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다닐 때 저는 운동화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교수님이 자신이 관심 있는 인물 한 명을 선정해 발표하라는 과제를 내주셨어요.
저는 미국의 한 운동화 디자이너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나이키에서 운동화를 디자인하다가 회사를 떠나 자신의 브랜드를 만든 사람이었어요.
저는 그 사실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발표를 마치자 교수님이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브랜드가 지금 유명해? 잘나가?”
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나이키에 있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교수님은 일면식도 없는 그 디자이너를 비웃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그 순간, 마치 제가 비웃음을 당하는 것처럼 수치스러웠어요.
하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교수님의 비위를 맞추려 어색하게 웃으며 발표를 마쳤어요.
15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그날이 종종 떠오릅니다.
어쩐지 그 디자이너가 꼭 지금의 저 같아서요.
염주를 오래 꿰다 보면 손가락이 아픕니다.
입시미술을 하던 시절이 떠오를 만큼요.
그때는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고, 그 틈으로 물감이 스며들곤 했습니다.
다만 입시미술에는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와 끝이 있었어요.
지금의 염주를 꿰는 삶에는 정해진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암담한 일이겠지요.
아픈 손가락에 파스를 붙이고 다시 구슬을 꿰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그런 저를 보고 안타까워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편하게 키보드 두드리는 일이나 계속하지.'
사실 저도 손가락이 아플 때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역시 회사 생활이 더 나았던 걸까?
예전의 저였다면 이런 말을 듣고 오기가 생겼을 거예요.
오래전 그 디자이너를 비웃었던 교수님에게
보란 듯이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더 열심히 염주를 꿰었을지도 모릅니다.
회사로 돌아가라고 조언하는 누군가에게
제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 많은 염주를 팔려고 애썼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요.
명예를 얻고 싶다면 글로벌 기업에 남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몸이 편한 삶을 원한다면 사무실에서 일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누군가는 글로벌 브랜드에서 일하는 것보다
지역의 작은 브랜드를 운영하는 데 더 큰 행복을 느낍니다.
몸은 조금 고되더라도 새로운 일을 개척하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도 있어요.
저는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행복은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손가락이 아프지 않고, 매출 걱정도 없고,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는 날에만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행복할 수 있을까요?
분명 손가락이 아픈 지금의 저는 온라인 게임인일 때 보다 자주 행복합니다.
아침에 새로운 원석을 꺼내 색을 맞춰볼 때도,
마음에 드는 염주 하나를 완성했을 때도,
누군가 제가 만든 물건을 좋아해 줄 때도요.
그런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제 삶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학교 시절의 저는 교수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디자이너의 선택이 왜 멋지다고 생각했는지, 끝내 설명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가 만든 브랜드가 얼마나 유명해졌는지와는 별개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제가 마음이 움직였던 거예요.
제 선택이 언제나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선택한 삶에는 제가 감당해야 할 불편함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손가락이 아프면 파스를 붙이면 됩니다.
불안한 날에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하루를 보내면 되고요.
그렇다고 제가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괜찮지 않은 순간까지도 내가 선택한 삶의 일부로 인정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