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 않은 곳에서 닿은 인연

by최이삭


#22.


다시 일에 치여가며 한 주를 시작했다. 새벽부터 정신없이 일을 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잠시 의자에 기대 쉬는데,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어라? 설마..’


순간적으로 느낌이 이상해서 휴대폰 사진첩을 빠르게 뒤적였다. 그리고 몇 달 전으로 돌아가 성당에서 피정을 다녀왔을 때 찍은 조원들의 단체 사진을 찾았다. 사진을 확대해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역시 익숙한 얼굴이 있다. 상은의 엄마였다.


1조와 2조 조원들 함께 찍은 기념사진 한 장.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상은의 엄마가 함께 있었다.


살다 보면 혈연도 학연도 어떠한 인연도 없는 누군가에게 그냥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상은의 엄마 얼굴을 볼 때 낯설지가 않았다. 별들의 집에서 봤을 때의 그 미소 때문이었을까. 걷기 행사에 다가와 말을 걸어줄 때였을까.


‘따뜻한 분이시네. 인상이 참 좋다.’ 하면서도 볼 때마다 얼굴이 마음에 남았다. 아마 기사에서 자주 봤을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낯이 익은 줄로만 알았다.


머릿속에서 곳곳에 떨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는 것 같았다. 같이 앞자리에 앉아 교리 수업을 듣던, 신부님 질문에 또랑또랑 답하던 여인. 피정에서 마주쳤던 중년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상은의 엄마였구나.


‘아..!’


잠시 뒤, 또 탄식이 나왔다. 보충 수업에서 본 그 중년의 남자는 상은의 아빠였구나!


‘아, 왜 진작 알아보지를 못했을까.. 알았다면 말이라도 걸어 봤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전에 보았던 중년 여인의 어두웠던 얼굴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 23.



바람이 차가워지더니 이내 겨울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함께 세례를 받은 교리반 언니들과 넷이서 오랜만에 뭉치기로 했다. 6개월 간 교리 수업을 받으면서 마음 터놓고 가까워지기도 했고, 세례를 함께 받은 동기 지간이라 그런지 참 애틋한 마음이 든다. 슬롯생활하면서 어디가 만나기 힘든 특별한 인연. 암흑 같던 인생의 시기에 찾아온 따뜻한 안식처 같은 사람들.


‘우리 어디에서 만날까요?’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 중간 지점을 고르다 우리는 명동 성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성당 아래 작은 레스토랑이 있는데 그곳이 모임 장소로 적당할 것 같았다.


성당으로 가는 길. 날이 금방 어두워지고 찬바람도 부는데 속이 따땃하다. 30대 중후반이라는 나이 먹고 내가 막내일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지금으로는 이곳이 유일할 것 같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레스토랑에 들어가니 지민 언니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뒤이어 수미 언니도, 주희 언니도 차례로 도착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실컷 시켰고 이어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바빴다.


주희 언니는 세례를 받은 이후로 기도도 미사도 더욱더 열심히 한다고 했다. 언니의 마음과 성실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 보이는 곳에서 언니가 어떻게 하고 있을지가 눈에 훤히 그려졌다. 지민 언니는 성당에서 봉사를 권유받아 주일마다 안내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언니의 차분함과 선함에 반한 성당 교리 봉사자들이 진작부터 언니를 콕 찜해두는 걸 본 적 있었다.


나도 언니처럼 어딘가에 잘 쓰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부할 단체 몇 곳과 봉사할 수 있는 곳을 리스트업 해뒀었는데, 수미 언니가 그것에 큰 관심을 가졌다. 수미 언니는 우리 중 가장 기도문 외우기 숙제를 빨리하고, 필사 숙제도 빨리하고 과제를 가장 먼저 끝냈던 사람이다. 간호사로 3교대도 하면서 보충 수업을 꼬박꼬박 챙겨 나왔다. 스케줄이 빡빡하고 체력도 지칠 텐데, 일주일 중 하루를 내 봉사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니. 정말 멋지고 대단했다.


내 근황을 얘기할 차례가 됐다. 사실 나는 얼마 전 있었던 일들을 언니들을 만나면 모두 말해주고 싶었다. 길고 장황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언니들은 지난 6개월의 과정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줄 것 같아서 만나자마자 다 쏟아내고 싶었다.


“제가 이전에 이태원 참사 시민 프로젝트로 글쓰기 한다고 했잖아요.”

“응. 응. 그랬지.”

“지난 10월 내내 계속 글을 쓰고 중간에 유가족들과 걷는 행사도 참여하고, 2주기 추모제도 다녀왔거든요. 안 해본 일들이라 어색한데. 마음이 참 편하지 뭐예요. 그런데, 제가 유가족 중 어떤 부모님을 만나게 됐는데. 그분들이 내년 3월에 명동 성당에서 함께 세례를 받으신다는 거예요. 따님이 성당에서 결혼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명동 성당에서 교리 수업을 듣던 중에 참사가 나서.. 그래서 두 분이 딸 대신 세례를 받고 혼례 성사 올리신대요. 그런데, 그분들의 따님이 조인기 신부님이 장례 미사를 해줬다는 그분 같더라고요. 우리 나눔 시간에 엘리사벳 봉사자님이 말씀해 주셨던 그분이요.”


주희 언니와 수미 언니가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중 지민 언니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저희랑 같이 수업을 들으셨지 뭐예요? 피정도 같이 가고요. 사진을 보니 저희랑 같은 교리반이시더라고요.”

“어머. 그랬구나.”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민 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 알고 있었어.”


“아니, 언니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우리 언니랑 어머니가 같은 조라 얘기를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는데, 조심스러워서 말을 할 수가 없더라고...”

“제가 그때 글을 쓴다고 했을 때도, 언니는 다 알고 계셨어요?”

“응.. 그분 우리 수업 들을 때 오른쪽 앞에 앉으셔서 수업 들으셨잖아.”


사람 인연이라는 게 이렇게나 묘한 것인가. 순간 몸에 ‘찌릿’하고 전기 같은 게 오는 게 느껴졌다. 또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어깨 주변에 휘감기는 것 같았다.


“어머, 진짜 신기한 인연이다.” 언니들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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