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복수

우리는 정말 사적복수를 원하는 걸까.

byChanghee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이 공개 직후 비영어권 TV 부문 글로벌 1위에 올랐다. 공개 첫 주 시청 수는 640만 뷰였고, 입소문을 타며 다음 주에는 2천만 뷰를 넘어섰다. 전 세계 40여 개국 톱 10에 진입했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남미, 중동 여러 나라에서 1위를 기록했다.

한국의 교권 문제를 다룬 드라마에 전 세계가 반응한 것이다.


소위 전문가들은 말한다.

판타지일 뿐이라고.

사적제재나 사적복수는 위험하다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맞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 말이 전부도 아니다.


우리는 사적복수를 다룬 웹툰과 드라마와 영화에 열광한다. 〈모범택시〉, 〈더 글로리〉, 〈범죄도시〉 같은 작품들 속에서 가해자는 법망을 빠져나가기 전에,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피해자를 다시 괴롭히기 전에 응징당한다. 문제 발생과 동시에 응징이 시작되고, 시청자가 답답함을 느끼기도 전에 해소감이 밀려온다.


이른바 ‘K-사이다’ 콘텐츠의 공식이다.

우리는 그 공식에 매번 기꺼이 속는다.


왜일까.


대한민국은 고소와 고발이 많은 슬롯다. 권리의식이 높아졌고, 재산분쟁도 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무조건 참고만 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소장을 넣는다고 해서 곧바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불기소로 끝나는 경우도 많고, 기소가 된다 해도 판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용기를 냈다가 더 큰 상처를 받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절차를 믿었다가 절차 안에서 또 한 번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고소도 고발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욱하고 만다. 팔자려니 하고 넘어간다.

삭히고 삭히다가 병이 들거나, 가장 약한 존재인 가족에게 화를 내거나, 스스로를 해치거나, 끝내 자기 삶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오래전, 꽤 잘 나가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던 때가 있었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작가님, 살다가 딱 한 번, ‘이 새끼는 내가 진짜 죽여야겠다’ 싶은 놈이 생기면 전화 주십시오. 다른 말 필요 없고, 그놈 이름이랑 전화번호만 주면 됩니다.”


나는 오버하며 웃어넘겼다.

“어휴, 그런 놈 많은데요. 한 번밖에 안 돼요?”


농담이었다. 물론 농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마음 한구석이 조금 든든해졌다.


죽이고 싶은 딱 한 놈을 떠올려보았다. 친구들에게도 농담처럼 말했다.

그런데 막상 정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그 정도로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를 실제로 해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완전히 무력하지 않다고 느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사적복수 드라마를 쓰려다 여러 번 포기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경찰이나 형사, 공권력을 무능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영화와 드라마 속 경찰은 늘 주인공보다 늦게 도착한다. 형사는 우왕좌왕하고, 피해자는 끝내 제때 구해지지 못한다. 그래야 주인공이 직접 나설 수 있고, 그래야 사적복수의 명분이 생긴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쓰는 것이 괴로웠다.


현실에서 이미 우리는 공권력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순간들을 겪는다. 급할 때, 무서울 때, 두려울 때 연락했지만 제때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산다. 그런데 내가 쓰는 드라마에서조차 그들을 끝내 무능하게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두 번, 세 번 다시 보게 되는 드라마는 사적복수물이 아니라 경찰이나 형사가 제대로 범죄자를 잡는 이야기다. 검사가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 변호사가 법정에서 끝까지 싸우고, 판사가 상식적인 판결문을 써내는 이야기다.

그런 장면을 볼 때 나는 사적복수보다 더 큰 안정감을 느낀다.


〈참교육〉도 그 지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아예 교육부 장관 산하의 가상 기관을 만들었다.

‘교권보호국’이라는 이름의 공적 장치를 통해 폭력의 판타지를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물론 그것 역시 판타지다. 하지만 이 판타지가 향하는 질문은 현실적이다.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하느라 또다시 망가지지 않으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할까.

상식적인 사람들이 상식적인 판결을 기대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우리는 사적복수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정말로 원하는 것이 복수만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최근 우리는 누가 봐도 이상한 판결에 절망했다. 그 이상한 판사는 계속 의심받는다.

반대로 상식적이고 구체적인 판결문을 쓴 판사는 오래 기억하고 칭송한다.

검사가 제대로 싸우고, 판사가 제대로 판단하고, 경찰이 제때 도착하는 장면 앞에서 우리는 안도한다. 그것은 단순한 권선징악의 쾌감이 아니라, 슬롯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확인에 가깝다.


그러니 사적복수 콘텐츠가 흥행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쉽게 비난할 일은 아니다.

“위험한 판타지에 열광한다”고만 말하기 전에, 왜 사람들이 그런 판타지에서라도 위로를 구하는지 먼저 봐야 한다.


사적복수는 위험하다.

드라마는 판타지다.

그 말은 맞다.


하지만 그 판타지가 계속 팔리고, 계속 소비되고, 계속 박수를 받는다면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사람들은 왜 법보다 빠른 응징을 보고 싶어 하는가.

왜 피해자가 절차 안에서 보호받는 이야기보다, 절차 밖에서 복수하는 이야기에 더 쉽게 안도하는가.

왜 우리는 현실의 공권력보다 드라마 속 해결사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는가.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누군가를 대신 때려주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때리지 않아도 해결되는 슬롯다.


더 상식적이고, 더 정의롭고, 더 애쓰는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슬롯.

피해자가 피해를 말했을 때 의심보다 보호가 먼저 오는 슬롯.

가해자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전에 바카라임을 지는 슬롯.

판결문을 읽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슬롯.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우리는 굳이 판타지에서 위로를 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적복수를 꿈꾸지 않아도 되는 슬롯.

어쩌면 우리가 진짜 보고 싶은 결말은 바로 그것이다.


--- 갑자기 뭔가에 욱해서 나답지 않은 글을 쓰기도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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