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흰 티 전문점 ‘#FFFFFFT’ 10년
흰 티셔츠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까다로운 옷이다. 청바지에 흰 티 한 장만 걸쳤는데도 지수와 노윤서가 돋보이는 이유가 지면에 오르고, 여름이면 코르티스 성현의 흰 반팔티 차림이 패션지의 스타일링 본보기로 소개된다. 같은 흰 티라도 입는 사람과 고르는 눈에 따라 전혀 다른 옷이 된다. 도쿄에는 흰 티의 차이만 10년째 파는 가게가 있다.
하라주쿠 인근 센다가야 골목의 작은 가게는 일주일에 이틀만 문을 연다. 토요일과 일요일 낮 몇 시간이 전부다. 온라인 판매도 광고도 없다. 진열대에는 흰색 무지 티셔츠만 걸려 있다. 그런데도 주말이면 일본 각지와 해외에서 손님이 찾아온다. 올해 4월 개점 10주년을 맞은 흰 티셔츠 전문점 ‘#FFFFFFT(시로티)’ 이야기다.
옷장마다 몇 장씩 있고 동네 마트에서도 파는 옷을 사려고 일부러 먼 길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나쓰메 다쿠야 대표는 아무도 채우지 않은 빈자리에서 출발했다. 흰 티셔츠만 모아 파는 가게는 왜 없을까.
나쓰메 대표는 광고회사 하쿠호도에서 마케터로 일했다. 20대부터 거의 매일 흰 티셔츠를 입었고, 모은 것만 수백 장이다. 스스로를 '흰 티 헌터'라 부르며 2016년 4월 센다가야에 가게를 냈다. 상호에도 계산이 깔려 있다. 웹에서 흰색을 가리키는 색상 코드 ‘#FFFFFF’ 뒤에 티셔츠의 ‘T’를 붙였고, 일본어로 흰 티를 뜻하는 '시로티'로 읽는다. 무엇을 어떤 색으로 파는지가 이름 하나에 담겼다.
편집숍은 보통 여러 품목을 두루 갖춘다. #FFFFFFT는 품목을 하나로 줄이고 깊이를 파고들었다. 미국 대중 브랜드 프루트오브더룸 옆에 영국 고급 브랜드 선스펠이 걸리고, 일본 소규모 브랜드의 제품과 빈티지가 뒤를 잇는다. 10년 동안 가게를 거쳐 간 흰 티셔츠는 500종이 넘는다.
색도 같고 품목도 같으니 손님의 눈은 다른 데로 간다. 원단이 얼마나 두툼한지, 목둘레를 어떻게 마감했는지, 어깨선이 어디서 떨어지는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만들었는지. 평소라면 지나쳤을 차이가 나란히 걸린 옷들 사이에서 또렷해진다. 손님이 들고나가는 건 티셔츠 한 장이지만, 정작 값을 치르는 대상은 옷감과 마감의 차이를 짚어 주는 안목이다.
새 상품을 만든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아는 옷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했을 뿐이다. 낯선 개념을 소비자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진입 비용도 낮다. '흰 티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통념을 깨는 것만으로 고를 이유가 생겼다.
유통업의 상식으로 보면 #FFFFFFT의 운영 방식은 비효율의 전형이다. 영업일을 늘리고 온라인몰만 열어도 매출은 늘 것이다. 그래도 가게는 10년 내내 주말 대면 판매를 고집했다.
주말 대면 판매는 손님의 경험을 바꿨다. 주말에만 여니 날을 잡아가야 한다. 인터넷으로 살 수 없으니 직접 만져 보고 입어 보고 설명을 들어야 한다. 티셔츠 한 장을 사는 일이 작은 여행이 된다. 도쿄를 찾는 패션 애호가들의 방문 목록에 가게 이름이 오르는 까닭이다. 나쓰메 대표는 흰 티셔츠를 두고 "극도로 단순해서 오히려 깊다"고 했다. 가게를 꾸려 온 방식도 다르지 않다.
2020년 운영사 시텐(shiten)을 세운 뒤로는 협업과 별주 제작으로 영역을 넓혔다. 2021년엔 일본 배우 요시다 에이사쿠의 스타일을 본뜬 흰 티를 함께 내놨고, 검은 무지 티셔츠만 다루는 자매점 ‘#000T(쿠로티)’도 냈다. 2023년부터는 자체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청바지에 받쳐 입는 흰 티, 재킷 안에 입는 드레스 티, 군용 빈티지를 본뜬 두 장 묶음이 차례로 나왔다.
올해 4월 선보인 10주년 기념작 ‘#FFFFFFT_LUX’는 2만 900엔(약 19만 원)이다. 최고급 면으로 꼽히는 미국산 시아일랜드 코튼을 일본에서도 귀해진 편직기로 짰다. 남의 흰 티를 골라 걸던 가게가 쌓아 온 안목으로 직접 답안을 써낸 셈이다. 매장에는 대중 브랜드 제품과 2만 엔이 넘는 자체 상품이 한 벽에 나란히 걸린다. 브랜드의 급이나 가격표는 기준이 아니다. 좋은 흰 티냐, 아니냐 하나뿐이다.
한 가지를 붙들고 끝까지 간 브랜드는 다른 나라에도 있다. 프랑스의 부리엔 파리 X(Bourrienne Paris X)는 남성용 흰 셔츠 한 가지를 칼라와 소매, 원단, 옛 디테일로 변주한다. 디자이너 세실 포셰르는 자사의 흰 셔츠를 여성의 '리틀 블랙 드레스'에 빗댄다. 인도의 킹덤 오브 화이트(Kingdom of White)는 셔츠와 바지, 액세서리까지 전부 흰색으로 만든다. 색은 하나로 묶되 품목은 넓힌 경우다.
검은색만 쓰는 브랜드는 생각보다 많다. 2017년 출발한 프랑스 브랜드 블랙 파리(Blvck Paris)는 옷과 가죽 소품, 액세서리를 모두 검게 만든다. 2016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시작한 바그(VAGUE)는 남녀 구분 없는 옷을 검은색으로만 낸다. 색이 하나뿐이면 보는 사람은 형태와 소재를 더 꼼꼼히 따지게 된다. 색을 덜어낸 자리에 다른 차이가 들어선다. #FFFFFFT의 흰 티 500종이 하나하나 다르게 보이는 것도 같은 이치다.
반대편에는 유니클로가 있다. 잘 만든 기본 옷을 대량 생산과 낮은 가격으로 퍼뜨린다. 모회사 패스트리테일링은 지난 8월 끝난 2026회계연도에 매출 3조 9600억 엔(약 36조 원), 영업이익 7431억 엔(약 7조 원)을 올려 5년 연속 최대 실적을 냈다. 유니클로가 기본 옷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닿게 하느냐로 승부한다면, #FFFFFFT는 흰 티 한 장을 얼마나 깊이 보여 주느냐로 승부한다.
매출로 따지면 #FFFFFFT는 유니클로와 견줄 상대가 못 된다. 비상장사라 실적도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흰 티셔츠라는 좁은 영역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됐다. 가게가 쌓은 진짜 자산은 재고가 아니라 "흰 티라면 저 집"이라는 평판이다.
가짓수를 줄이자 전문성이 쌓였고, 전문성이 쌓이자 줄인 가짓수 안에서 고를 거리가 오히려 늘었다. 브랜드를 키우려면 품목과 색, 카테고리를 늘려야 한다는 믿음은 여전히 강하다. #FFFFFFT는 진열대를 넓히는 대신 안목을 깊게 했다. 깊이를 판 곳은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시장이라 부르지 않던 자리였다. 흰 티 하나만 남기자 미세한 차이가 상품이 됐다.
차이가 없어 보이는 상품일수록, 차이를 보여 주는 쪽이 브랜드가 된다.
참고 자료: PR TIMES · President Online · Time Out Tokyo · FASHIONSNAP · ELLE Korea · Esquire Korea · Wallpaper · Indian Retailer · Fashion Model Directory · KALTBLUT · FashionUn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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