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거울
— 어떤 오류는 왜 살아남는가

2026 All-Day-Project (141/365)

byJamin

오류는 진리 발견 여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에 이어서 생각하기


1. 작년 글을 다시 펼치며


작년에 나는 오류에 대해 글을 썼다.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라는 제목이었다. 결론은 분명했다. 오류는 진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가는 길 위에 놓인 등불이다. 포퍼의 반증주의,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헤겔의 변증법 — 모두 같은 이야기를 다른 언어로 하고 있었다. 틀리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틀림으로써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간다.


지금 그 글을 다시 읽으며 위화감을 느꼈다.


내 주변에는 오류가 가득하다. MBTI, 사주, 타로, 별자리, 애니어그램, 그리고 최근에는 ChatGPT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야?"라고 묻는 사람들. 이 오류들은 작년 글이 말한 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반증되어도 사라지지 않고, 틀렸다고 증명되어도 계속 쓰인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준다.


이건 다른 종류의 오류인 것 같다. 작년에 내가 말한 오류와는 다른. 그게 뭘까.

이 글은 그 질문을 따라가는 글이다.


2. MBTI라는 사례


MBTI를 예로 들어보자. 가장 익숙하고, 가장 깔끔하게 그 메커니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리측정학적으로 MBTI의 문제는 잘 알려져 있다. 재검사 신뢰도가 낮아 같은 사람이 몇 주 뒤에 다른 유형이 나오는 일이 흔하고, 네 개의 이분법적 차원이라는 설정 자체가 실제 성격의 연속적 분포와 맞지 않는다. 학계가 표준으로 삼는 Big Five 모델과 비교하면 예측 타당도도 떨어진다. 한마디로, 틀린 도구다.


그런데 사람들은 쓴다. 단순히 모르고 쓰는 것도 아니다. "MBTI 별로 안 맞는 거 알지만 그래도 재밌잖아"라고 말하면서 쓴다. 알면서도 쓴다는 게 핵심이다.


왜일까. 진리 추구의 도구로 보면 답이 안 나온다. 도구가 부정확한데 왜 쓰겠는가. 그런데 이 도구가 진리 추구의 도구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의 도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MBTI는 자기소개의 인지적 압축이다. "INFP예요"라는 네 글자는, 잘 풀면 한 시간 분량의 자기 설명을 대체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달할 때, 이 압축은 놀라울 만큼 효율적이다. 정확하지 않아도 효율적이다.


MBTI는 슬롯적 신호이기도 하다. 내 프로필에 INFP라고 적는 행위는, 정보 전달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깝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다, 이런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다는 표명. 그리고 같은 유형을 쓴 사람들과의 묘한 유대.


자기 이해의 발판이라는 기능도 있다. 평소에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지 않은 사람에게 MBTI 결과지는 "당신은 이런 성향이 있습니다"라고 거칠게 윤곽을 그려준다. 그 윤곽이 정확하지 않아도, 그것을 보며 자기를 생각하기 시작할 수는 있다. 출발점이 부정확하다고 출발 자체가 무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타자 이해의 면허. "쟤는 T라서 그런 거구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상대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너그러워질 핑계를 마련하고 있다. 정확한 분석이 아니라, 갈등을 부드럽게 만드는 슬롯적 윤활제다.


이 네 가지 기능에 공통점이 있다. MBTI가 맞느냐 틀리느냐와 거의 무관하게 작동한다는 점이다. 자기소개의 압축은 압축이 일관되기만 하면 되고, 슬롯적 신호는 모두가 같은 기호를 쓰기만 하면 되고, 자기 이해의 발판은 발판이 정확할 필요가 없으며, 타자에 대한 너그러움은 그 자체가 가치다. 진리값은 부차적이다.


그러니까 이건 진리 도구가 아니다. 작년 글의 오류는 진리 도구 안에서의 오류였다. MBTI의 오류는 진리 도구가 아닌 것을 진리 도구처럼 보이게 입혀놓은 결과다.


진리의 옷을 입었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다른 일이다.


3. 거울이라는 메커니즘


조금 더 일반화해보자. MBTI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직접 볼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뇌 안에 있고, 그 뇌가 우리 자신이며, 우리는 그 뇌를 바깥에서 관찰할 위치에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외부의 거울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의 반응, 슬롯의 기준, 부모와 친구의 평가, 우리가 만든 작품.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MBTI는 그 거울 중 하나다. 사주도, 타로도, 별자리도. 그리고 요즘에는 AI도. "나는 어떤 사람이야?"라고 ChatGPT에게 묻는 사람은, 다른 시대의 사람이 점쟁이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윤곽을 묻고 있다.


괴델이 형식 체계에 대해 말한 것을 느슨한 비유로 빌리자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만으로 완전히 정의할 수 없다. 늘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자아라는 것 자체가 외부 거울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구조물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거울은 필요하다, 거울은 부정확해도 쓸모가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거울은 단지 나를 비춰주지 않는다. 거울은 나를 모양 잡는다.


INFP라고 진단받은 사람은, 그 진단 이후 자신의 행동을 INFP의 렌즈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감수성이 풍부한 자신을 더 자주 발견하고, 현실적인 결정에 약한 자신을 더 자주 의식한다. 원래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진단 이후의 그 사람은 진단 이전의 그 사람과 정확히 같지 않다는 점이다. 거울이 그를 약간 변형시켰다.


사주에서 역마살이 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자신이 떠나는 순간들을 더 잘 기억한다. 안 떠나는 순간들은 흘려보내고, 떠나는 순간만 모아서 "역시 나는 역마살이야"라는 서사를 만든다. 거울이 그 사람의 자기 서사를 편집한 것이다.


ChatGPT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서 "당신은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답을 들은 사람은, 그 다음부터 자기 안에서 깊이 있는 사고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찾으면 어디든 있다. 거울은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변형시킨다.


이게 정체성 도구로서의 오류가 작동하는 진짜 메커니즘이다. 자기실현적 예언이라는 단어가 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이지만, 그 표현은 너무 가볍다. 이건 단순히 예언이 실현되는 정도가 아니다. 자아의 일부가 외부 도구에 위탁되는 일이다.


위탁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산다. 우리는 부모의 거울, 친구의 거울, 슬롯의 거울에 자아를 위탁해왔다. MBTI나 사주나 AI는 그 거울 목록에 추가된 새 항목일 뿐이다. 거울 없이는 자아도 없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 어떤 거울에 위탁할 것인가. 둘째, 위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가.


4. 거울을 의식하며 쓰는 법


여기서 메타인지가 등장한다.


오해를 먼저 풀자. 메타인지는 지능과 다르다. 똑똑한 사람이 자기 MBTI 결과를 더 정교한 언어로 합리화하는 모습은 흔하다.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사주에 결정을 의지하는 일도 흔하다. 인지 능력이 높은 것과, 자기가 어떤 도구로 자기를 보고 있는지를 알아채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메타인지는 정확히 그 후자다. 지금 내가 어떤 거울 앞에 서 있는지를 의식하는 능력. 이 거울이 무엇을 비추고 무엇을 빠뜨리는지, 이 거울이 나를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를 알아채는 습관.


이건 훈련 가능한 습관이다. 천재여야 가능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 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한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다. "나는 INFP야"라고 말한 다음, 마음속에서든 입 밖으로든 한 문장을 덧붙인다. "라고, MBTI라는 도구가 말한다." 이 한 문장이 거울을 의식하게 만든다. 거울 안의 상과 거울 자체를 분리시킨다.


사주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올해 운이 안 좋대"라고 말한 다음, "라고 이 해석 체계가 말한다"를 붙인다. ChatGPT의 답변을 받았을 때도, "이 모델이 이렇게 답했다"를 잊지 않는다. 이 작은 거리두기가 위탁의 방향을 바꾼다. 거울이 나를 모양 잡는 게 아니라, 내가 거울을 들고 쓰는 사람이 된다.


물론 이게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실존적 결정 앞에서, 우리는 거울을 의심할 여유를 잃는다. 위기일수록 우리는 거울에 더 깊이 의지하게 되고, 의지할수록 거울은 우리를 더 강하게 변형시킨다. 메타인지는 평온할 때 길러두어야 위기에 작동한다. 위기에 와서 기르려고 하면 늦다.


5. 다시 궁금증으로


이 글은 작은 위화감에서 시작했다. 작년 글이 말한 오류와, 내 주변에 가득한 오류가 같은 종류의 오류가 아닌 것 같다는 위화감.


이제 답을 정리할 수 있다. 작년의 오류는 진리 도구 안에서 진리를 향해 가는 과정의 오류였다. 이번 글의 오류는 진리 도구가 아닌 것이 진리 도구의 옷을 입고 작동하는 오류다. 정체성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본업을, 마치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수행하는 오류.


이 오류는 살아남는다. 반증되어도 살아남는다. 자아의 거울이라는 기능이 진리값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남는 동안, 우리를 조용히 모양 잡는다.


여기까지 오니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내가 지금 나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그동안 어떤 거울들을 거쳐온 결과인가. 내가 INFP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어디서 왔는가.


그 진단을 받기 전의 나와 받은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거울 없이는 자아가 성립하지 않고, 거울은 항상 나를 변형시킨다면 — 내가 내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내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내 것인가.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거울을 깨뜨릴 필요는 없다는 것. 거울 없이 살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울을 의식하며 쓰는 것이다. 비치는 상과 거울 자체를 구분하면서, 어떤 거울을 들 것인지를 고르면서, 그 거울이 나를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를 가끔씩 멈춰 서서 들여다보면서.


그게 어쩌면, 오류와 함께 살아가는 한 가지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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