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꺼내 놓을수록 자란다

아이디어는 머릿속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에서 자란다

by장서우

빈 화면에서 생각을 시작하다


앞 장에서 우리는 사용자의 공감을 통해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누구의 문제이며, 무엇이 필요한지에 집중하며 답이 없는 '문제'를 정의하는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보았다. 이제, 해결의 다이아몬드를 열 차례다.


디자인 사고는 문제를 정의한 뒤 해결의 아이디어를 넓히는 단계로 이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를 많이 모으는 일 자체가 아니다. 앞에서 정의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여러 해법의 가능성을 확산하는 일이다.


이때 아이디어를 넓히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어릴때부터 접해온 브레인스토밍으로 아이디어를 찾을 수도 있고, 다양한 사람의 의견을 모아가며 가장 적합한 해결 방법을 도출할 수도 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질문을 다른 박스로 옮겨 관점을 바꾸고, 나와 다른 경험을 지닌 사람과 함께 생각하는 것 역시 확산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스케치는 아이디어를 확산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다.


스케치는 아이디어를 말로만 나열하지 않고 조금 더 구체적인 해결의 형태로 바로 꺼내 보는 일이다. 디자이너가 여러 스케치를 그리며 생각하는 방식과 가깝다. 내가 데이터 분석을 할 때도, 보고 자료나 발표 자료를 만들어야 할 때도 가장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보고서나 대시보드의 아이디어를 글로 모두 정리한 뒤 제작에 들어가는 편이 아니다. 발표자료를 만든다면 먼저 PPT를 연다.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듯 빈 슬라이드에 임시 제목을 놓고, 말하고 싶은 내용을 몇 장의 슬라이드로 나누어 흐름을 잡는다. 각 장표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의 큰 흐름을 스크립트로 남겨둔다. 장표마다 필요한 장면이나 차트를 추가하고, 시각물을 배치하다가 설명이나 논리적 흐름이 비어 있는 곳을 발견하면 그 내용을 추가한다. 이야기와 시각물 가운데 어느 하나가 먼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서로를 뒷받침하며 발표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대시보드도 비슷하다. 무엇을 보여 줄지 기획서로 모두 확정한 뒤 화면을 만드는 경우보다, 데이터를 연결하고 여러 측정값을 다양한 차원으로 나누어 차트를 그리면서 방향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놓아 보고, 사용자군을 나누어 보고, 필터를 바꾸어 보면 머릿속에서 생각할 때는 보이지 않던 비교와 예외가 나타난다. 처음 그린 차트가 최종 화면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눈앞에 꺼낸 아이디어에서 또 다른 아이디어가 뻗어 나온다.


다만 이렇게 스케치를 통해 작업이 되는 PPT와 대시보드는 완성품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을 올려놓고 움직여 보는 작업대에 가깝다. 머릿속에서는 그럴듯했던 흐름도 슬라이드 위에 놓으면 근거가 비어 있는 곳이 보이고, 말로는 명확했다고 생각한 요구 사항도 화면으로 옮기면 빠진 부분이 보인다. 무엇보다 '스케치'로 나의 생각을 시각화하면, 나 자신이 내 생각의 구조를 더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생각을 마친 뒤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만들면서 생각이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 왔다.



아이디어는 형태로 꺼낼 때 자란다


어떤 방식으로 얻은 아이디어든 눈으로 보고 움직일 수 있는 형태로 빠르게 꺼내면 다시 생각의 재료가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림 실력이 아니라, 아직 모호한 생각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화하는 일이다.


pexels-picjumbo-com-55570-196645.jpg스케치는 완성된 생각을 보여 주는 그림이 아니라, 다음 생각을 만드는 재료다


스탠퍼드 디스쿨은 '빠르게 실험하기'를 아이디어를 글로 쓰거나 그리거나 직접 만들며 빠르게 생성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아이디어 탐험 도구인 'Idea Expedition'에서도 스케치를 브레인스토밍, 유추 발상, 몸으로 해 보는 발상과 함께 아이디어 생성 방법으로 놓는다. 이어서 '아이디어 대시보드'에 무엇을, 누가 어떻게, 왜 만드는지를 적고 직접 그려 보게 한다. 이 구조에서 스케치는 완성된 생각을 예쁘게 보여 주는 장식이 아니라, 생각을 만들고 구체화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시각화는 반드시 그림을 뜻하지 않는다. 결과물이 글이라면 문장과 문단, 제목과 목차가 곧 스케치가 된다. 매뉴얼이나 백서, 바카라을 쓴다면 핵심 문장과 임시 소제목을 실제 원고처럼 놓고 순서를 바꾸어 본다. 발표자료라면 슬라이드로, 대시보드라면 차트와 화면으로 생각을 꺼낸다.


최종 결과물에 가까워야 하는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형식이다. 아이디어가 실제로 작동할 매체에 놓이면 여러 요소의 순서와 관계, 크기와 거리를 함께 비교할 수 있다. 상자 안의 퍼즐 조각을 말로만 설명하는 것과 테이블 위에 직접 펼쳐 놓는 것의 차이와 비슷하다. 눈앞에 놓이면 빠진 조각과 다른 조합이 보인다.


완벽한 기획이나 완성된 문장이 생기기 전이라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형태로 꺼낸다. 슬라이드의 순서를 바꾸다가 더 적합한 설명 방식이 떠올랐고, 차트의 축을 바꾸다가 다른 비교 기준을 발견했다. 아이디어를 모두 낸 뒤 형태로 옮긴 것이 아니라, 형태를 만들며 아이디어를 낸 셈이다.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만든 시각물이 실제 개발로 이어질 수는 있다. 그렇다고 처음 만든 형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이 단계의 결과물은 빠르게 만들고 버리는 것보다, 빠르게 바꾸고 다시 조합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좋은 결과물'을 머릿속에서 완성하려 애쓰기보다, 서로 다른 가능성을 여러 형태로 꺼내 나란히 비교하는 편이 낫다.


시각물의 가치는 단순히 보인다는 데 있지 않다. 선택지를 비교하고 더 나은 방향을 고르게 한다는 데 있다. 같은 메시지도 숫자로 시작하는 슬라이드와 사용자의 장면으로 시작하는 슬라이드에 각각 놓아 보고, 같은 데이터도 선과 막대와 표로 바꾸어 보면 각 선택이 만드는 차이가 눈앞에 드러난다. 머릿속의 선택지는 쉽게 섞이지만, 밖에 꺼낸 선택지는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다.



분석가 이야기 3 - 옴니채널의 가능성을 화면 위에 놓다


다시 앞 장의 커머스 분석가로 돌아가자. 온라인팀의 맥락을 살펴 문제를 다시 정의한 그에게는 질문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오프라인 매장에서 시작된 고객 경험을 온라인 가입과 앱 이용, 구매로 이어 갈 수 있을까?


분석가는 온라인팀과 매장운영팀이 논의하던 방안을 함께 펼쳐 보았다. 매장에서 본 상품을 앱에서 다시 찾게 할 수도 있고, 구매 후 온라인에서 사용할 혜택을 안내할 수도 있었다. 매장 안의 QR을 통해 온라인 가입과 앱 이용을 안내하는 방법도 후보였다. 두 팀은 기존 가입 경로를 활용해 일부 매장에서 작게 시작할 수 있는 QR 안내안을 먼저 시험해 보기로 했다. 고객이 실제로 가입하고 다시 앱을 찾을지는 아직 확인해야 했다.


실행 후보를 고르자 분석가가 도울 일도 구체적으로 보였다. 온라인팀은 어느 매장에서 시작할지 고르고, 운영 뒤에는 가입과 앱 이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 다음 행동을 정해야 했다. 매장과 기간, 고객군을 바꾸어 반복해서 비교할 일이었다. 분석가는 이 판단을 돕는 대시보드를 구상했다.


이때 분석가는 화면 기획서를 먼저 완성하지 않는다. 바로 대시보드 개발 도구를 열고 기존 데이터로 매장별 고객 규모와 온라인 이용 현황을 차트로 꺼낸다. 시범 운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QR 참여나 운영 뒤의 가입과 재방문 결과는 없었다. 그 부분은 빈 차트와 임시 제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무엇을 이미 알고 있고 무엇을 앞으로 채워야 하는지도 화면 위에서 구분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기존 매장 고객 중 온라인에도 가입한 회원 수를 매장별로 나란히 놓았다. 그러자 고객이 많은 매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고객 규모를 함께 놓고 비율로 바꾸자 질문이 달라졌다. 가입 수가 많은 매장과 온라인을 아직 이용하지 않는 고객의 비중이 큰 매장은 같지 않을 수 있었다. 어느 쪽에 먼저 기회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두 비교를 오가게 했다.


가입 뒤의 흐름도 그려 보았다. QR 참여, 온라인 가입, 앱 재방문, 구매를 차례로 놓자 가입 수 하나만으로는 알 수 없는 질문이 생겼다. 가입은 했지만 다시 앱을 찾지 않는다면 어디를 바꿔야 할까. 분석가는 전체 수치를 보여 주는 화면 옆에 고객이 어느 단계에서 멈추는지 볼 수 있는 화면을 더했다. 이 과정에서 연결되는 질문도 다양하게 늘어났다.


시범 운영 전후를 비교할 자리만 만들었다가, 같은 기간 다른 매장도 함께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 매장 옆에 비슷한 조건의 비교 매장을 놓을 자리를 더했다. 매장별 결과를 나란히 비교할 구성을 잡다 보니 현장에서 안내를 얼마나 했는지도 함께 알아야 했다. 화면을 채우려면 매장을 구분할 QR과 참여 기록, 가입 이후 행동을 연결할 수 있는 회원 기록, 매장별 실행 기록이 필요했다. 차트의 빈자리가 앞으로 준비할 데이터의 조건을 드러냈다.


아직은 스케치다. 실제 이 화면이 온라인팀의 판단을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른다. 다만 화면을 만들며 생각을 데이터와 구조에 대조하자, 머릿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비교와 조건, 다음 아이디어가 드러났다. 대시보드는 결과를 담을 그릇이면서 아직 정하지 못한 분석을 눈앞에 놓는 작업대가 되었다.


분석가는 세 가지 기준으로 첫 화면의 범위를 좁혔다. 온라인팀이 마주한 문제와 질문들에 도움이 되는가. 가장 불확실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가. 현재의 데이터와 일정으로 만들 수 있는가. 우선 기존 데이터로 시범 매장 후보를 비교하고, 운영 뒤에는 매장에 따른 변화를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QR 참여에서 가입과 앱 재방문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세부 화면에 두었다. 아직 없는 결과는 비워 둔 채, 먼저 이 구성이 판단에 도움이 되는지 시험할 준비를 했다.



아이디어를 빠르게 꺼내는 기반을 쌓다


아이디어를 빠르게 형태로 꺼낸다고 해서 대충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다양한 스케치와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가 최종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스케치한 결과물을 최종 작업물로 활용하기 어려운 형태나 구조라면 그 뒤의 시간이 다시 반복된다.


이때 도움이 되는 것이 레퍼런스와 템플릿, 컴포넌트다. 레퍼런스는 문제를 어떤 형태로 풀었는지 보여 주는 사례이고, 템플릿은 반복해서 사용하는 결과물의 기본 골격이다. 컴포넌트(Component)는 버튼과 카드, 차트 영역처럼 일정한 역할과 기본 형태를 갖고, 레고 블록처럼 여러 결과물에서 다시 조합하거나 교체할 수 있게 만든 단위다. 컴포넌트가 있으면 화면 전체를 다시 그리지 않고도 일부를 바꾸어 다른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


문제 해결의 경험이 쌓일수록 꺼내 쓸 수 있는 형태의 어휘도 늘어난다. 과거에 만든 발표자료의 흐름과 문장, 대시보드의 구성과 화면도 새로운 조건에 맞게 다시 조합할 수 있다. 같은 데이터를 표와 차트로 각각 표현하고, 같은 메시지를 숫자와 사용자의 장면에서 각각 시작해 보며 형태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을수록 확산도 빨라진다. 처음에는 빈 화면에서 시작하지만, 경험이 쌓인 뒤에는 축적한 재료 사이에서 시작한다. 문제 해결을 거듭할수록 형태를 통한 아이디어 확산이 쉬워지는 이유다.


레퍼런스를 모으는 일도 보기 좋은 화면을 저장하는 데서 끝내지 않는다. 그 형태가 무엇을 비교하고, 변화와 우선순위, 과정과 결론 가운데 무엇을 보여 주는지 함께 기억해 둔다. 그래야 새로운 문제를 만났을 때 겉모양을 따라 하는 대신, 필요한 역할에 맞는 구조를 꺼내 다시 조합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사례만 레퍼런스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과거에 만든 자료도 다시 활용할 수 있는 레퍼런스다. 이렇게 모은 사례와 작업물을 AI에 함께 제공하면, 말로만 설명할 때보다 원하는 구조와 표현 방식을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형태를 빠르게 스케치하는 데 능숙할수록 여러 아이디어를 더 쉽게 펼쳐 볼 수 있다. 이때 소프트웨어와 AI는 생각을 형태로 꺼내는 나의 무기가 된다. 발표자료, 디자인, 대시보드 제작 도구에 익숙하면 나의 생각이 형태를 갖추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줄어든다. AI를 활용하면 초안과 변형을 더 빠르게 만들고, 기존 재료를 새로운 조건에 맞게 조합해 볼 수 있다. 손이 빠르다는 것은 단순히 제작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디어가 사라지기 전에 꺼내고 다른 형태와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기반이다.


물론 도구를 잘 다룬다고 좋은 판단까지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연주자가 악기에 능숙하다고 좋은 음악이 자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다만 도구에 익숙할수록 문제에 맞는 형태를 빠르게 고르고, 기존 템플릿이 맞지 않으면 해체해 다시 조합할 수 있다. 레퍼런스와 템플릿, 컴포넌트는 답을 대신하는 틀이 아니라 더 많은 답을 빠르게 만들어 보는 출발점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디어와 형태는 번갈아 나타난다. 생각이 형태를 만들고, 형태가 다시 생각을 넓힌다. 해결의 다이아몬드는 그렇게 열린다.


이제 답이 없는 문제를 풀기 위해 문제를 정의하고, 가능한 답을 여러 형태로 스케치했다. 그러나 생각을 눈앞에 꺼냈다고 아직 답이 된 것은 아니다. 나란히 놓은 차트가 실제로 판단을 더 쉽게 만드는지, 슬라이드의 흐름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잘 설명하는지는 만든 사람의 확신만으로 알 수 없다. 남은 일은 선택한 생각을 다른 사람이 경험하고 반응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으로 발전시켜 검증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스케치가 프로토타입이 되는 순간을 살펴본다. 이어지는 테스트에서는 만든 것으로 배우고 판단하며 해결의 다이아몬드를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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