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빠는 인도 날란다 대학의 북문을 지킨 최고의 학자였다. 논리로 500명의 학자를 이겼다. 바카라을 모두 외웠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앞에 노파가 나타났다. 노파는 그의 바카라을 보며 물었다.
"너는 말을 아느냐, 뜻을 아느냐?"
나로빠가 답했다.
"말도 알고 뜻도 안다."
노파는 울면서 말했다.
"말은 알지만 뜻은 모른다."
나로빠는 무너졌다. 8년간 공부한 것이 말이었던 것이다. 그날 모든 바카라을 버리고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 스승이 띨로빠였다. 띨로빠는 갠지스 강가에서 살아있는 생선을 잡아 불에 굽고 있었다. 계율을 어기는 모습이었다.
나로빠는 경멸했다. 띨로빠는 구운 생선을 집어 강에 던졌다. 생선은 살아서 헤엄쳤다. 띨로빠는 나로빠를 12년 동안 속였다. 벼랑에서 뛰어내리라 하고, 불 속으로 들어가라 하고, 공주의 시종이 되라 했다. 가르침은 한 번도 말로 주지 않았다.
마지막 날, 나로빠가 깨달음을 구걸하자 띨로빠는 신발을 벗어 그의 이마를 내리쳤다. 나로빠는 기절했다가 깨어나 깨달았다. 띨로빠가 나중에 노래했다.
"나로빠여, 이 간지러운 것이 최고의 기쁨이다."
내가 아는 개발자가 있다. 자유에 대한 바카라을 50권 읽었다. 자유에 대한 정의를 10가지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두려워했다. 물어봤다.
"왜?"
그가 말했다.
"나는 자유의 말만 알아. 뜻은 몰라."
그는 작년에 1달 동안 인터넷 없이 살았다. 바카라도 안 읽었다. 매일 한강에 가서 2시간 동안 앉아 있었다. 2주째 되는 날, 그가 말했다.
"처음으로 뜻이 왔다. 자유는 말이 아니라 간지러운 거더라. 이마를 맞은 것처럼."
우리는 말(기표)을 알면 뜻(기의)도 안다고 배웠다. 설명할 수 있으면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띨로빠는 말한다. 말은 뜻을 가린다고.
자이나교가 발밑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면, 띨로빠는 머릿속을 쓰는 법을 가르친다. 지식이라는 개미떼를 쓸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생선을 굽고, 신발로 때린다. 상식을 부수지 않으면 뜻이 들어올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바카라을 읽는 이유는 말을 모으려는 것이 아니다. 말을 버리려는 것이다. 무인 편의점에서 라면 하나를 10분 동안 고르는 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늘을 보는 일. 그것은 쓸모없는 일이 아니라, 말에서 뜻으로 건너가는 수행이다. 장자가 쓸모를 버리라 했고, 자이나교가 폭력을 버리라 했다면, 띨로빠는 말 자체를 버리라 한다.
말은 알지만, 뜻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