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42/365)
예술 작품 복제의 의미와 가치 를 다시 읽고, 고민하고.
"이건 진짜야", "찐이다." 무언가에 감탄할 때마다 우리는 이 말을 되풀이한다. 그런데 '찐'이라는 상태는 사물의 속성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믿기로 합의한 결과일까?
진화의 시간 속에서 인간은 일종의 '희소성 탐지기'로 빚어졌다. 먹이, 짝, 안전한 은신처처럼 희소한 자원에 더 주목하고 더 높은 가치를 매기는 개체가 살아남았다. '희소함 → 주목 → 욕망 → 가치 부여'의 회로는 거의 몸에 새겨진 회로에 가깝다. '찐'이라는 한 음절에는 이미 "이건 거의 없다", "이걸 가진 사람은 나뿐이다",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희소성의 언어가 잠복해 있다.
문제는 디지털 복제와 생성형 AI가 바로 이 회로를 해킹하고 있다는 데 있다. 좋은 음악, 좋은 그림,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더는 희소하지 않은 세상에서 예술의 가치는 어디에 남는가?
본 글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가치는 결국 '인정'에서 시작되며, 복제 기술은 그 인정의 작동 방식을 재편할 뿐 폐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술의 미래는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인정하고, 소유를 주장하고, 수익을 분배하는 정치'에 달려 있다. 이 글이 향하는 종착지는 미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이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 앞에서 아우라의 훼손을 우려했을 때 그가 가리킨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유일한 존재감'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 뒤 우리가 목격한 것은 아우라의 소멸이 아니라 희소성의 이동이다. 디지털 파일은 무한 복제되지만, 알고리즘은 주목도를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한다.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는 환경은 오히려 '누가 더 많이 보이는가'라는 새로운 희소성 경쟁을 격화시켰다. 희소성은 사라진 게 아니라 '주목'이라는 층위로 자리를 옮겼다.
NFT는 이 이동의 가장 극적인 사례였다. 블록체인은 무한 복제되는 이미지에 '유일한 소유권 증명서'를 부착해 인위적 희소성을 재도입했고, 한때 시장은 열광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시점에서 NFT 시장은 사실상 붕괴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NFT는 거품이었다"는 흔한 독해 대신, 우리 논지에서는 더 정밀한 독해가 가능하다. NFT의 붕괴는 희소성만으로는 가치를 지탱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블록체인이 부여한 것은 '증명 가능한 희소성'이었지만, 그 희소성을 가치로 전환시켜줄 문화적 인정의 공동체가 부재했다. 미술관도, 비평가도, 다음 세대 컬렉터도 디지털 토큰들을 '진짜 예술품'으로 인준해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NFT는 역설적으로 우리 논지를 강화해준다. 인정 없는 희소성은 무력하다. 가치는 희소성이 아니라 인정에서 온다. 희소성은 인정을 촉발하는 한 조건일 뿐, 그 자체로 자족적이지 않다.
가치의 무게중심이 '대상의 희소성'에서 '인정의 공동체'로 옮겨간다면, 생성형 AI는 그 이동을 가속한다. 박진영은 일찍이 2007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음악 자체로 돈을 버는 시대의 종언을 짚었고, 2009년 1월 프랑스 칸느에서 열린 음악 비즈니스 컨퍼런스 MIDEMnet 기조연설에서는 한층 정교한 진단을 내놓았다. 그는 자신이 이미 2001년 직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음을 회고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음악을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타를 만듭니다(We don't make music. We make stars). … 모든 것이 디지털로 바뀌고 있을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가 생각한 답은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날로그적인 것은 인간입니다. 음악을 어떻게 유통하든 그 방식이 어떻게 바뀌든, '스타가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최종 상품은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고속인터넷 보급률이 80%를 넘어 냅스터 같은 P2P 서비스가 빠르고 격렬하게 도착했고, 그 결과 물리적 CD 시장의 90%가 무너졌다.* 박진영이 도달한 결론은 따라서 자기 사업 모델의 정당화가 아니라 산업 차원의 비상 대응이었다. 머니코드 진행을 입력하면 AI가 몇 초 만에 수백 개의 멜로디를 쏟아내는 지금, 그의 진단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같은 자리에서 그는 K-팝 미니앨범의 본질을 이렇게 풀었다.
"이제 아무도 음악을 갖기 위해 앨범을 사지 않습니다. 음악은 이미 디지털로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사는 것은 팬을 위한 기념품에 가깝습니다(more like a souvenir for the fans). 큰 사진집 섹션이 있고, 그것은 음악이라기보다 사진집이자 기념품입니다."
학술 분석은 이 산업 전환을 사후적으로 확인한다. 한 연구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음원 판매에서 통합·시각화·라이브 공연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음악을 '최종 상품'이 아니라 '프로모션 도구'로 재정의해왔음을 보여준다.* 다른 분석은 K-팝의 성공 요인을 "창의적 과정의 상품화(commoditisation of creativity)"로 명명한다.** 박진영의 예언은 한 개인의 직관이 아니라 산업 구조 전환의 좌표였다.
*Jimmyn Parc & Shin Dong Kim, "The Digital Transformation of the Korean Music Industry and the Global Emergence of K-Pop," Sustainability 12(18), 2020.
**Felix Tan, "Digital Transformation of Business Ecosystems: Evidence from the Korean Pop Industry," Information Systems Journal, 2020.
소비자가 진짜로 돈을 내는 대상은 더 이상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인간적 맥락'이다. 아이돌의 데뷔 서사, 멤버 간의 케미, 무대 위에서 흘린 땀, 팬과 나누는 메시지 한 줄. 음악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관계의 매개체가 된다. 스포츠에서 경기 기록 자체보다 선수의 인생 스토리에 돈이 몰리는 구조와 동일하다.
이 전환이 정점에 이르면 '작품'과 '관계'는 분리 가능한 별개의 상품이 된다. 미래 시장은 두 층위로 분화될 가능성이 높다. 한쪽에는 AI가 무한히 생산하는 저비용·맞춤형 콘텐츠—게임 BGM, 개인 플레이리스트, 광고 음악—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 퍼포머가 제공하는 '라이브의 일회성, 실수, 서사, 관계'가 프리미엄으로 거래된다. 음악 만들기는 AI가 대체하지만, 음악을 통한 관계 맺기는 여전히 인간의 영역으로 남는다—적어도 한동안은.
박진영이 가리킨 '가장 아날로그적인 것, 사람'은 그러나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진짜 사람', '진짜 감정', '진짜 순간'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진짜'라는 단어에는 사실 두 가지 다른 층위가 섞여 있다.
하나는 존재론적 진짜다. 이 물체가 특정 시공간에 실제로 있었는가. 다빈치가 직접 손질한 붓자국, 카메라 앞에 실제로 서 있던 배우. 이것은 사실(fact)의 문제다. 다른 하나는 경험적 진짜다. 내가 그것을 볼 때 진짜라고 느끼는가. 이것은 효과(effect)의 문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감독이 CG를 거부하고 실제 비행기를 폭파시킨 이유는 존재론적 진짜가 경험적 진짜의 필요조건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터진 폭발 앞에서 놀란 배우의 표정은, 그린스크린 앞에서 상상하며 연기한 표정과 다르다. 우연과 저항이 만들어내는 어떤 잉여, 그것이 영화에 진실의 무게를 부여한다.
그런데 생성형 AI는 이 공식을 흔든다. AI가 만들어낸 눈물 흘리는 얼굴이 실제 배우의 눈물보다 '더 진짜 같게' 느껴지는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험적 진짜가 존재론적 진짜로부터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이 분리는 놀란적 영화관의 핵심을 무너뜨린다. 놀란이 진짜로 싸우던 적은 사실 CG가 아니라 '저항 없는 완벽함'이었다. 그런데 생성형 AI는 가장 완벽하게, 가장 저항 없이 이미지를 생산한다. 예술가의 역할은 '저항과 싸우는 투사'에서 '프롬프트를 고르는 큐레이터'로 변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의 진짜 예술 경험이란, 오히려 AI의 매끄러움을 거부하고 인간의 불완전한 흔적을 추적하는 행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흔한 옹호론이 등장한다. "인간 아이돌은 실수한다. 음정이 삐끗하고 무대에서 넘어지고 눈물을 흘린다. 그 불완전함이 '진짜'라는 믿음을 강화한다. AI가 완벽해질수록 인간의 불완전함은 더 희소해지고 더 높은 가치를 얻는다." 매력적인 논변이지만, 이 논변은 자기 토대를 스스로 무너뜨린다.
문제는 단순하다. AI가 '실수하는 척'을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면? 이미 가능하다. 일부러 음정을 살짝 미는 보컬, 숨소리를 의도적으로 넣는 마스터링, '연습 부족 같은 느낌'을 연출하는 프로듀싱은 AI 음악에서도 얼마든지 구현된다. 더 나아가 AI는 '작곡할 때 힘들었던 가짜 일기', '팬을 생각하며 흘린 가짜 눈물'까지 생성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소비자가 반응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로서의 실수'가 아니라 '그것을 진짜 실수라고 믿는 자신의 인식'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슬롯적 합의의 문제다. 이는 4절의 '경험적 진짜' 논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진짜라는 감각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수용자와 공동체의 인준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렇게 정리되어야 한다. 인간의 불완전함은 예술의 마지막 보루가 아니다. 그것조차 결국 '인정의 정치'로 환원된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 인간의 실수이고 무엇이 시뮬레이션된 실수인지 객관적으로 구별할 수단을 점점 잃어가고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인간'에 대한 인정은 점점 더 슬롯가 누구를 진짜로 인정하기로 합의하느냐의 문제가 된다. 인간성 자체가 정치의 대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물러나, 지금껏 당연시한 전제 하나를 의심해보자.
'원본 vs 복제'라는 이분법 자체가 보편적인가?
서구 예술사는 원본을 신성시해왔다. 화가가 직접 손질한 단 하나의 캔버스, 작가가 사인한 한정판, 작곡가의 자필 악보.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은 바로 이 원본 페티시즘의 가장 정제된 표현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미학 전통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중국 회화·서예 전통에서 임모(臨摹)—스승의 작품을 똑같이 베끼는 행위—는 결격이 아니라 미덕이었다. 임모는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거장의 정신을 자기 손으로 흡수하는 수행이었다. 일본의 우츠시(写し) 도예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명작을 '복제'하되 거기에 자기 시대의 손길을 더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독립적 가치를 갖는다. 한국 도예의 대대로 잇는 전통, 불교 경전의 사경(寫經)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복제'와 '창작' 사이에 서구만큼 가파른 절벽이 없다.
이 전통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원본의 신성성'이라는 감각 자체가 특정 시대·특정 지역의 자본주의 미학이 만들어낸 역사적 구성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 시장이 '한 작가의 한 작품'을 단위로 상품화하려면 원본의 신성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상품 형식의 요구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NFT의 실패는 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NFT는 동양 미학의 자원을 무시한 채 원본 페티시즘을 디지털로 옮겨심으려 했고, 정작 동아시아의 거대한 디지털 콘텐츠 시장은 이미 원본/복제의 강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K-팝의 안무 영상, 댄스 챌린지, 팬메이드 콘텐츠의 폭발적 확산은 '원본은 누구의 것인가'를 묻지 않는 미학 위에서 가능했다. 박진영이 "최종 상품은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우연찮게도 동아시아 미학의 오랜 전통—작품 그 자체보다 작품을 둘러싼 관계와 수행을 중시하는—과 합류하고 있었다.
생성형 AI는 어쩌면 서구식 원본 페티시즘을 종식시키고, 동양적 임모와 우츠시의 감각을 전 지구적 미학의 기본값으로 되돌리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작업이 따라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미학과 인식론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결국 법과 제도, 분배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한국의 사법 경험과 영미권의 최근 판례는 가장 풍부한 자원을 동시에 제공한다.
먼저 한국. 2013년 한 게이머가 캐릭터 삭제를 가장해 게임사 직원을 속이고 아이템을 반복 복구받아 5억 7천만 원을 챙긴 사건에서, 법원은 "게임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는 비용, 시간, 노력 등을 투자해야 하고 현실에서 현금으로 거래되는 대상이기에 금전으로도 가치가 있다"며 형법상 '재산상 이익'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사기죄 성립을 다투는 맥락이긴 했지만, 핵심은 '시간과 노력의 투자'라는 표현이다. 법원은 게이머를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해 가치를 창출하는 존재로 보았다.
흥미로운 점은 그 다음에 있다. 현행 한국 법체계는 동시에 게임 계정을 '개인정보'로 분류하고 있어,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1년 이상 미접속 시 분리 보관 또는 삭제 대상이 된다. 게임 캐릭터는 한편으로는 노동의 결정체이자 재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년만 접속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는 개인정보로 취급된다. 법체계가 디지털 시대의 '주체성'을 일관되게 다루지 못한 채 두 가지 모순된 분류 사이에서 진동하는 셈이다.
여기서 한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한다. 게임과 팬덤은 같지 않다. 게임은 닫힌 시스템 안에서 계량 가능한 노동(시간)이 계량 가능한 산출(레벨·아이템)로 전환되는 구조다. 그래서 법원이 재산적 가치를 인정할 여지가 있었다. 반면 팬덤의 산출물—아이돌의 인지도, 브랜드 가치—은 누가 얼마나 기여했는지 계량하기 어렵고, 기획사가 팬덤 전체를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게임 판례를 팬덤에 직접 이식하는 것은 무리한 비약이다.
그러나 시야를 넓히면 게임 판례는 더 큰 구조의 입구가 된다. 달라스 스마이드가 1970년대에 제안한 '오디언스 상품(audience commodity)' 개념은 시청자의 주목 자체가 광고주에게 팔리는 상품임을 지적했다. 이 통찰을 K-팝 팬덤에 적용하면, 팬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자신의 주의력과 정서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노동자다. 한국의 플랫폼 노동 판례—배달 라이더의 근로자성 인정, 콘텐츠 모더레이터의 노동권—는 이미 '계약상 자영업자'로 분류되던 이들에게 노동자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한편 같은 시기 영미권에서는 AI 저작권을 둘러싼 결정적 판례들이 쌓이고 있다. 미국 저작권청은 2023년 미드저니로 생성된 이미지를 포함한 그래픽 노블 〈Zarya of the Dawn〉에 대해, 작가의 텍스트와 작품의 선택·조정·배열에는 저작권을 인정하되 AI가 생성한 개별 이미지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분 등록 결정을 내렸다. "미드저니 사용자는 그 기술이 생성한 이미지의 저작자가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같은 해 미 지방법원은 Thaler v. Perlmutter 사건에서 "인간 저작권은 저작권의 근본 요건(bedrock requirement of copyright)"이라고 판시했고, 2025년 3월 DC 항소법원이 이를 확정한 뒤 2026년 3월 미 대법원이 상고 거부로 사실상 종결지었다. 미국 저작권청의 2025년 보고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롬프트는 저작권 보호받을 수 없는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지시일 뿐"이라고 명시했다.
영국 고등법원도 2025년 11월 Getty Images v Stability AI 사건에서 상표권 침해는 인정했으나 2차 저작권 침해는 기각했다—훈련 데이터로 사용된 작품의 권리 입증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이 흐름을 종합하면 세계 각국의 사법 경험은 디지털 시대의 '주체성·창작·노동'에 대해 다음 단서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첫째, 디지털 노동의 재산권(한국 던파 판례).
둘째, 디지털 흔적의 인격권(한국 개인정보 분류).
셋째, 플랫폼 노동의 근로자성(한국 라이더 판례).
넷째, 인간 저작권의 근본성(미국 Thaler·Zarya).
다섯째, 훈련 데이터의 바카라임 한계(영국 Getty).
이들을 결합하면, 미래의 어느 팬이 "내가 사랑한 AI 아이돌의 서비스가 일방적으로 종료되었다. 내가 투입한 시간과 정서적 노동에 대한 권리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청구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그리고 어느 AI 생성물의 저작권자가 누구인지 결정해야 할 의무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서구 비판이론은 아도르노 이래 백 년간 문화산업의 착취를 비판해왔지만, 구체적 청구권으로 거의 나아가지 못했다.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조디 딘의 커뮤니케이션 자본주의, 자론 라니어의 디지털 농노제—이들은 모두 진단의 언어였지 청구의 언어가 아니었다.
한국의 게임·플랫폼 노동 판례와 영미권의 AI 저작권 판례는 이 비판에 비로소 구체적인 법적 어휘를 제공한다. 이것이 디지털 미학의 정치경제학이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자리다.
처음에 우리는 벤야민의 아우라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지금, 아우라라는 단어는 더 이상 우리에게 유용하지 않다. 벤야민의 아우라는 객체의 속성—여기 지금의 유일성, 시공간적 환원불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정반대다.
가치는 객체의 속성이 아니라 공동체의 수행적 행위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아우라'라는 은유적 봉합 대신, 우리는 아우라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하고 새로운 어휘로 옮겨가야 한다.
그 어휘는 세 가지 정치적 질문으로 구성된다.
인정의 정치. AI가 만든 작품을 예술이라 부를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래미상은 AI 음악을 수상할 수 있는가. 법원은 AI 이미지의 저작권을 누구에게 귀속시킬 것인가. 이미 영미권 사법은 'AI 단독 생성물에는 저작권 없음'이라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미국 대법원은 2026년 3월 이 흐름을 확정했다. 다음 십 년의 창작 생태계는 이 판결들 위에서 구성될 것이다.
소유의 정치. 팬이 투입한 감정 노동과 시간은 누구의 소유인가.
게임 캐릭터의 성장 기록은 회사의 데이터인가 플레이어의 인격인가. AI 아이돌의 서사는 기획사가 독점할 수 있는가, 아니면 팬 공동체의 공동 창작물인가. 한국의 던전앤파이터 판례는 답의 한 조각을 이미 제공했다. 그 조각을 더 큰 모자이크로 확장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바카라무다.
분배의 정치. AI 모델의 훈련 데이터로 흡수된 기존 아티스트들은 보상받을 수 있는가.
빅테크가 독점한 생성형 AI의 수익은 어떻게 슬롯적으로 환수될 수 있는가. 영국 Getty 판결이 보여줬듯 입증의 장벽은 높지만, 질문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
세 질문에 우리는 아직 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박진영이 17년 전 칸느의 무대에서 "우리의 최종 상품은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산업의 미래를 정확히 예언했지만 동시에 그 미래의 가장 큰 정치적 질문을 미해결로 남겨두었다. 그 '사람'은 누구의 것인가? 기획사의 자산인가, 팬 공동체의 공동 창조물인가, 아니면 본인 자신의 인격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직 합의되지 않았기에, 미래의 팬이 "내가 사랑한 AI 아이돌과의 추억은 나의 일부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법적·제도적 효력을 가지려면, 우리는 예술을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와 노동의 장(場)'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감행해야 한다.
복제가 아우라를 파괴하는가?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객체에 묶여 있던 가치는 이제 공동체의 인정 행위로 해방되었고, 그 인정 행위의 분배 정의를 묻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졌다.
'찐이다'라는 감탄은 더 이상 사물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수행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그 선언을 누가 할 자격이 있으며, 그 선언으로 만들어진 가치는 누구에게 흘러야 하는가. 이것이 디지털 시대 예술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뜨거운 질문이다.
게이머가 "내 캐릭터는 내 개인정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어휘를 우리는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 확장은 철학자의 바카라상이 아니라, 법정과 의회와 거리에서, 무엇보다 우리가 매일 무엇에 시간을 쓰고 무엇을 '찐'이라 부를지를 결정하는 일상의 실천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