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52/365)
이영도 작가의 소설 《퓨처 워커》에서 휴리첼 후작이 던진 한마디가 오랫동안 마음을 맴돈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적이 낫다.”
처음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는 묘한 역설처럼 느껴졌습니다. 적이란 으레 괴롭고, 불편하며,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존재니까요. 하지만 삶의 다양한 장면들을 통과하며 이 말의 이면을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정답이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늘 정답 없는 선택을 마주합니다. 전작인 《드래곤 라자》의 결말부에서, 레니가 지골레이드를 라자로 맞이할 것인가를 두고 고뇌하던 순간도 아마 이와 맞닿아 있을 것입니다. 갈등과 마찰을 피하는 안전한 길과, 기꺼이 짐을 짊어지고 낯선 관계 속으로 뛰어드는 길. 우리는 종종 정답을 모른다는 이유로 '무관심'과 '무기력'이라는 가장 쉬운 선택지로 도피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마찰도 일으키지 않는 고요함은 결국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적'은 적어도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의 경계를 선명하게 드러내며, 때로는 뜻밖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어줍니다.
아주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작은 적들을 만납니다. 예전 온라인 게임의 한 팀장님은 코털을 자주 정리하지 않으셨는데, 솔직히 그 모습이 꽤 거슬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작고 불편한 감각 덕분에, 저는 거울을 볼 때마다 제 코털을 한 번 더 신경 쓰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저러지 말아야지’라는 얕은 반면교사를 넘어, 나의 사소한 모습이 타인에게 어떤 인상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이 피어난 셈입니다.
누군가의 거친 말버릇이나 흐릿한 발성을 보면서 ‘혹시 나에게도 저런 버릇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되돌아본 경험, 아마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타인의 거슬리는 점은 결국 내 안에 자리 잡은 어떤 ‘기준’이나 ‘기대치’를 건드립니다. 그 순간 우리는 혐오나 짜증에서 멈추는 대신, ‘왜 저 행동이 나에게 유독 불편하게 다가올까?’라는 질문을 품어볼 수 있습니다. 불편함이 성찰의 도구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지점이 있는 듯합니다. 바로 나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을 함부로 ‘타자화(Othering)’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자화란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인간이 아닌, 단순한 도구나 장애물로 격하시키는 시선을 뜻합니다. 상대가 그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되어버리면, 그 관계에서는 더 이상 어떤 배움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의 방향을 틀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나의 시선을 타인의 행동 자체에서, 내면의 숨은 ‘간극(gap)’으로 옮겨보는 것이죠.
나는 타인에게 은연중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을까?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상식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그 사람의 행동과 나의 기준 사이에는 어떤 틈이 존재하고 있을까?
이 간극을 발견하고 들여다보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무찌러야 할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의 모양을 더 깊이 이해하게 도와주는 일종의 탐침(probe)이 되어줍니다.
최근 운전석에 앉아 있을 때면 이런 생각들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앞차가 지나치게 느리게 가거나, 방향 지시등 없이 불쑥 끼어들 때면 순간적으로 욱하는 감정이 올라옵니다. 그럴 때마다 유튜브의 한 영상에서 보았던 우스갯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저 사람, 지금 화장실이 무지하게 급한가 보다."
실제로 그렇게 믿어버리면 끓어오르던 분노가 마법처럼 누그러지곤 합니다. 상대에게도 내가 모르는 절박한 사정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감정의 온도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에게 조용히 다짐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나는 저렇게 운전하지 말아야지." 타인에 대한 관용과 나만의 기준 설정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경험입니다.
지나친 관용은 무바카라임한 방관으로 이어지기 쉽고,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은 세상을 향한 날 선 심판으로 굳어지기 쉽습니다. 그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우리는 조금 다른 시각을 선택해 볼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지금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만약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상대방을 단순히 '운전 매너가 없는 사람'으로 환원하지 않고, 짐작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가진 한 명의 인간으로 상상해 보는 것. 그 이해의 시도가 시작되는 순간, 도로 위의 적은 사라지고 작지만 의미 있는 연결감이 남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을 일상에서 조금 더 자연스럽게 적용해보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가볍게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감정 알아차리기: 누군가 거슬릴 때, '짜증', '불안', '무시당한 기분' 등 그 감정의 진짜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간극(Gap) 발견하기: “이 상황에서 내가 당연하게 기대했던 것은 무엇일까?” 질문하며 내 안의 기준을 확인합니다.
통합적인 시선 갖기: “이 불편함을 통해 나는 내 모습의 어떤 면을 보았는가? 상대방의 세상에서는 이 상황이 어떻게 보였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것은 적을 멀리서 비난하거나 심리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와 상대 사이에 놓인 간극을, 언제든 대화가 가능한 거리로 좁혀두려는 부드러운 노력에 가깝습니다.
설령 상대방이 영원히 내 마음을 몰라준다 해도 괜찮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 내면의 지도를 한 뼘 더 넓고 정교하게 그려나갈 수 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휴리첼 후작이 말한 ‘적’은 진짜 적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어떤 세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름'이 만들어내는 낯선 마찰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배우고 세계를 넓혀가는 가장 강력한 원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전한 중립은 끝내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를 성가시게 하는 불편한 마찰들, 타인의 거슬리는 버릇, 예측 불가능하게 부딪혀오는 낯선 존재들. 그것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너는 왜 그렇게 반응하니? 네가 지키고 싶은 가치는 무엇이야? 너는 타인을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니?"
정답이 없는 세계에서, 이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들을 기꺼이 품고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적을 이용한다’는 말의 가장 성숙하고 다정한 실천이 아닐까요.
이제는 길을 걷다 누군가 제 마음을 콕 찌르고 지나가도, 가끔은 묘한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 불편한 마찰이 없었다면, 저는 제 콧속의 털도, 뾰족한 말버릇도, 성급한 운전 습관도
영영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까요.
세상에 완벽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기꺼이 건너가 배워야 할, 다정한 간극이 존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