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262/365)
geeknews, ai;dr 글을 보다가
요즘 내가 쓰는 글이 좀 이상하다. AI 도움을 받아 쓰다 보니 문장은 깔끔해졌는데, 어쩐지 너무 깔끔해서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가 직접 쓴 것처럼' 만들려고 더 다듬고, 수식어를 지우고, 출처를 찾고, 다른 AI로 교차 검증까지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설명한 글을 다시 읽어보니, 그것조차도 AI가 가장 잘 쓰는 형식의 블로그 포스트와 닮아 있었다. 'AI가 쓴 글은 너무 길어서 읽기 싫다(AI;DR)'며 외면하는 시대에, 정작 내가 '인간답게' 쓰려고 발버둥 친 결과물이 AI가 읽고 학습하기 딱 좋은 정형화된 구조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씁쓸하다.
이 지점에서 내가 느낀 건 '허탈감'이었다. 그리고 그 허탈감은 이런 질문들을 데리고 왔다.
과연 우리는 AI를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걸까, 아니면 거대한 언어 통계의 반사판 앞에서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걸까? 그리고 '사진기'가 등장했을 때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이 했던 불평과, 지금 우리가 AI 글쓰기에 대해 하는 불평은 얼마나 다를까?
19세기, 사진기가 등장했을 때 화가들은 혼란스러웠다. "사진은 예술이 아니다", "그림의 영혼을 죽인다"는 탄식이 쏟아졌다. 그런데 역사는 그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진은 그림을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인상파와 추상미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사진이 '재현'을 대신하게 되자, 인류는 '재현'에서 해방되어 '표현'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의 화가들과 지금의 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AI가 정보 정돈과 문법적 결함 제거, 논리 구조화 같은 '글쓰기의 재현'을 완벽하게 대신하게 되자, 나는 불안해졌다. 그래서 '내가 직접 썼다'는 증표이자 인간 고유의 감정적 떨림과 경험의 맥락을 남기기 위해 더 많은 장치를 덧붙였다. 그런데 그 장치들이 오히려 나를 더 AI에 가깝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사진기가 나온 뒤 그림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림의 의미는 분명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AI가 글쓰기를 대신하게 되면서 글쓰기의 의미도 바뀌고 있다. 나는 이 변화를 거부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이미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생각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전기 신호다. 아이디어는 그 혼란을 언어라는 그물로 건져 올린 첫 번째 추상화다. 그리고 글쓰기는 그 아이디어를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시 구조화하고 다듬는 과정이다.
그런데 AI가 이 과정 사이에 끼어들면서,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AI에게 던진 질문이 생각이고, AI가 내뱉은 답변이 아이디어이고, 내가 그걸 다듬는 게 글쓰기일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기 전에 AI가 대신 생각을 조합해주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나는 '내가 먼저 질문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아이디어의 소유권은 내가 가져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원칙조차도 의심스럽다. 내가 던진 그 질문이 정말 '순수하게 내 것'일 수 있을까? 평생 읽은 바카라, 본 영화, 들은 대화, 그리고 이미 AI를 통해 접한 수많은 정보들이 내 질문을 형성했을 텐데.
양이 질을 만든다는 말처럼, 방대한 인터넷 데이터의 바다 덕분에 우리는 걸작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AI가 데이터 생산 속도를 극단으로 끌어올린 지금, 우리는 정보의 풍요가 아닌 통찰의 빈곤을 겪고 있다. AI는 이 생산량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도구다.
그러면 그 홍수 속에서 '질'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누군가는 말한다. 앞으로는 '진짜(authentic)'가 희소해질 것이고, 결국 진짜가 가장 비싼 가치를 가질 거라고.
그런데 그 '진짜'란 무엇일까? 잘 다듬어진 문장이 아닌, 덜 다듬어졌지만 내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무언가? 아니면 잘 다듬어졌으면서도 내 경험과 통찰이 배어 있는 무언가?
최근 뉴스에서 본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 망한 회사의 내부 커뮤니케이션 데이터, 이메일과 메신저 기록이 100억이 넘는 가격에 팔렸다고 한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온라인 게임인의 대화 기록이지만, 그 데이터는 AI가 학습하지 못한 '인간이 실제로 판단을 내리고 실수하고 용서하고 결정을 번복했던 흔적'이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우리는 이미 누구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데이터 경제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이 학습 데이터가 될 것이고, 그 데이터는 다시 AI를 만들고, 그 AI는 다시 글을 쓰고, 그 글이 다시 학습된다.
이런 자기복제의 루프 속에서 원본은 점점 희석되고, 결국 인터넷은 AI가 생성한 인공 텍스트를 다시 AI가 학습하는 오염과 자가소모(Model Collapse)의 선순환, 일종의 데이터 식인 현상을 겪고 있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고민한 날것의 데이터는 점점 사라지고, AI가 만들어낸 '그럴듯한 복제품'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둘째, 기존 지식인들의 권위는 해체되고 있다. 예전에는 특정 주제에 대해 깊이 알려면 전문가의 바카라을 사야 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AI에게 물어보면 그럴듯한 종합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지식의 독점이 깨지고 있다. 하지만 권위가 해체된다고 해서 진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기준이 '누가 더 많이 아는가'에서 '누가 더 진실하게 경험하고 성찰했는가'로 옮겨갈 뿐이다.
정리하자면, 나는 이런 혼란 속에서 몇 가지를 붙잡고 있다.
첫째, 내가 전하는 이야기는 반드시 내 삶의 흔적과 불완전함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아무리 AI가 완성도 높은 문장을 뱉어내더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번복하며 고민했던 내 시행착오와 감정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것은 내 글이 아니다. 정교함은 AI의 영역일지 몰라도, 인간의 불완전함이야말로 AI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진짜 내 글의 핵심 동력이기 때문이다.
둘째, 도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도구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것. 사진기 앞에서 "이건 예술이 아니야"라고 외치던 화가들의 태도를 답습하고 싶지 않다. 동시에 버튼 하나로 생성된 글을 내 글로 포장하는 태도도 취하고 싶지 않다.
셋째, 내가 쓰는 글이 언젠가 AI의 학습 데이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그렇다면 그 데이터에는 최소한 '이건 인간이 썼고, 이 인간은 이런 실수를 했고, 이런 고민을 했다'는 흔적이 남아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사진기가 세상을 바꿨지만 그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AI가 글쓰기를 바꾸고 있지만, 인간의 글쓰기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 의미와 방식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복판에서 나는 여전히, 어떤 문장을 내 이름으로 남길지 고민하고 있다.
이게 정답은 아니다. 그냥 지금의 내가 도달한 지점일 뿐이다. 아마 내일은 또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