브랜드 '카시오워치'가 올해 3월 결산에서 간판 브랜드 지샥의 매출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수십 년 전 디지털 디자인이 여성과 젊은 소비자의 패션 아이템으로 돌아왔다.
역설적이게도 스마트워치의 확산은 카시오에 다른 자리를 열어 줬다. 정확한 시간은 스마트폰이 알려 주고, 심박수와 운동 기록은 애플워치와 갤럭시 워치가 챙긴다. 시간을 확인하는 기능의 비중이 줄자 디자인과 취향이 구매 이유가 됐다. 같은 기간 카시오의 시계 매출은 18.8% 늘었고, 영업이익률은 14.7%로 3년 만에 가장 높았다.
2024년 12월 처음 선보인 반지 시계는 출시 직후 품절될 만큼 관심을 모았다. 지난 6월에는 J 발빈과 손잡고 금빛 반지 시계를 내놨다. 금색 벽돌 무늬 위에 라인스톤을 얹고, 뒷면에는 J 발빈을 상징하는 꽃을 새겼다. 미국 판매가는 200달러(약 27만 원)이고, 일본에서는 추첨으로 팔았다.
스톱워치까지 갖췄지만 반지 시계의 매력은 정확한 시간보다 보여 주는 방식에 있다. 손목에서 손가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시계의 역할도 계측기에서 장신구로 넓어졌다.
카시오의 부활을 레트로의 귀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변화의 폭이 크다. 명품은 높은 가격과 제한된 공급으로 희소성을 만든다. 카시오는 반대다. 누구나 살 수 있고 비슷한 모델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평범함은 오히려 선택의 여지를 넓힌다. 오래된 디자인을 일부러 찾고,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모델을 고르고, 누군가에게 선물한다. J 발빈은 카시오에 자신의 미학을 입혔고, 아누틴 총리는 이름을 새겨 관계의 표식으로 만들었다. 명품이 제품의 희소성으로 소유자를 구별한다면, 카시오는 선택의 이유로 사람을 구별한다.
물건에 가장 오래 남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관계다. 첫 월급으로 어머니께 선물한 시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낡은 시계, 몇 대째 내려오는 반지. 가격표는 사라져도 누가 건넸는지는 남는다.
2024년 1월 캔자스시티 치프스가 미국프로풋볼(NFL) AFC 챔피언십에서 승리한 날, 관중석의 테일러 스위프트 손목에서 ‘TNT’ 세 글자가 반짝였다. 트래비스와 테일러의 머리글자다. 연인이던 트래비스 켈시가 펜실베이니아주의 주얼리 업체 위브(Wove)에 주문해 건넨 다이아몬드 팔찌였다. 켈시는 자신이 찰 짝도 주문했다. 위브 측에 따르면 이후 2주간 매출은 약 2000% 증가했다.
전통적인 스타 마케팅은 '누가 착용했는가'를 물었다. 카시오 커넥션과 위브는 질문을 바꾼다. 누가 건넸는가. 그리고 누구에게 건넸는가. 착용한 사람은 제품에 이미지를 입히지만, 주고받는 사람은 제품에 관계를 더한다.
브랜드에 남는 질문도 바뀐다. '누가 우리 제품을 갖고 싶어 할까'에서 '누가 누구에게 우리 제품을 건네고 싶어 할까'로. 이름과 날짜를 새길 자리, 둘만 아는 기호, 함께 나눠 찰 수 있는 한 쌍은 단순한 맞춤 제작이 아니라 소비자가 관계를 담는 그릇이다.
카시오는 '카시오 커넥션'을 기획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한때 정확한 시간을 대중화했던 카시오는 이제 누구나 자기만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시계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가격은 브랜드가 매기지만, 의미는 건네는 사람이 새긴다.
참고 자료: Bloomberg · The Star · Nikkei · CASIO · WatchPro · Investing.com · WatchesbySJX · PetaPixel · 아주경제 · 한국경제 · 톱스타뉴스 · PR Newswire · TechRadar · NPR · NBC News · 6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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