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멈추는 나라, 봄에 달리는 나라
며칠 전 딸이 졸업한 고등학교 앞을 차로 지나갔다. 졸업식이 한창이었다. 운동장에는 졸업 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가득 앉아 있었고, 학교 주변은 평소보다 훨씬 북적였다.
신호등 앞에 잠시 멈춰 선 동안 졸업식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딸 졸업식 날의 공기까지 함께 떠올랐다.
그때도 신기했다. 졸업은 분명 끝인데 분위기는 끝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억하는 졸업식은 겨울이었다. 코트 깃을 세우고 졸업장을 받는다. 친구들과 사진 몇 장 찍고 헤어진다. 축하하는 날이지만 한편으로는 다음 일정도 기다리고 있다. 대학 입학, 새 학기, 취업 준비. 졸업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페이지가 넘어간다.
미국은 조금 다르다. 대부분 8월 말에서 9월 초에 학년이 시작해 5~6월에 한 학년이 끝난다. 졸업식은 초여름에 열린다. 햇빛은 이미 한여름처럼 강하고, 운동장은 뜨겁게 달아 있다.
재미있는 건 졸업보다 그다음이다.
한국은 졸업하고 나면 봄이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졸업하고 나면 여름이 기다리고 있다. 둘 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다는 점은 같지만, 그 사이에 놓인 계절이 다르다.
한국은 겨울을 지나 봄으로 들어간다. 새싹이 올라오고 꽃이 피고 주변도 함께 움직인다. 학교도 새로 시작하고 회사도 새로 시작한다.
"이제 시작이네."
슬롯 전체가 동시에 시동을 거는 느낌이다.
미국은 여름이 한 번 끼어 있다. 졸업은 했는데 바로 시작하지 않는다. 물론 바로 취업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은 여행을 가고, 쉬고,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한마디로 조금 논다.
가을이 오면 다시 움직인다.
미국 졸업식이 어딘가 여유롭게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진도 오래 찍는다. 정말 오래 찍는다.
가족사진, 친구 사진, 친구 가족과 사진, 선생님과 사진, 학교 간판 앞 사진, 운동장 사진, 졸업장 들고 사진, 졸업장 안 들고 사진.
보고 있으면 졸업식인지 사진 촬영회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시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시작을 준비하는 데 익숙하다. 미국은 시작하기 전에 잠시 멈추는 데 익숙하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익숙한 방식이 다를 뿐이다.
예전에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쉬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쉬지 못했다. 빨리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았고, 뭔가를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사람에게도 여름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행도 비슷하다. 예전에는 여행을 가면 하루 일정을 빈틈없이 채우려고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줄이 이동하고, 유명하다는 곳은 다 가봐야 할 것 같고, 사진도 찍어야 하고, 맛집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중간에 카페에 앉아 한 시간쯤 쉬어 가는 여행도 좋아졌다. 물론 나이가 들어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이유도 있다. 그 이유를 완전히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보인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 당장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여행도 결국 속도의 문제였다.
사람마다 자기 리듬이 다르다. 쉬어야 다시 움직이는 사람이 있고, 움직이면서 다음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맞고 틀린 문제는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봄이 먼저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여름이 먼저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계절을 지나고 있었다.
신호등 앞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졸업식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졸업보다 그 사이에 놓인 계절이 더 오래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