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40/365)
(앞 글 「모두가 페라리를 타지만」의 자매편)
우리는 AI가 "이제" 시장에 들어왔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인간의 이성은 이미 30년 동안 금융 시장에서 천천히 퇴장하고 있었다. 오늘날 미국 주식 거래량의 약 70%가 알고리즘에 의해 집행된다. 외환 현물 시장에서는 그 비율이 70~90%에 이른다. 우리는 이미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인간이 하지 않는 시장에 살고 있다.
그 결과는 모두가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호가 스프레드는 좁아졌고, 거래 비용은 떨어졌고, 차익거래 기회는 빠르게 닫혔다. 시장은 더 "효율적"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변동성을 얻었다. 2010년 5월의 플래시 크래시. 2015년 미국 국채 시장의 갑작스러운 붕괴. 2024년 10월 엔화가 90초 만에 3% 폭락한 사건. 알고리즘이 서로의 행동을 예측하며 동시에 반응하는 시장에서, 비합리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이 첫 실험실이 우리에게 풍경을 보여준다. 합리적 행위자가 제한 합리적 행위자를 대체하면, 고전 경제학의 가정들은 서술적으로 더 정확해진다. 그러나 그 가정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고전 경제학자들이 상상한 세계가 아니다.
지난 30년간 시장의 "이상한" 움직임을 설명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은 행동경제학이었다.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손실 회피, 탈러의 멘탈 어카운팅, 시몬의 제한 합리성, 가용성 휴리스틱, 앵커링, 매몰 비용 오류 — 이 발견들은 의사결정의 보편 법칙처럼 다뤄졌다.
그러나 그것들은 보편 법칙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특정 종의 인지적 특성이었다. 진화의 잔여물이고, 뇌의 구조이지, 선택 행위 자체의 본질이 아니다. 행동경제학이 발견한 것은 결정의 법칙이 아니라 뇌의 특이성이었다.
AI는 손실 회피가 없다. 앵커링이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존심 때문에 손절을 미루지 않는다. 부모님께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자산을 들고 가지 않는다. 가족 회사가 망해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매몰 비용을 더 투입하지 않는다. 행동경제학이 30년간 발견한 모든 결함은, 그 결함을 가진 종이 의사결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 의미를 잃는다.
이것은 행동경제학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행동경제학은 특정 시대의 과학이었다는 말이다 — 인간이 시장을 움직이던 시대를 다룬 학문. 그 시대가 저물면서, 행동경제학은 반박당하는 게 아니라 역사화된다. 18세기 의학사처럼.
그리고 역설적으로, 한때 비현실적이라고 조롱받던 고전 경제학의 합리적 행위자 — 호모 에코노미쿠스 — 가 서술적으로 정확한 모델이 되어간다. 인간이 그 모델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그 모델에 도달한 행위자들(AI)이 인간을 대체하면서. 우리는 200년 만에, 의도치 않게, 애덤 스미스가 상상했던 세계의 입구에 도착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자.
합리적 의사결정은 늘 비싸고 피곤한 노동이었다. 분석, 비교, 시뮬레이션, 위험 계산. 이 모든 것은 시간과 지능을 요구했다. 그래서 합리성은 인류 역사 내내 불균등하게 분포된 자원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대리 합리성을 살 수 있었다. 변호사, 회계사, 자산 관리사, 컨설턴트, 충분히 오래 생각할 시간을 가진 의사. 그들은 자기 대신 합리적 의사결정을 수행해주는 전문가 네트워크를 돈으로 구입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직감과 가족의 조언과 동네의 평판에 의존했다.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은, 인류 역사 내내 슬롯 계급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AI는 이 계급 차이를 상품화한다. 누구나 좋은 분석을 받을 수 있다. 누구나 시장의 가격 차이를 즉시 안다. 누구나 시나리오를 돌릴 수 있다. 이성은 능력에서 구독으로 강등된다.
지능에서 도구로. 지적 성취에서 소비재로.
이 변화는 분명히 평등화처럼 보인다. 민주적이고, 해방적이다.
더 이상 가난하다는 이유로 비합리적 결정을 강요당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 그리고 여기서부터 이 글의 본론이 시작된다 — 합리성의 평준화는 평등의 평준화가 아니다.
두 가지 이유다.
첫째, 합리성은 상대적이다. 모두가 합리성 1.0을 갖게 되면, 합리성 1.5를 가진 쪽 — 더 강한 모델, 더 많은 데이터, 더 빠른 인프라, 더 정교한 프롬프트 — 이 모든 것을 가져간다. 격차는 절대적 수준이 아니라 상대적 우위에서 발생한다. 이건 앞 글의 "트랙" 비유와 같은 논리다. 페라리가 흔해진다고 1등이 모두에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둘째, 그리고 이게 더 결정적이다 — 합리성이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곧 시장에서 마찰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표현이 핵심이다. 마찰. 균열. 비효율. 비합리성. 그 모든 것이 빠져나간 시장. 그 시장에서 자본은 자기 효율의 끝까지 도달한다. 그 도달의 풍경은 평등이 아니라 완전한 추출이다.
여기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 한다.
자본주의의 마지막 친구는 우리의 비합리성이었다.
이 문장이 이 글의 가장 단호한 주장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보지 못해온 풍경이다. 우리는 행동경제학적 "결함"들을 고쳐야 할 결함으로만 보아왔다. 자기 자신을 더 합리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그 결함들은 결함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자본의 추출 기계를 멈추게 하는 모래알이었다.
사람들은 정 때문에 동네 가게에서 산다. 글로벌 최적이 아니다.
그러나 그 비효율이 동네를 살린다.
사람들은 부모님 집을 팔지 않는다. 엔다우먼트 효과다.
그러나 그 비효율이 가족의 기억을 보존한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브랜드에 프리미엄을 낸다. 가격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그 비효율이 정체성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망해가는 가족 회사를 끝까지 지킨다. 매몰 비용 오류다.
그러나 그 비효율이 의미를 지킨다.
사람들은 손해 보는 줄 알면서도 친구의 사업에 투자한다.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그 비효율이 우정이라는 것의 실체다.
이 모든 비합리성은 자본 추출의 최적화를 방해하는 모래알이었다. 자본은 늘 완전 최적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도달하지 못함의 공간에 인간적 삶이 있었다. 동네 가게가, 부모님 집이, 정체성이, 의미가, 우정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이 모래알들 덕분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부분적으로 보호해왔던 것이다.
AI 매개 시장은 이 모래알을 깨끗이 걷어낸다. AI 가격 비교는 동네 가게에서 사는 일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매번 정확한 수치로 보여준다. AI 자산 관리는 부모님 집을 들고 있는 기회비용을 매달 알려준다. AI 쇼핑 에이전트는 브랜드 프리미엄이 얼마나 가격에 부당하게 반영된 거품인지 보고서로 제출한다. AI 투자 자문은 친구에게 한 투자가 포트폴리오 측면에서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매일 상기시킨다.
합리적 압력 앞에서 인간의 비합리성은 천천히 무너진다. 의식적으로 그것을 지키는 사람만 빼고는.
금융 시장은 첫 번째 실험실이었을 뿐이다. 같은 논리가 이제 의사결정의 모든 영역으로 침투한다. AI 쇼핑 에이전트, AI 가격 비교, AI 협상 도구, AI 진로 상담, AI 의료 진단, AI 부동산 분석, AI 보험 가입자 평가, AI 데이팅 매칭.
사람들은 이 변화를 환영할 것이다. 환영해야 마땅하다. 의사결정은 피곤한 노동이고, 우리는 그 피로에서 해방되기를 오래 갈망해왔다. 어떤 차를 살지, 어떤 보험에 들지, 어떤 약을 먹을지, 어떤 진로를 택할지 — 이 모든 결정을 신중하게 내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지능을 모두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실 불공평하다. 합리성의 도구화는 그 부담을 덜어준다.
그러나 그 해방은 동시에 경제적 마찰의 마지막 잔여물까지 갈아낸다. 우리는 더 나은 소비자가 된다. 더 나은 투자자가 된다. 더 나은 의사결정자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 어떤 빈틈도 남기지 않는 시장에 노출된다. 효율적으로 추출당하는 법을 배운다. 가격 차별 알고리즘은 우리가 정확히 얼마까지 지불할 의향이 있는지를 안다. 보험 알고리즘은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자산인지를 안다. 신용 알고리즘은 우리가 얼마까지 빌릴 수 있고 얼마까지 갚을 수 있는지를 안다.
합리적 행위자가 합리적 행위자를 마주할 때, 정보 우위와 자본 우위를 가진 쪽이 모든 것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 우위를 가진 쪽은 늘 정해져 있다.
이 글이 도달한 풍경은 정치적이다.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말하자.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완성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약속은 늘 같았다. 시장을 더 자유롭게, 더 효율적으로, 더 합리적으로 만들면 모두가 더 잘살게 된다. 마찰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정보 흐름을 가속화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최적의 결과를 만든다.
이 약속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자본의 저항도, 노동의 저항도, 국가의 저항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비합리성이었다. 사람들은 합리적 행위자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가 상정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거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늘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다. 비효율적 동네 가게가 살아남았다. 비합리적 가족 회사가 명맥을 유지했다. 정 때문에 이루어지는 거래가 시장의 빈틈을 채웠다.
AI는 이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한다. 의사결정을 도구화함으로써, 인간을 부분적으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변환시킨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우리의 의사결정은 알고리즘의 권유를 따라 점점 더 "최적"에 수렴한다. 그리고 그 수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약속이 처음으로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 그것이 결코 평등의 약속이 아니었다는 진실이 함께 드러나면서.
고전 경제학은 옳아져 간다. 200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는 애덤 스미스가 상상한 세계에 가까워지고 있다. 합리적 행위자, 거의 무마찰의 시장, 거의 완전한 정보. 그러나 그 세계는 스미스가 상상한 평화로운 분업의 세계가 아니라, 자본이 자기 효율의 끝까지 도달한 추출의 세계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진짜 종착점이었다.
이 풍경 앞에서 우리에게 남은 행위자성은 무엇인가.
앞 글은 말했다 — 자기만의 평가 루프를 만들라.
기존 평가자의 채점을 기다리지 말고, 작게라도 자기 트랙을 그리라.
이 글은 그 짝을 말한다 — 의도적인 비효율을 보존하라.
합리성을 거부하라는 말이 아니다. 합리성이 모든 결정의 최종 심판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라는 말이다. 어떤 결정은 비효율적이어야 한다. 어떤 거래는 손해여야 한다. 어떤 선택은 계산되지 않아야 한다. AI가 보여주는 기회비용 보고서를 보고도, 부모님 집을 들고 가야 한다. 가격 비교가 보여주는 절감액을 알면서도, 동네 가게에서 사야 한다. 포트폴리오 최적화가 권하지 않는데도, 친구의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이 자기 효율의 끝까지 도달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지막 정치적 행위다. 모래알 하나하나를 의식적으로 시장에 던져 넣는 일이다. 자본주의의 마지막 친구였던 우리의 비합리성을, 이제는 선택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일이다.
앞 글의 자기 트랙과 이 글의 의도적 비효율은 같은 의지의 두 얼굴이다. 자기를 도구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 자기 평가를 외주하지 않고, 자기 비합리성을 검열당하지 않겠다는 의지. 합리성의 구독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비효율의 옹호자로 남겠다는 의지.
페라리가 흔해졌고, 이성마저 구독이 되고 있다. 트랙도 그들의 것이고, 최적화 알고리즘도 그들의 것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무엇에 대해 비합리적일지를 선택하는 권리는 — 아직, 여전히, 우리의 것이다.
그 권리가 남아 있는 한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가장 인간적인 정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