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의 시대, 7년 후

2026 All-Day-Project (121/365)

byJamin

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59: 조직의 창의성 에 이어서


7년 전에 창의성에 대한 글을 썼다. 조직에 창의성이 필요하고, 그 창의성은 수단이며, 조직이 창의성을 이끌어내려면 안정성과 여유와 재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일개 조직원의 수년간 고민의 결과라고 겸손하게 마무리했는데, 7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니, 틀렸다기보다는 — 덜 말했다.


그때 나는 '창의성'이라는 단어에 붙어 있는 마법의 냄새를 걷어내고 싶었다. 번뜩이는 천재, 목욕탕의 아르키메데스, 유레카의 순간. 그런 것들. 그래서 창의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새로운 무언가. 그러나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결과가 중요하다고 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같다.


달라진 건, '새로운'의 무게다.


새로움이 싸진 시대


2019년에 글을 쓸 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비쌌다. 비용이 들었다. 사람이 모여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테스트하고, 실패하고, 다시 모이고. 디자인 싱킹의 다이아몬드를 한 바퀴 돌리는 데 몇 주가 걸렸다. 100개의 아이디어를 내고 99개를 버리는 과정은 그 자체로 거대한 투자였다.


지금은? 솔직히 말하면, 아이디어는 넘쳐난다. AI에게 물어보면 10초 안에 20개를 준다. 대부분 쓸만하다. 프로토타입도 하루면 나온다. 코드를 몰라도 된다. 디자인을 몰라도 된다. How를 실행하는 비용이 극적으로 떨어졌다. 내가 2016년에 쓴 글에서 '몽상가와 실행가'를 나눴는데, 실행가의 진입장벽이 바닥을 뚫은 셈이다.

그러면 창의성의 가치가 떨어진 걸까?


아니다. 정반대다. 다만,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How에서 Why로


예전에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창의성의 주 전장이었다. 플래시 드라이브가 안 되면 하드 드라이브를 넣으면 되지 — 아이팟의 그 유명한 일화처럼. 기술적 제약 속에서 우회로를 찾는 능력,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방법을 찾는 능력. 그것이 곧 창의성이었다.


그런데 우회로를 찾는 일을 AI가 꽤 잘하게 되었다. ClickHouse 쿼리를 최적화하는 방법도, 리테일 매장의 동선 분석 로직도, 보고서를 예쁘게 만드는 것도. How의 영역에서 AI는 이미 웬만한 사람보다 빠르고 저렴하다.


남는 건 뭘까. "이 문제를 왜 풀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정말 풀어야 할 문제인가?"


7년 전 글에서 나는 "수단으로의 창의성의 시작은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때는 논리적 분석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목적을 쪼개고 쪼개서 맥락을 이해하면 된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 보면 너무 깔끔하게 말했다. 현실에서 목적을 설정하는 일은 논리만으로 되지 않는다.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이걸 하겠다"고 선언하는 일. 그건 분석이 아니라 결단이다.


그리고 결단에는 신념이 필요하다.


번뜩임의 환상, 노력의 현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7년 전에 나는 아이디어의 무덤이라는 표현을 썼다. 창의적 결과물은 수많은 실패한 아이디어 위에 서 있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쓸 때 나는 아직 그 무덤을 직접 파본 적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좀 안다. 수십 번의 프로토타입이 고객 앞에서 무너지는 경험. 몇 달을 공들인 방향성이 한 번의 미팅에서 뒤집히는 경험. 그리고 그 와중에도 팀원들에게 "우리가 가는 방향이 맞다"고 말해야 하는 경험.


창의성이 번뜩임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번뜩임은 기다리면 되니까. 그런데 현실의 창의성은 번뜩임이 아니라 반복이다.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것. 그걸 포기하지 않는 것. 결국 창의성의 본질은 노력의 지속이고, 그렇다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넘어온다 — 그 노력을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


7년 전에 나는 이걸 조직의 제도적 조건으로 풀려고 했다. 안정성, 여유, 재미.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그릇이었고, 그릇 안에 뭘 담아야 하는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릇에 담아야 할 것


몇 년간 팀을 이끌면서 깨달은 건,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완벽한 제도가 있어도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는 건 제도가 아니라 동기다.


동기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묘한 곳에 다다르게 된다. 스킬을 가르치는 교육은 유통기한이 짧아졌다. AI가 6개월마다 판을 뒤엎는 세상에서, 특정 도구의 사용법을 가르치는 건 모래 위에 글씨를 쓰는 것과 같다. 그러면 교육이 다뤄야 할 건 뭘까? 태도. 신념.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각자의 답.


이상한 비유일 수 있는데, 종교를 생각하게 되었다. 수천 년간 사람들을 움직여온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 시스템. 종교가 하는 일을 뜯어보면 — 세계관을 제공하고, 의례를 반복하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만든다. 교회가 매주 예배를 드리는 건, 한 번 설교를 들으면 평생 믿기 때문이 아니다. 반복을 통해 신념이 체화되기 때문이다.


조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오프라인을 재발명한다"는 말을 한 번 했다고 팀원이 매일 그걸 믿으며 출근하지는 않는다. 반복되어야 한다. 보여져야 한다. 작은 성공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다시 쓰는 조건


그래서 7년 전의 프레임을 다시 쓴다.


안정성은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때의 안정성이 "실패해도 월급은 나온다"였다면, 지금의 안정성은 "AI가 내 역할을 대체해도 나는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정체성의 안정이다. 고용의 안정이 아니라 역할의 안정.


여유도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식 빈둥거림의 여유가 아니라, 빠르게 시도하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밀도 높은 여유로 성격이 바뀌었다. AI 덕분에 시행착오의 단가가 낮아졌으니, 여유는 속도를 늦추는 게 아니라 더 많이 시도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재미 — 이건 좀 더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이미피케이션이라고 가볍게 썼던 7년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재미의 본질은 게임이 아니라 의미라고. 내가 하는 일이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그 연결이 끊어지면 어떤 보상도 재미가 되지 않는다.


정리하면 이렇다. 안정성은 신념으로, 여유는 리듬으로, 재미는 작은 승리로. 7년 전에는 조직이 갖춰야 할 조건을 말했다면, 이번에는 그 조건 안에 담아야 할 내용물을 말하려 한다.


다음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겠다.




이 글은 2019년에 쓴 '창의성의 시대'의 후속입니다. 7년 전 글에서 "일개 조직원의 수년간 고민의 결과"라고 했는데, 이제는 팀을 이끄는 위치에서 다시 고민하고 있습니다. 결국 같은 질문인데, 답하는 자리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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