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72/365)
우리는 왜 불평등해졌는가 리뷰 글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기
농담이 실험이 되어 돌아왔다
9년 전의 나는 글 말미에 〈월드워 Z〉를 농담처럼 꺼냈다. 체제를 흔들 만한 재난이 오면 불평등이 역사를 뒤로 되돌릴 정도로 줄어들지 않겠느냐고. 발터 샤이델이 말한 '대압착' — 흑사병이 노동력을 희소하게 만들어 농노의 임금을 올렸듯, 큰 죽음은 평등을 데려온다는 그 오래된 법칙을 나는 반쯤 믿고 반쯤 의심하며 적었다.
3년 뒤 코로나가 그 농담을 실험에 부쳤다. 결과는 내 두 직관이 동시에 맞고 동시에 틀렸다는 것이었다. 〈재난 불평등〉의 직관 — 재난은 가난한 곳으로 흐른다 — 은 정확했다. 사망률도, 필수노동의 노출도, 아이들의 학습 손실도 전부 아래로 쏠렸다. 그런데 샤이델의 평등화는 오지 않았다. 정반대였다. 각국이 현금을 뿌려 잠깐 빈곤을 눌렀지만, 그 돈은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어 자산을 가진 자를 폭발적으로 부유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나는 9년 전의 내 질문 하나가 낡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대재앙이 줄인 불평등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질문은 현대 국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흑사병 시대엔 재난이 노동력을 희소하게 만들어 임금을 올렸지만, 지금은 중앙은행이 자산가를 먼저 구한다. 재난이 평등을 가져온다는 역사 법칙은 복지국가와 현대 금융 앞에서 깨졌다. 재난조차 이제는 위쪽을 비껴간다.
그때 나는 "돈을 벌지 못하는 자는 평평한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도태종이 되는 것은 아닌가"라고 적었고, 로봇이 노인의 노동을, 농산물의 노동을 대체할 거라 보았다. 블루칼라 자동화의 서사였다.
2022년 이후 생성형 AI가 친 곳은 정반대였다. 카피라이터, 주니어 변호사, 번역가, 회계 보조, 코더. 밀라노비치의 코끼리 곡선에서 코를 치켜들고 있던 바로 그 선진국의 전문직 중산층. 9년 전의 나는 도태가 아래에서 시작될 거라 믿었는데, 그것은 가운데에서, 그것도 학력 자본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인지노동에서 시작되고 있다. 100년 전 아동노동을 없앴고, 그 글에서 나는 노인노동을 걱정했는데, 이제는 학위를 가진 사람의 노동까지 한계비용이 0에 수렴한다.
이건 단순한 예측 실패가 아니다. 그 글의 전제 하나가 흔들린다는 뜻이다. 나는 "중산층이 슬롯 안전의 중심"이고 위로부터의 착취에 저항하고 아래로 안 내주며 슬롯를 떠받친다고 적었다. 그런데 자동화가 중산층의 인지노동 자체를 잠식하면, 그 기둥은 저항으로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얇아진다. 떠받칠 기둥이 스스로 녹는 것이다.
그 글에서 나는 "자본주의의 전제에는 불평등이 깔려 있다"고 적고, 그것이 자연법칙인지 선택인지는 열어두었다. 피케티가 2019년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그 질문을 자기 손으로 닫았다. r>g의 결정론을 내려놓고, 그는 이렇게 고쳐 말한다. 불평등은 경제 법칙이 아니라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선택이다. 같은 r>g 조건에서도 어떤 슬롯는 누진세와 상속세로 불평등을 눌렀고, 어떤 슬롯는 안 눌렀다.
이건 그 글에서 내가 인용한 하라리 — 정의란 다수의 상상 체계에 가깝다 — 와 정확히 같은 자리에 떨어진다. 불평등의 수용 수준이 자연이 아니라 공유된 믿음의 함수라면, "어느 수준의 불평등에서 이 슬롯라는 건물이 무너지는가"는 공학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다. 임계점은 물리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람들이 "이건 부당하다"고 믿기 시작하는 그 지점에 있다.
그런데 이게 위로가 되느냐 하면, 아니다. 오히려 더 비관적이다. 자연법칙이라면 체념이라도 하는데, 선택이라면 우리가 매번 불평등을 선택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코로나 때 자산가를 먼저 구한 것은 사고가 아니라 다수가 묵인한 선택이었다.
그 글에서 가장 정직했던 문장은 이거였다. "내가 유리한 불평등은 대체로 좋아한다." 나는 평등주의자라고 스스로 믿으면서도 그렇게 적었다. 보통은 이걸 위선이라 부르고 끝낸다. 그런데 위선으로 처리하면 가장 흥미로운 게 사라진다.
실험실은 9년 전의 내 정직함 편을 든다. 사람들은 불평등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부의 분배를 그려보라고 하면 아무도 완전 평등을 그리지 않는다. 사람이 진짜 못 견디는 건 불평등이 아니라 불공정이다. 노력한 사람이 더 갖는 건 괜찮고, 운으로 갖는 건 못 참는다. 그러니 내가 평등주의자라 믿으며 동시에 유리한 불평등을 좋아한 건 모순이 아니다. 나는 평등이 아니라 공정을 지향했고, 내 우위는 노력의 결과라고 자동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더 불편한 의심이 따라온다. 그 글에서 나는 "공정한 거래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쪽은 대체로 약자"라고 흘렸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한 의심과 같다. 평등의 도덕은 강자를 끌어내릴 힘이 없는 자들의 발명품일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평등주의자인 이유는 평등이 옳아서가 아니라, 지금 내 자리에서 평등이 나에게 유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보다 위는 평등의 언어로 누르고, 나보다 아래로는 안 내려준다. 그 글에서 내가 중산층이라 묘사한 구조가, 사실 내 마음의 구조이기도 했던 셈이다.
사람들은 평등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특권을 요구한다. 거의 항상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걸 인정하는 게 평등의 포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 여기서부터가 9년 동안 내가 새로 도착한 자리다.
사람들은 특권을 원하면서도 "나에게 특권을 달라"고 입 밖에 못 낸다. 반드시 "이건 부당하다"는 공정의 언어로 번역해서 내놓아야 한다. 왜?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남의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라 로슈푸코의 말 그대로,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조공이다. 특권을 특권이라 부르지 못하게 만드는 그 슬롯적 강제 — 거기에 도덕이 얹혀 있다.
그러니까 특권 추구(내용)와 공정의 언어(형식)는 둘 다 참이다. 인간은 특권을 원하지만, 그걸 공정의 언어로 번역하도록 강제당한다. 그 번역의 강제력이 살아 있는 한 슬롯는 굴러간다. 내가 도달한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자기 이익을 완전히 초월한 성인의 평등주의는 인구의 0.1%고 슬롯를 못 굴린다. 나머지 우리가 낼 수 있는 도덕의 최대치는, 자기 이익과 공정 감각이 충돌할 때 가끔 공정 쪽으로 1cm 기우는 것 — 딱 그만큼이다. 내 모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도덕이 실제로 작동하는 해상도였다.
그런데 이 법정은 남의 승인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작동한다. 9년 전 글의 1:99 시나리오를 기억한다. 사유지, 사유도로, 사유 발전소를 세우고 기간망에 의존하지 않는 1%. 그들은 법정을 떠난 사람들이다. 99의 승인이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세금을 낼 이유를 못 느낀다는 건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남들의 도덕적 승인을 구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 순간 형식이 무너지고 내용만 남는다. 특권을 더 이상 공정의 언어로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계층이 생기는 것 — 그게 불평등의 진짜 위험이다. 경제적 격차 자체보다, 격차가 충분히 벌어지면 위쪽이 도덕의 법정에서 합법적으로 탈퇴할 수 있다는 것.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자. 인정 욕구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인간의 하드웨어다. 부자도 인정을 원한다. 다만 그들은 인정이 필요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법정을 사버린다. 예스맨, 소유한 언론, 끼리끼리의 지위 게임. 사라지는 건 인정 욕구가 아니라 인정을 내려주는 공동의 법정이다. 그래서 진짜 위협은 인정의 죽음이 아니라 법정의 사유화와 파편화다.
모듬살이를 해체하는 기술을 막는 러다이트는 가능한 운동이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기술을 막는(block) 게 아니라 위쪽을 같은 법정에 붙잡아두는(keep them in court) 데 있어야 한다. 세 갈래가 현실적이다.
첫째, 재분배가 아니라 사전분배(predistribution). 사후에 세금으로 걷어 나누는 게 재분배라면, 애초에 소득과 자산이 형성되는 1차 분배의 규칙 자체를 바꾸는 게 사전분배다. 재분배는 이미 법정을 떠난 부자에게 "세금 내라"고 허락을 구하는 거라 늘 저항받는다. 그런데 공동체를 해체하는 그 기술 — AI, 데이터, 자본 — 의 소유권 자체를 처음부터 넓게 깔면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다. 알래스카 영구기금이 석유로 한 걸 AI와 데이터로 하는 것. 전 국민이 그 기계의 공동 주주가 되면, 기술이 아무리 모듬살이를 해체해도 경제적으로는 한 배에 묶인다.
둘째, 공유 제도를 탈출이 비합리적일 만큼 좋게 만드는 것. 부자가 공교육과 대중교통을 떠난 건 그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강제로 못 떠나게 하는 건 러다이트지만, 떠나면 손해 보게 만드는 건 가능하다. 부자도 자기 자식을 보내고 싶은 공립학교. 같은 법정에 앉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같은 공간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셋째, 엘리트가 진짜 원하는 것 — 정당성, 안전, 살 만한 지구 — 을 공동 법정의 판결에 묶기. 이것들은 끝내 사유화가 안 된다. 코로나가 증명했다. 담장 안으로도 바이러스는 새어 들어왔다. 1%의 사유 왕국은 99가 안정적일 때만 성립한다.
세 개 다 기술을 막지 않는다. 대신 위쪽이 법정을 떠나는 비용을 끌어올린다.
내가 가장 무게를 두는 건 첫 번째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만이 도덕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이 내내 씨름한 게 인간이 정말 평등을 원하느냐, 아니면 특권을 공정으로 포장할 뿐이냐였다. 재분배는 이 질문에 인질로 잡혀 있다. 부자가 충분히 도덕적이거나 충분히 압박받아야 작동한다. 그런데 사전분배는 모두가 순수한 이기주의자여도 굴러간다. 소유 구조가 이미 평등하면, 동기가 순수하든 불순하든 결과가 평등해진다. 사람을 안 바꾸고 배관을 바꾸는 것.
이것은 9년 전 내 글의 절망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나는 "99의 돈을 가진 1이 세금 낼 이유를 느낄까?"라고 물었다. 사전분배의 답은 "안 느껴도 된다"이다. 애초에 그 기계의 지분을 모두가 들고 있으면 1의 선의를 구걸할 필요가 없다. "나는 평등주의자인데 유리한 불평등은 좋아한다"는 내 모순도 해결할 필요가 사라진다. 가장 우아한 지점이 이것이다. 도덕이 의심스러운 세계를 위한, 도덕에 기대지 않는 해법.
가장 아픈 제약은 정직하게 짚는다. 알래스카가 됐던 건 석유가 처음부터 주(州)의 지하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룰을 깔 시점에 자원이 아직 안 파였다. 그런데 AI의 석유 — 데이터, 컴퓨트, 프런티어 모델 — 는 지금 이 순간 사기업이 울타리를 치는 중이다. 이미 절반쯤 파였다. 그래서 현실의 사전분배는 백지에서의 공동소유 설계가 아니라, 이미 집중되는 자산에 공공 지분을 끼워넣는 일이 되고, 이건 다시 재분배의 얼굴을 닮아간다.
관건은 설계가 아니라 속도다. 울타리가 다 쳐지기 전에 말뚝을 박을 수 있느냐. 5년 전이면 훨씬 쉬웠고 5년 뒤면 훨씬 어렵다. 지금이 아마 '가장 옳은 답'과 '가장 가능한 답'이 잠깐 겹치는 좁은 창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26년 1월 22일 시행된 한국의 AI 기본법(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을 다시 본다. EU에 이어 세계 두 번째 포괄 규제 체계라는 상찬을 받았고, 2024년 12월 국회에서 거의 만장에 가깝게 통과됐다. 고영향·생성형 AI를 쓸 때 그 사실을 이용자에게 알리도록 하고, 시행 초기 1년 이상의 계도 기간을 둔다.
그런데 이 대화의 렌즈로 보면, 그 법의 이름이 많은 걸 말해준다. '발전'과 '신뢰'다. 진흥과 라벨링이다. 표시 의무는 분명 신뢰의 장치지만, 그것은 법정에 누가 앉느냐의 문제이지 그 기계의 지분을 누가 갖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의 AI 기본법에는 사전분배의 언어가 없다. 혜택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조항은 거의 비어 있다. 9년 전 내 글의 표현을 빌리면, 평평한 세계의 운영 규칙은 정비되는데 그 위에 드리운 그늘 — 누가 그 부를 갖느냐 — 은 여전히 비어 있는 칸으로 남아 있다.
분배의 압력은 법이 아니라 다른 데서 터져 나온다. 마침 2026년 삼성전자 노사는 성과급 산정 기준의 투명성과 이익 배분을 두고 파업 직전까지 갔다. 이것은 'AI 혜택 분배'라는 깔끔한 이름표를 단 정바카라이 아니라, 한 기업이 만들어낸 이익을 누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둘러싼 날것의 갈등이다. 어쩌면 이게 더 정직한 그림이다. 분배는 아름다운 기본법의 조항으로 먼저 오지 않는다. 같은 기계 앞에 선 사람들이 "이 몫은 부당하다"고 외치는, 그 법정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로 먼저 온다. 위쪽이 그 외침에 답해야 한다고 느끼는 한, 우리는 아직 법정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9년 전 나는 이 바카라을 제목이 섹시해서 골랐다고, 나는 평등을 지향하는 사람이라 적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모두의 평등이 내게 유리한 불평등을 무너뜨릴 때에도 나는 그것을 밀고 나가게 될까?"
9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질문이 신념인지 포지션인지를 가르는 유일한 리트머스라는 걸 안다. 신념은 위치가 안 바뀔 때는 검증되지 않는다. 올라갔을 때만 시험에 든다. 그래서 진짜 물어야 할 건 추상적인 평등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9년 전보다 코끼리 등에서 한 칸이라도 올라갔는가. 올라갔다면, 나는 지금도 같은 강도로 평등을 미는가.
이 질문에는 거시경제학도, 피케티도, 사전분배도 답해주지 않는다. 더치페이의 자리에서 각자가 답할 뿐이다. 다만 9년 전과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이제 나는 그 답이 내 선의에만 달려 있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내가 끝내 이기적인 인간으로 판명나더라도 결과가 덜 잔인하도록, 배관을 미리 바꿔두는 일 — 그게 도덕을 못 믿는 내가 도덕에 기대지 않고 평등에 베팅하는 방식이다.
세계는 평평해졌을지 모른다. 그늘은 여전히 있다. 다만 9년 전 나는 그 그늘이 무엇인지 몰랐고, 지금은 안다. 그늘은 격차 그 자체가 아니라, 격차가 충분히 벌어지면 누군가는 우리의 시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평등은 그래서 결과가 아니라, 모두를 같은 법정 안에 붙잡아두는 장치다. 창문이 닫히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