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 및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미학과 존재론적 한계]
『변형과 상상력』
문학의 영토가 인간의 대지(大地)를 변혁하고 새롭게 구축하는 실천적 역할을 수행하는 한, 문학은 필연적으로 인간적 가치를 지향하는 목적론적 귀결을 맞이한다. 인간 삶의 총체성을 표현의 대상으로 삼는 문학은 인간 생활 양식의 역사적 추이에 정밀하게 동조하며 진화하기 때문이다.
원시 수렵 슬롯와 전통 농경 슬롯를 거쳐 근대 산업 슬롯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화의 변동은 완만하게 진행되었으며 합리적인 범주 안에서 체계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개인용 컴퓨터와 인공지능(AI)의 출현 이후, 문화적 변천의 궤적은 예측 불가능한 속도로 요동치고 있다. 컴퓨터와 AI의 대두, 그리고 인터넷 문화의 일상화가 이룩한 지난 30여 년 동안의 변화는 인류가 축적해 온 2천 년의 문명사적 대전환과 맞먹는 파괴적 혁신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 또한 이러한 급격한 기술 매체적 전환을 수용하는 내적 조율 과정을 거치고 있으나, 그 변전(變轉)의 속도와 진폭이 워낙 방대하여 이를 하나의 통일적 관점으로 조망하는 것은 극히 지난한 작업이 되었다.
이 급진적인 변화 속도 속에서 현대 문학의 양상은 과거의 본질적 순정성(純情性)을 상실하고, 장르 간의 혼종 혹은 ‘퓨전(Fusion)’이라는 흐름에 직면하고 있다. 탈장르화의 흐름 속에서 산문과 운문의 경계를 해체하는 시도는 이제 보편적인 창작 규범이 되었으며, 디지털 매체의 쌍방향성을 기반으로 한 공동 창작은 독자와 작가의 이분법적 구분을 무화하며 ‘작독자(Wreader, Writer+Reader)’라는 새로운 혼종적 주체를 탄생시켰다. 즉, 작금의 문학은 경계와 위계가 소멸한 탈영토화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비평적 진단이 기술 결정론적 함정에 빠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나, 현재 문학이 마주한 영토적 변화가 지극히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공간에 놓여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1. 속도의 미학과 인간 소외: 기술 주도형 삶의 아포리아
인간이 문명의 변화를 주도하고 수용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 자체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궁지로 모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기술적 속도와 실존적 인간은 모순적인 상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근대 문화의 맥락에서는 인간이 주체로서 속도를 제어하고 지배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역으로 속도가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초래되었다. 가속화된 속도는 현대성을 구성하는 본질적 징표이며, 이를 어떻게 주체적으로 조율하느냐가 현대인에게 주어진 절대적 실존 과제가 되었다. 즉, 근대의 속도가 인간의 노동과 땀방울을 통해 점진적으로 쟁취한 결과물이었다면, 현대의 속도는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기계적 가속도에 의해 인간을 잠식하는 파괴적 성격을 띤다. 우리는 한번 올라타면 중도에 내릴 수 없는 호랑이의 등, 즉 ‘기호지세(騎虎之勢)’의 형국 속에서 기술적 속도와 강박적으로 보조를 맞춰야 하는 소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회는 1970년대 후반 개인용 컴퓨터(PC)의 등장, 특히 1976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촉발한 애플 컴퓨터의 시원으로부터 가속화되었다. 퍼스널 컴퓨터가 보급된 이후 단 수십 년 만에 인류 문명의 발전 속도는 과거 이천 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광범위하고 심오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인류가 도구로서 ‘펜(Pen)’을 쥐고 문화를 서사해 온 물리적 시간의 시대를 ‘제1기의 펜 문화’라고 명명한다면, 디지털 컴퓨터의 출현으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 정보화 시대를 ‘제2기의 자판 문화’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제1기의 펜 문화가 자연적 전원문화와 산업적 기계론의 시대를 아울렀다면, 제2기의 자판 문화는 물리적 시공간의 한계를 소거하며 단일한 글로벌 공동체를 구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인터넷 프로토콜 주소에서 흔히 접하는 ‘www(World Wide Web)’는 전 세계를 촘촘히 연결하는 무형의 그물망을 상징하며, 이를 매개하는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는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를 선형성 없이 유연하게 가로지르는 하이퍼스페이스(Hyperspace)를 의미한다. 이 비선형적 공간 속에서 주체적으로 정보를 항해하고 유영해야 하는 삶이야말로, 제2기 자판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실존적 조건인 셈이다.
이러한 네트워크형 통합 속에서 인류 문명은 시간을 물리적으로 미세하게 쪼개어 통제하는 나노(Nano) 시대로 진입했다. 이는 가시적인 물리적 시각의 시대에서 보이지 않는 미시적 정보의 공간으로 이동했음을 뜻하며, 감각할 수 없는 비가시적 세계를 어떻게 주체적 시선으로 포착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고민을 안겨주었다.
이처럼 미처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박하게 몰아치는 변화의 주기는 문화 전반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고, 소화 불가능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인류는 크게 두 가지 실존적 양태로 분열되고 있다. 첫째는 이 기술적 가속도에 필사적으로 동조하며 변화를 주도적으로 추동하려는 가속 지향형 인간이며, 둘째는 가속 자체를 거부하고 문명적 흐름으로부터 도피하여 침묵을 택하는 체념형 인간이다.
가속 지향형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능동적으로 인지하고 트렌드를 체화하는 현대적 전형성을 보여주는 반면, 후자는 시간의 흐름에서 소외되어 지체된 주변인으로 격하되기 쉽다. 이러한 차이는 현실 공간 속에서 주체적 주권자로서 참여하며 살아가는 삶과, 기술 문명에 대한 소외 혹은 무관심 속에서 의타적으로 끌려가는 삶의 엄연한 격차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가치 체계를 구축하고 슬롯의 구조적 이행을 주도하는 동력은 필연적으로 능동성을 확보한 주체들의 몫으로 귀속된다. 결국, 변화 수용력의 유무에 따라 시대를 주도적으로 직조하는 능동적 주체성과, 주어진 흐름을 수동적으로 연명하는 운명론적 수용성 사이의 실존적 간극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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