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로 번역된 작가들의 회의실

우리는 AI를 모른다 (3) : 스토리 연구 노트 2

by세영
10년간 AI 필드에서 살아온 인문학자의 관점에서, 최근 마주친 AI 관련 자료 중 기록해 둘 가치가 있어 보이는 것들을 다룬다. 학술 논문일 때도 있고, 업계 최전선의 관찰일 때도 있고, 인문학적 사유일 때도 있다. 어느 쪽이건, AI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이길 바라며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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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작가실의 풍경


TV 드라마의 한 시즌이 탄생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곳엔 '단 한 명의 작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의 밑그림을 그리는 메인 작가부터, 각 회차의 디테일을 바카라임지는 보조 작가들이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댄다. 회의실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토론하고, 흩어져 집필한 뒤, 다시 모여 서로의 문장을 다듬는다. 이 역동적인 협업의 공간을 일컬어 '작가실(Writers' Room)'이라 부른다.


2025년 봄, 구글 딥마인드는 이 오래된 창작의 풍경을 시스템의 영역으로 소환했다. 머신러닝 분야의 권위 있는 학회 ICLR 2025에서 발표된 논문, 「Agents' Room」이 그 주인공이다.


이 논문이 흥미로운 지점은 단순히 "여러 AI를 협업시킨다"는 기술적 발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저자들이 작가실이라는 고전적인 풍경을 코드로 이식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그리고 그 선택의 기저에 깔린 의도가 무엇인지를 추적하다 보면, 우리가 마주한 기술 시대의 새로운 단면과 마주할 수 있다.



1. 누가 무엇을 만들었는가


이 연구를 주도한 것은 구글 딥마인드의 연구진이다. 1 저자인 판틴 휴오(Fantine Huot)와 시니어 저자 미렐라 라파타(Mirella Lapata)를 포함한 6명의 연구자가 이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이 주목한 문제는 명확했다. AI에게 단편소설 한 편 분량(수천 단어 수준)의 긴 이야기를 쓰게 하면 결과물의 구조가 무너지기 일쑤다. 서사의 앞뒤가 맞지 않고, 캐릭터의 일관성이 흔들리며, 기존에 학습한 패턴을 답습해 진부한 텍스트만 내놓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 한계가 '모델의 성능 부족' 때문이 아니라,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를 단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1인용 작업으로 취급한 데서 온 오류'라고 진단했다.


"We conceptualize long-form writing as a multi-agent collaboration problem."
우리는 긴 글쓰기를 다중 에이전트 협업 문제로 재정의한다.


즉, 하나의 거대한 AI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대신, 여러 AI 에이전트에게 역할을 분담시켜 협업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작가실'이라는 고전적이고 인간적인 메타포가 최첨단 AI 시스템 설계의 출발점이 된 순간이다.



2. 아홉 명의 작가


Figure 1: Agents' Room 시스템 구조 (출처: Huot et al., 2025, ICLR 2025)


「Agents' Room」 시스템에는 총 아홉 명의 AI 작가가 상주한다. 연구진은 이들을 성격에 따라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기획 그룹(Planning Team)'이다. 총 네 명의 에이전트로 구성되며, 각각 갈등(Conflict), 인물(Character), 배경(Setting), 플롯(Plot)을 전담한다. 이들은 실제 드라마 작가실에서 화이트보드 앞에 모여 앉아 세계관의 뼈대를 세우는 기획 작가들의 역할을 수행한다.


두 번째는 '집필 그룹(Writing Team)'이다. 총 다섯 명의 에이전트가 서사의 전통적인 5단계인 도입(Exposition), 전개(Rising Action), 절정(Climax), 하강(Falling Action), 대단원(Resolution)을 하나씩 맡아 실제 문장을 써 내려간다.


여기서 주목할 핵심 설계 원칙이 있다. 기획 그룹이 생산한 결과물은 최종 텍스트에 단 한 줄도 직접 포함되지 않는다. 컴퓨터공학적으로는 '중간 산출물(Intermediate representation)'에 불과한 이 데이터는, 작가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야기의 '비가시적 골조' 혹은 '설계도'와 같다. 예컨대 '갈등 에이전트'가 "이 이야기의 핵심 갈등은 X와 Y의 신념 대립이다"라고 정리한다면, 이 문장은 소설 본문에 박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집필 그룹이 참고할 '회의록'으로만 존재한다.


이 지점이 바로 이 논문이 실제 작가실의 생태를 가장 정교하게 모사한 부분이다. 실제 창작 현장에서도 가장 고통스럽고 긴 시간은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회의'에 쓰인다. 화이트보드에 휘갈긴 메모와 수많은 포스트잇, 즉흥적인 난상토론은 대본에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그 과정이 생략된 대본은 결코 구조적 완결성을 가질 수 없다. 논문은 이 '보이지 않는 협업의 가치'를 시스템 아키텍처 내에 명시적으로 새겨 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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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에게 이야기를 가르치는 사람. AI가 글을 척척 써주는 시대에, "이게 좋은 이야기인가"라는 질문이 왜 여전히 인간의 몫인지를 현장의 언어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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