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그 경계를 허물기

by최이삭


#16.


다시 경복궁 길을 따라 걷는 길. 나와 한별이, 선영이 옆으로 유가족 분들이 다가오셨다.


자기소개를 하기 전엔 먼저 말을 걸면, 경계하는 듯한 눈빛과 낯설음에 불편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분들도 계셨었다. 마치 서로에게 두꺼운 벽이 있는 것처럼. 그런데, 자기소개를 한 뒤로 달랐다. 편하게 먼저 다가오셔서 ‘글 쓰는 곳이 뭐 하는 곳이냐’, ‘어떤 글을 쓰는 거냐’,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느냐.’ 물어보셨다.


며칠 전,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를 할 때 본, 보라 팔찌 공작소에서 팔찌 만들기를 가르쳐주던 어머니도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나와 한별이를 빤히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짓던 분이었다. 작고 아담한 체구에 웃는 인상이 무척이나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어디에서 어떤 글을 쓰는지 이미현 실장이 유가족 단톡방에 공유해 준 것을 이미 봤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나는 그것이 좋았다. 대화하며 걷다가 나는 내 오른팔에 찬 보라색 팔찌를 그녀에게 휙하고 보여주었다. 그리곤 “매듭이 자꾸 풀려요~ A/S 좀 해주세요!” 하고 웃으며 투정을 부렸다.


세종문화회관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더 같이 걷고 싶은데 조금 아쉽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했다.


날이 좋아서인지 광화문 광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옆에서 대화하며 걷던 어머니가 어느새 그들에게 가 리본과 팔찌를 바쁘게 나눠주는 모습을 보았다. “이태원 참사 추모하는 리본하고 팔찌에요. 받아 가세요.” 하고 젊은 청년들에게 내밀자 그들은 "네! 주세요!" 하며 흔쾌히 받아 들었다.


어째서인지 나는 보라색 조끼를 입고 열심히 팔찌와 리본을 나눠주는 그 작고 아담한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17.


최종 목적지 세종문화회관에 도착해 넓은 층계단을 의자 삼아서 다시 모여 앉았다. 우리 셋도 뒷줄에 나란히 앉아 유가족들이 나눠주시는 김밥을 한 줄씩 받았다. 맛있게 김밥을 먹고 있는데 유가족 중 한 분이 선영이에게 다가와 흑삼 진액을 몇 개를 손에 쥐어 주었다.


"이거 친구들하고, 같이 나눠 먹어."


얼굴을 보니 아까 자기 소개할 때 내 눈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던 남성이었다. 선영이는 그가 자신의 온라인 게임 선배라고 했고, 그리고 그가 참사 유가족인 것을 오늘 처음 알게 됐다고 말해줬다.


머리 속에 한 장면이 스쳐갔다. 나는 오늘로부터 한 해 전에 선영이가 일하는 방송사에서 근무한 적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한 뉴스 프로그램에서 일하면서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은 날 이정민 위원장을 인터뷰 했었다.

당시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같이 일하는 앵커와 CP가 조용히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00님의 조카도.. 그때 사고를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바로 00님이 오늘 만난 이 분 이었던 것이다. 막연히 멀고 먼 남의 일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세상은 이렇게나 좁았다.


마지막으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됐다.


“이 자리에 000 방송국 라디오 피디님이 와 있다고 합니다. 어디 계세요. 앞으로 좀 나와주세요~” 이미 자기소개를 끝낸 나는 신이 나서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요!”


잠시 부끄러워하던 선영이가 박수를 받으며 성큼 성큼 당찬 걸음으로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마이크를 잡자마자 멋지게 말하기 시작했다.


선영이가 했던 말을 지금은 다 기억할 수 없지만, 진심을 담은 메시지가 너무 좋았기에 듣는 나는 유가족들이 힘을 얻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선영이의 그 작은 체구 주변으로 크고 밝은 아우라가 번지는 것 같았다. 멋지게 자기소개를 마친 그녀를 향해 유가족과 시민들, 그리고 나와 한별이가 크게 박수를 쳐주었다.


해산 시간이 됐다. 이정민 위원장에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 가려는데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보라색 옷을 입은 걸 보니 그도 유가족 중 한 사람이었다.


“저기.. 아까 말한 그 글을 어디 가면 볼 수 있습니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이미현 실장님이 홈페이지 링크를 단톡방에 공유하셨다고 하셨는데요.,” 설명하려는 찰나, 작고 아담한 그 어머니가 다가왔다. “아휴, 아니야. 아니야. 내가 알려줄게. 얼른들 들어가요.” 하고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웃으며 배웅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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