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리스트

어? 하나씩 하면 되네.

byChanghee

눈앞이 침침해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점점 심해지더니, 언젠가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노안이 시작됐다는 얘기를 들은 게 4, 5년 전이다. 동네에 새로 생긴 안과의 최첨단 장비로 수십만 원을 들여 검사를 받았다.

2년에 한 번씩 받는 건강검진 소견에는 황변성 어쩌고 하는 말이 적혀 있었다.

실명이나 녹내장 가능성이 있으니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다시 수십만 원을 들여 온갖 검사를 받고 몇 년간 관찰했다.
결과는 매번 비슷했다.

눈동자 안의 그림자 또는 혈관이 그 황변성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
안구건조증이 좀 있고 백내장도 시작될락 말락 하지만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
매일 블루베리를 한 줌씩 챙겨 먹으면서

6개월에 한 번씩 체크해 보자고 했다.


갈 때마다 안과 원장은 자신과 친했던 동창 이름이 나와 같다며 볼때마다 그 얘기를 했다.
별 이상은 없다면서도,
나는 그 안과의 최첨단 기기 값을 뽑아주는 호구가 되어

6개월마다 수십만 원짜리 검사를 계속 받았다.

그러다 이런저런 일로 그 안과를 안 간 지 2년이 지났다.


...호구라도 그 검사를 계속 받았어야 했나?


눈이 유독 불편했던 어느 날은, 이러다 갑자기 실명이 될 수도 있나?

앞이 뿌연 상태로 운전을 하며 불안했다.


...당뇨가 있으면 눈앞이 뿌옇다던데 당뇨는 아닌데?

...하긴 컴퓨터 모니터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으니,

...잠자리에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바카라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어두운 조명 아래서 그러고 있으니,

...인공눈물이 떨어진 지 꽤 됐는데도 안 사서 넣었으니…


그래도 1일 1 당근을 먹고, 여에스더몰에서 구매한 블루베리즙도 꼭 챙겨 먹었는데,

안 먹어도 된다는 루테인 지아잔틴도 한 알씩 꼭 먹었는데,

눈이라도 좋아야 한다는 생각에 남들보다는 신경 썼는데…


그렇게 생각만 이래저래 하며 걱정만 쌓고 있었다.


왼쪽 눈이 더 뿌옇고 뻑뻑한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안과로 달려가야지 하다가도 엄마의 척추 시술 날짜, 입원 날짜, 정기 검진 날짜와 자꾸 겹쳤다. 그렇게 내 안과 검진은 계속 뒤로 밀렸다.


오늘은 꼭 가야지 하고 일어나던 날 아침에 갑자기 무릎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더니 꼬리뼈까지 통증이 심해졌다. 결국 그날도 정형외과부터 갔다.

우선순위에서 내 눈은 계속 밀렸다.


급한 일부터 처리하며 살아오다 보니,

정작 내가 먼저 해야 할 일, 나에게 중요한 일을 할 차례가 되면 늘 시간에 쫓기거나 이미 지쳐서 힘을 낼 수 없었다. 내 할 일만 우선이던 시절에는 인정도 받고 쓰임도 많았는데, 점점 남의 급한 일에 치이다 보니 정작 나 자신은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불안하고, 불안하니까 또 미루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업무 관리를 하듯 내 일상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하루에 하나씩만 하기로 했다.


정형외과 결과는 당일 나왔다. 치료는 치과 치료가 끝난 뒤 4개월 후부터 주사를 맞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제미나이에게 순서를 물었더니, 시간이 덜 걸리는 것부터, 운전에 지장이 덜한 것부터 하라고 알려줬다. 안과는 맨 마지막이었다. 혹시 산동검사라도 하게 되면 이후 일정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루에 병원 세 군데는 무리다 싶어서, 하루에 한 군데씩만 가기로 했다. 그랬더니 2주 만에 정형외과, 치과, 안과 진료를 모두 끝냈다. 시간 날 때 몰아서 해치우려고 했던 일들이, 오히려 여유를 두고 천천히 움직이니 하나씩 해결되고 있다.


아,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어쨌든 뿌옇고 뻑뻑하고 불안하던 내 눈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약간의 안구건조증, 그리고 눈꺼풀 주변에 각질처럼 쌓인 이물질들 — 일종의 노화라고 했다. 의사는 뾰족한 뭔가로 눈썹 문신하듯 눈가를 긁어냈다. 피지 같은 것들이 뿅뿅뿅 빠져나왔다. 현미경 사진으로 보니 딱 눈곱 같았다.


치료를 받고 안약을 처방받아 돌아오는 길,

답답했던 눈이 벌써 나아진 것 같았다.

일주일 후 다시 상태를 확인하러 가면 된다.


치과 어금니의 부서진 인레이도 갈아 끼웠다.
더 큰 임플란트 수술 하나가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빨리 병원을 찾았으면 될 일이었다.


일단 내 눈은 무사하다.

안약을 잘 넣고 관리하면 된다.

25분이면 될 일을 두 달 넘게 불안해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정작 지금 나에게 중요한 일을 또 미루고 있지는 않나?

오늘도 나는 체크리스트를 체크 중이다.

산다는 건 체크리스트에 체크하기일까.

도대체 할 일은 언제쯤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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