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저렇게 늙으면 안 되겠네.
갑자기 잘 쓰던 PC의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
애플스토어 수리 예약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예약시간에 맞춰
오래된 아이맥 27인치를 잘 보관해 두었던 박스에 넣어 차에 싣고 갔다.
의외로 차도 막히지 않았고, 신호도 잘 받았고, 복잡한 거리의 뒷골목에 사람과 관광객들이 엉키는 곳이지만
거슬리는 것 없이 주차장으로 잘 들어갔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기계식 주차장이었지만 안내해 주는 어르신 덕에 깔끔하게 주차를 했다. 이삿짐센터에서나 쓸 법한, 가장 작은 사이즈의 대차를 미리 사서 챙겨 온 참이었다. 아이맥이 든 상자를 내려놓고 그 위에 얹어 놓기까지, 그분은 굳이 나서서 손을 보탰다. 무거운 상자를 번쩍 들어 대차 위에 얹어주고, 장애인용 리프트까지 열어주며 "이거 타고 가세요" 하셨다. 낯선 아저씨의 친절함이 낯설기까지 했다. 요즘 세상에 이런 호의는 좀처럼 만나기 힘드니까. 흰머리가 희끗한 그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인사를 했다.
조심히 대차를 끌며 건물 밖으로 나와 애플스토어 입구로 들어갔다. 바퀴가 작아 덜컹거리긴 했지만, 무거운 상자를 품에 안고 낑낑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두리번거리자 안내 스태프가 예약을 확인했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아이맥 박스를 내려놓고 가만히 기다렸다. 예약한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고, 무거운 걸 들지 않고 대차에 얹어 끌고 온 나의 결정에 스스로 좀 뿌듯했다.
컬러렌즈를 낀 테크니션이 아이패드를 들고 다가왔다. 촌스럽다면 촌스러운 청록색 애플 직원 티셔츠에 버뮤다팬츠 차림인데,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녀가 입으니 오히려 힙해 보였다. 프로페셔널한 자태로 내 아이맥 상자를 촥촥 펼치더니 혼자서 척척 데스크에 올려놓는다.
"이제 27인치는 수리를 못 해 드려요, 정식 매장에서는.
그래서 그동안 고객님 히스토리를 저도 다 확인을 했는데... 어떤 문제일지... 일단 한번 확인해보고 다시 설명드릴게요."
담담하고 정확한 설명이었다. 주차장에서 받은 뜻밖의 친절에, 막힘없이 진행되는 데스크 응대까지 더해져
나는 모처럼 기분이 좋았고 여유롭다고 생각하던 찰나,
"무슨 서비스가 이따위야? 더 소리 질러봐?"
애플스토어 서비스센터. 한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고 있었다.
"내가, 응, 내가 말이야. 이 더운데 시간 맞춰서 왔는데. 뭐라고? 한 시간이면 된다면서? 그래서 10분 전에 왔는데 이제 와서 뭐?"
담당자와 매니저는 매뉴얼대로 차분히 응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 담당자에게는 막말을 쏟아붓던 그 아저씨가, 남자 매니저가 다가와 설명을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쌍소리를 줄였다.
"그럼 설명을 그렇게 하면 될 거 아냐?"
그마저도 큰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나도, 내 담당 테크니션도 가슴이 쿵쾅거릴 만큼 깜짝 놀랐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려온 큰소리. 우렁차기까지 한, 원망과 분노로 긁힌 중년 남자의 천박한 톤이었다.
청심환을 먹어야 하나? 싶을 만큼 심장이 울컥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충격에 한참을 진정해야 했다.
나는 두 아저씨를 번갈아 떠올렸다.
한 분은 묻지도 않은 친절을 베풀고 조용히 돌아섰다.
다른 한 분은 자신이 받아야 할 서비스보다 더 큰 것을,
그러니까 존중을, 목청으로 받아내려 했다.
그런데 그 존중을 목청으로 얻어내는 순간, 정작 자신이 잃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여자 담당자에게 쏟아냈던 막말, 그리고 남자 매니저 앞에서 순식간에 잦아든 태도.
그 대비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그의 그릇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을 뿐이다. 한 분은 주차장에서, 다른 한 분은 서비스센터 로비에서. 그런데 삼십 년 가까이 방송 현장에서 별의별 어른들을 봐온 나에게도, 이 두 장면은 유독 선명하게 남았다. 아마 두 사람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자연히 비교가 되어버리는, 그런 하루였다.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늙어갈까.
누군가 부탁하지 않아도 무거운 상자를 대신 들어주는 사람일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목청부터 높이는 사람일까. 사실 둘 다 내 안에 있다는 걸 안다.
조용히 남을 돕고 싶은 마음도, 억울하고 답답할 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도. 다만 그 갈림길에서 어느 쪽 문을 자주 여느냐가, 결국 그 사람의 나이 든 모습을 만드는 게 아닐까.
친절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그저 습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일 조금씩 연습해야 몸에 붙는, 그런 습관.
반대로 분노도 마찬가지다. 자주 꺼내 쓰면 쓸수록 손에 익어 버린다.
나는 오늘, 조용히 손을 내밀었던 그 어르신 쪽에 서고 싶다는 다짐을 새삼 해본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존중받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 그게 내가 그리는 우리 노년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