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261/365)
지식노동자라면 데이비드 앨런의 GTD를 한 번쯤 접해보았을 것이다. 수집하고, 처리하고, 정리하고, 검토하고, 실행하는 이 다섯 단계의 프레임워크는 수십 년간 생산성의 기준으로 자리잡아왔다.
"당신의 머리는 생각하는 곳이지,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질문이 바뀌었다. 실행의 상당 부분을 인공지능 에이전트에게 위임할 수 있다면, GTD는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가?
에이전틱 AI의 등장은 GTD의 실행 단계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기존에는 다음 행동을 내가 직접 수행해야 했다. 이메일 초안을 쓰고, 보고서를 검토하고, 회의록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하지만 이제는 프로젝트 단위로 위임할 수 있다. "고객사 협상 전략을 수립하라"는 명령 하나로 최상위 오케스트레이터 에이전트가 하위 전문 에이전트들을 병렬로 가동해 시나리오를 도출해낸다.
인간은 더 이상 전술가가 아니라 전략가가 된다. 내리는 결정의 성격도 바뀐다. 문장 하나하나를 수정하는 대신, 어떤 위험 수준까지 감수할 것인지, 어떤 가치에 무게를 둘 것인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위임이 깊어질수록 검증의 부담은 커진다. 에이전트가 제시한 결과물이 신뢰할 만한지, 그 과정에서 어떤 가정이 숨어 있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완성된 보고서를 받아서 읽는 것보다, 구조만 있는 뼈대를 받아서 내 직관을 덧씌우는 방식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에이전트에게 사실과 데이터의 수집은 맡기되, 추론과 스타일은 인간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워킹 스켈레톤 전략이다.
빈 캔버스 앞에서 막막해지지 않으면서도, 완성된 결과물에 대한 맹신을 피할 수 있는 절충안이다.
그렇다면 판단의 자동화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인간의 결정이 축적되면, 에이전트는 스스로 학습해 일부 결정을 대행할 수 있다. 이는 자율주행 단계에 비유할 수 있다. 특정 조건 아래에서는 에이전트가 알아서 실행하되 한계 상황에서는 인간에게 개입을 요청하는 수준, 그리고 특정 도메인에서는 인간의 개입 없이 완전히 자동화되는 수준까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에이전트는 도구일 뿐이다. 카메라가 아무리 좋아져도 무엇을 찍을지, 어떤 구도로 담을지는 사진가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에이전트의 실행 결과에 대한 바카라임, 즉 법적이고 도덕적인 바카라임은 오직 인간에게 있다. 에이전트가 내린 결정을 내 결정으로 인정할 것인지는 결국 내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의 하루는 어떻게 재구성될까. 아침에 일어나 오늘의 의도와 집중 영역을 음성으로 입력하면, 에이전트는 밤새 쌓인 이메일과 메시지를 그 맥락에 맞게 분류하고 우선순위를 정해준다. 출근 전 15분 동안 여러 프로젝트의 골격을 훑어보며 직접 처리할 것인지, 에이전트에게 위임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낮에는 직접 개입이 필요한 영역, 가령 인간관계나 창의적 통찰이 필요한 작업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에이전트가 병렬로 처리한다. 퇴근 전에는 오늘 에이전트가 자동으로 처리한 결정 로그를 검토하고, 앞으로의 자동화 임계치를 조정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의식적으로 내리는 결정은 하루에 다섯여섯 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머지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놓은 판단 데이터가 대신 처리하는 셈이다.
그러나 완전한 자동화는 위험하다. 환경은 변하고, 내 우선순위도 변한다. 한 번 완성된 자동화 루프는 과거의 최적해에 갇히기 쉽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중간에 리뷰를 강제하는 장치다.
자동화 루프에 유효 기간을 설정하고 만료 시 재승인을 요청하거나, 결과물의 신뢰도가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면 인간의 검토를 유도하거나, 매일 입력하는 내 의도와 기존 자동화 루프의 방향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경고를 보내는 방식 등이 고려될 수 있다.
이 장치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는 아직 하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GTD의 주간 리뷰라는 기존 관행과 어떻게 통합될지가 앞으로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에이전틱 AI는 GTD를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GTD의 본질인 마음의 평정심을 더욱 강화해준다. 인간은 일의 세부에서 해방되어, 무엇을 위임하고 어디에 개입할 것인지라는 더 높은 차원의 전략적 사고에 집중할 수 있다.
미래 지식노동자의 핵심 역량은 일을 잘 처리하는 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작업을 어느 수준까지 자동화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위험 감수 능력과 시스템 설계 능력이 될 것이다. 에이전트는 도구이고, 바카라임은 인간에게 있다. 그 경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