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71/365)
좋은 제품에 관한 이야기 001 / 002 / 003 / 004 에 이어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ever follows function) 무언가 만들 때 몇 번이고 되뇌는 말 중 하나다. 나는 디터 람스의 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건축가 루이스 설리반의 것이다. 이 추상적인 단어들의 집합만으로 문제를 풀 수는 없지만, 반복하면서 고민해 볼 가치는 있다. 그래서 한 번 해체했었다. 형태가 무엇이고, 기능이 무엇이며, 따른다는 게 무엇인지.
대충 이런 결론에 닿았다. 형태는 외형만이 아니라 프로세스이고 비즈니스 로직이기도 하다. 당근마켓의 형태는 앱의 디자인 요소이면서 동시에 '근처 사람만 허용하는 중고 시장'이라는 규칙이다. 기능은 버튼을 눌렀을 때 나오는 결괏값에 그치지 않고, 사용자의 목적이고 필요이며 골든 서클의 '왜?'다. 더 밀면 제품이 해결하려는 '문제'로 추상화된다. 따른다는 건 단순한 수반을 넘어, 기능의 달성을 위해 형태를 빚어내는 팀 전체의 분투다. 정리하면, 형태는 수단이고 기능은 목적이다.
여기까지가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이 글은 그 정리를 의심하면서 시작한다. 정확히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가 좋은 제품에 대해 말해주는 것과 말해주지 않는 것을 가르려는 글이다.
문제는 이 명제가 너무 잘 맞는다는 데 있다. 어떤 제품이 망해도 "기능 정의가 틀렸거나, 형태가 기능을 안 따랐다"로 항상 사후 설명이 된다. 반증할 수 없는 문장은 옳지만 무력하다.
만드는 사람의 손에 쥐여줄 칼이 못 된다.
왜 그럴까.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가 측정하는 것은 좋음이 아니라 내부 정합성이기 때문이다. 형태가 기능에 군더더기 없이 들어맞는가. 이건 한 축일 뿐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정합적이면서 쓸모없는 제품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소하거나 틀린 기능을 우아하게 구현한 것.
정합성은 좋은 제품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축이 필요하다. 그 기능이 애초에 섬길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누구에게. 설리반의 공리는 첫째 축만 말한다. 좋은 제품을 정의하려면 이 둘을 떼어 놓고 봐야 한다. 정합성(integrity)과 가치(worth)는 다른 질문이다.
가치를 따지자마자 곤란한 질문이 따라온다. 기능은 단수가 아니다.
"사용자는 드릴이 아니라 구멍을 원한다." 레빗의 이 말이 JTBD로 이어지고, 우리는 대개 pain point란 발견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용자가 이미 가진 필요를 캐낸다. 디자인싱킹의 '공감'도, 시넥의 '왜?'도 이 발견의 언어다.
그런데 만드는 행위를 들여다보면 결이 셋이다.
하나, 발견(discover). 기능이 잠재해 있고 너는 캐낸다. 드릴과 구멍, 밀크셰이크를 아침 출근길의 무료함을 달래는 도구로 쓰던 사람들. JTBD의 기본 모드다.
둘, 드러냄(reveal). 기능은 실재하지만 형태가 보여주기 전엔 언어화되지 않는다. 아이폰. 사람들이 '주머니 속 컴퓨팅'을 원한다고 말하진 못했지만, 보여주니 진짜로 그걸 원했다. 형태가 기능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니 "따른다"는 표현은 어딘가 과소하다. 위대한 제품에서 형태와 기능은 따르고 따라지는 게 아니라 대화한다.
셋, 발명(invent). 기능이 없었는데 설득으로 심는다. 드비어스. "A Diamond is Forever." 다이아몬드가 사랑과 영원의 증표라는 기능은 발견된 게 아니라 한 세기에 걸쳐 설치되었다.
여기서 함정이 하나 있다. 드러냄과 발명은 밖에서 보면 똑같다. 둘 다 "없던 수요를 만들었다." 그런데 좋은 제품을 가르는 선은 정확히 이 둘 사이를 지난다. 그리고 둘을 가르는 테스트가 있다.
설득의 장치를 걷어내도 가치가 살아남는가.
아이폰은 광고를 멈춰도 사람들이 계속 쓴다. 가치가 자립한다. 다이아몬드는 카르텔이라는 인위적 희소성과 100년의 캠페인을 걷어내면 가치가 무너진다. 실제로 지금 무너지는 중이다. 랩그로운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지 않는 세대. 발명된 가치는 시간 축에서 취약하다. 진짜 필요에 닻을 내리지 않았으니, 설득이 멈추거나 대체재가 오면 풍화된다.
드비어스는 그래서 흥미로운 사례다. 다이아몬드 반지라는 형태는 '헌신과 지위의 신호'라는 기능을 흠 없이 따른다. 첫째 축, 정합성은 만점이다. 다만 그 기능이 섬겨진 게 아니라 심어졌다. 둘째 축, 가치는 텅 비어 있다. 정합적이면서 기생적인 제품. JTBD를 신봉하면 이런 발명 모드는 아예 시야에서 사라진다. '잡(job)'이라는 단어가 발견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미 가진 일. JTBD에는 '심어진 잡'을 다룰 어휘가 없다. 이게 그 프레임의 맹점이다.
여기서 정직하게 짚어야 할 반론이 있다. IDEO는 좋은 제품을 desirability, feasibility, viability의 교집합으로 본다. 어쨌든 제품이 지속 가능하려면 성공은 기본이다. "좋은데 성공하지 못한 제품"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처럼 들린다. 마케팅이, 자본이, 유통이 부족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 그것까지 포함해서 '제품'이지 않은가. 사람에게 닿는 것까지가 만듦이다. 시장이 못 알아본 비운의 명작이라는 서사는 대개 자기위안이다.
절반은 전적으로 옳다. 유통은 제품의 일부다. 거기엔 항복한다.
그런데 '제품'을 자본과 유통까지 넓혀서 "좋은데 실패했다"를 어불성설로 만들면, 확장의 대가가 그대로 따라온다. 앞서 형태를 비즈니스 로직까지 넓혔던 그 수와 똑같고, 무력해지는 방식도 똑같다. 좋음을 성공의 부분집합으로 정의하면, 무언가가 좋은지는 성공한 뒤에만 알 수 있다. 만드는 동안엔 쓸모가 없는 정의다. "좋은 제품을 만들려면 성공해라"는 조언이 아니라 동어반복이다. 과녁의 정중앙으로 과녁을 정의한 꼴이고, 생존편향을 정의의 지위로 올린 것이다.
게다가 이 정의는 한 방향만 지킨다. "좋음이면 성공"(실패는 좋지 않았다는 증거)은 지킨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역방향이다. "성공이면 좋음"인가? 슬롯머신 앱, 가챠 게임, 인게이지먼트를 극대화하는 피드, 담배. 전부 desirable하고 feasible하고 viable하다. 드비어스도 100년을 viable했다. 이것들이 전부 좋은 제품인가. 확장된 정의는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슬롯머신을 좋은 제품이라 부르지 않기 위해, 좋음과 성공을 굳이 가른다.
그래서 칼을 이렇게 간다. 성공은 게이트이지 상이 아니다. viability를 버리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viability는 좋은 제품의 필요조건이다. 망하면 형태를 변해 가는 기능에 다시 맞출 수 없으니까. 자본이 끊기면 re-fit이 멈춘다. 좋은 제품은 일회적 적합이 아니라 재적합의 역량이고, 그 역량을 떠받치는 게 지속 가능성이다. 거기까진 같다. 하지만 필요조건과 구성요소는 다르다. 성공은 통과해야 할 문이지 그 문 너머의 상이 아니다. 드비어스는 그 문을 화려하게 통과했는데, 문 너머에 상이 없다.
그러니 단어를 둘로 쪼개는 게 정직하다.
온전한(sound) 제품: IDEO의 세 원을 다 채우고, 출시되고, 지속된다. 유통과 자본을 포함한다. 실패는 온전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좋은(good) 제품: 섬기는 기능이 섬길 가치가 있고, 그 가치가 설득을 걷어내도 남는다.
"좋은데 실패는 어불성설"이라는 직관은 사실 sound에 대한 직관이고, 정확하다.
"드비어스는 좋은 제품이 아니다"라는 직관은 good에 대한 것이고, 역시 정확하다. 둘은 싸우지 않는다.
같은 단어를 쓰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 좋음은 결국 무엇인가. 제품은 디자이너와 기획자의 이상을 실현한 구현체이고, 이것으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슬롯머신이 바꾸는 세상을 나는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이 한 문장에 좋음의 정의가 숨어 있다 — 다만 곧장 꺼내 보면 두 군데가 새어 나간다.
첫째, "이상을 실현한 구현체"는 좋음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슬롯머신 기획자도 자기 이상을 충실히 실현했기 때문이다. 인게이지먼트 피드를 만든 사람들은 진심으로 세상을 연결한다고 믿었다. 이상의 충실한 실현은 첫째 축, 정합성이지 좋음이 아니다. 만드는 사람의 진정성을 좋음으로 들여올 수는 없다. 슬롯 메이커도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좋음은 이상을 얼마나 충실히 실현했나가 아니라 그 이상의 내용 자체가 좋은가에 살아야 한다.
둘째, "세상을 바꾼다"도 슬롯머신을 거르지 못한다. 슬롯머신은 세상을 바꾼다. 대규모로. 도시를 세우고 수백만의 가계를 바꾼다. 그러니 우리가 정작 말하는 건 바꾸는 방향이다. 그리고 방향을 판단하려면 만드는 사람의 이상 바깥에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진지한 메이커는 전부 통과한다.
"슬롯이 바꾸는 세상을 좋다고 못 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인간이 무엇으로 잘 사는가에 대한 얇은 이론 하나를 쥐고 있다. 변동 보상의 도파민 루프로 돈을 뽑아내는 건 사용자를 깎아낸다는 주장. 이게 이 글의 진짜 토대이고, 솔직히 설리반보다 더 깊은 닻이다. 설리반은 거기까지 가지 않았다.
그 토대를 한 문장으로 벼리면 칸트의 경첩에 닿는다.
좋은 제품은 사용자를 목적으로 대하고, 나쁜 제품은 수단으로 대한다.
슬롯머신은 사용자를 매출의 수단으로 삼아 착취한다. 드비어스는 사용자를 심을 믿음의 그릇으로 삼아 설치한다. 좋은 제품은 사용자의 번영 자체를 형태가 섬기는 목적으로 둔다.
이러면 설리반의 공리가 한 겹 깊어진다. 형태는 기능을 따르고, 기능은 사용자를 목적으로 섬긴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테스트가 둘 떨어진다.
설득을 걷어내라. 가치가 남는가.
— 발견·드러냄과 발명을 가른다. 드비어스가 떨어진다.
제품을 걷어내라.
사용자가 능력을 잃어 곤란한가, 아니면 의존에서 풀려나 안도하는가.
— 살리는 제품과 착취하는 제품을 가른다.
슬롯머신은 둘 다 떨어진다. 도파민 스케줄을 빼면 가치가 증발하고, 앱을 지우면 사용자는 곤란이 아니라 안도한다. 그것은 사용자를 세워주던 게 아니라 빨아먹던 것이었으니까. 반대로 좋은 도구는 지우면 능력이 줄어든다. 사용자를 세워주던 것이었으니까.
한 가지 경고를 덧붙여 둔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바는 너무 높을 수 있다. 잘 만든 의자, 믿음직한 우산, 조용히 일 잘하는 메모 앱은 세상을 바꾸지 않지만 좋은 제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설리반이 든 예시 — 의자, 유리창 — 가 정확히 그런 겸손한 것들이다. 좋음을 혁명으로 정의하면 정직한 장인의 대부분이 잘려 나간다. 게다가 페니실린도, 포스트잇도, SMS도 이상의 실현이 아니라 사고(accident)로 세상을 바꿨다.
'이상을 실현했다'와 '세상을 바꿨다'는 자주 어긋난다. 그래서 나는 좋음의 무게중심을 결과나 영향이 아니라 사용자가 더 능력 있고 덜 깎인 채 남았는가에 둔다. 이 기준이 슬롯을 거르고, 겸손한 의자를 살리고, 사고로 세상을 바꾼 페니실린까지 설명한다.
재난문자를 이 렌즈로 다시 본다.
형태는 무엇인가. 몇 가지 코드를 가지고 통신사 기지국을 통해 각 단말로 매스미디어처럼 송출한다. 단말은 코드로 긴급·재난·알림을 구분해 경고음을 내고 팝업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그리고 언제, 어느 주기로, 누가 보낼 수 있는가 하는 프로세스 전체가 또한 형태다. 최종적으로 사용자가 언제 알림을 받는지는 이 프로세스가 결정하니까.
기능은 무엇인가. 소리가 울리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정보를 제때 알리고, 필요한 사람이 충분한 정보를 받아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알겠다. 재난문자가 어설픈 건 형태가 기능을 안 따라서가 아니다.
첫째 축, 정합성은 오히려 충실하다. 문제는 기능이 누구의 것이냐에서 갈리지 않은 채 양쪽에 어정쩡하다는 데 있다. 발신자(부처)의 기능은 바카라임의 가시화와 '일하고 있음'의 증명일 수 있다. 수신자의 기능은 내 상황에 맞는 정보를 조용히 받는 것이다. 새벽에 전국의 폰이 동시에 울리는 형태는 발신자의 기능엔 충실하고 수신자의 기능엔 배신한다. 운전 중이었다면, 청각에 예민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경고음으로 주의를 확실히 끄는 방식은 사용자를 목적이 아니라 통보의 대상으로 — 수단으로 — 대한 것이다.
두 테스트를 들이대 보면 더 선명해진다. 제품을 걷어내면 사용자는 안도하는가, 곤란한가. 정말 필요한 정보였다면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재난문자는 상당 부분 "꺼 버리고 싶다"는 안도 쪽으로 기운다. 그렇다면 그건 사용자를 충분히 목적으로 섬기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다. 형태가 기능을 따르는가를 물을 게 아니라, 그 기능이 누구를 목적으로 두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은 더 이상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에 대한 글이 아니다. 그 공리는 좋은 제품의 정합성을 말하지 좋음을 말하지 않는다. 좋음을 정의하려면 세 가지를 포개야 한다. 형태가 기능을 따르고(정합성), 누구의 기능인지를 선택하며(가치), 기능이 표류할 때 형태가 다시 따라붙는다(시간). 그리고 그 셋을 떠받치는 닻은 결국 한 문장이다.
좋은 기능이란 사용자를 목적으로 섬기는 기능이다.
설리반에서 시작했지만 도착한 곳은 칸트에 가깝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 그러나 그 기능이 사용자를 목적으로 두지 않는다면, 아무리 형태가 충실히 따라도 좋은 제품이 아니다. 발명된 가치는 좋은 제품의 증거가 아니라 위험 신호다. 성공은 통과해야 할 문이지 상이 아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만들기로 했다면,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 형태가 기능을 따르는가"가 아니라 "이 기능은 누구를, 목적으로 섬기는가"이다. 문제를 푸는 첫걸음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라던 말처럼, 좋은 제품을 만드는 첫걸음은 좋은 기능을 알아보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