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의 천국
영국은 빈티지의 천국이다. 그중에서도 관광객에게 가장 유명한 곳은 노팅힐의 포토벨로 마켓.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영국식 주택,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북적이는 인파와 설레는 골동품의 향연 속에 여행객의 마음도 덩달아 설렌다. 토요일 아침, 빨간 이층 버스, 더블 데커에서 내려 골동품 거리를 따라 걸어 보자.
내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대개 두 곳이다. 하나는 오래된 찻잔이 가득 쌓인 찻잔 좌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세월의 흔적을 가득 머금은 낡은 바카라 더미.
반듯한 식탁보 위에는 저마다 꽃무늬가 다른 찻잔과 받침이 한 세트씩 짝지어 놓여 있다. 그 위로는 우아한 삼단 케이크 스탠드가 탑처럼 솟아 있고, 작은 칠판에 분필로 적은 가격표가 잔마다 꽂혀 있다. 어딘가 아날로그적인 풍경이다.
골동품 시장으로의 변신 — 1940년대 이후
포토벨로가 골동품으로 유명해진 것은 의외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40년대 칼레도니안 마켓이 폐쇄된 뒤 골동품 상인들이 흘러들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60년대 ‘스윙잉 런던’ 시기를 거치며 예술가와 유명 인사들이 모여들었고, 다채로운 파스텔 색채의 빅토리아풍 건물과 더불어 팝 컬처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한때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이곳 좌판에서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팔았고, 빈티지 군복으로 유명했던 ‘I Was Lord Kitchener’s Valet’ 같은 가게는 존 레논, 지미 헨드릭스, 믹 재거 같은 당대 록스타들이 드나드는 성지였다고 하니, 패션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러볼 이유가 충분하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포토벨로 로드는 낙후된 노동계급 동네에서 런던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기 있는 지역 중 하나로 변모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오래된 독립 상인 상당수가 밀려난 점은 어딘가 서글프다.
종이 위의 시간들
손때 묻은 물건은 모두 시간을 품고 있다. 종이도 마찬가지다.
이제 메인 거리를 벗어나 철교를 지난다. 이쯤이면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가득한 북 마켓이 손님을 반긴다. 갓을 씌운 작은 전등이 바카라장을 비추고, 하늘색 종이에 손글씨로 가격을 써 붙인 오래된 바카라들을 눈으로 훑다 보면, 흡사 20세기 초 서양 영화 속으로 타임워프를 한 듯 들뜬 기분이 든다.
빈티지 드레스와 강아지 한 마리
살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하던 그 바카라 가판대를 지나치면 이제 빈티지 드레스가 즐비한 옷 노점들이 등장한다. 멋쟁이 상인들이 좌판 앞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풍경. 천막 아래 분홍 옷걸이엔 빛바랜 빈티지 드레스들이 색깔별로 걸려 있고, 살구색, 크림색, 옅은 하늘색—오래 입어 부드러워진 실크와 레이스가 푸른 하늘 아래 바람에 살짝 흔들린다.
그 곁 바닥엔 커다란 래브라도 한 마리가 배를 깔고 늘어져 있다. 옆엔 파란 물그릇. 지나가던 손님이 허리를 숙여 등을 쓰다듬자, 더위에 지친 래브라도는 지긋이 눈을 감고 그 손길을 즐기는 듯하다. 한낮 시장의 더위와 인파 속에서, 묘한 위로를 주는 평화다.
골목에 묻어 있는 세계의 풍미
거리 위쪽으로 갈수록, 온갖 맛있는 냄새가 여행객의 허기를 깨운다. 여러 문화와 이민자가 뒤섞여 만들어낸 지금의 런던을 보여주듯, 국적조차 생소한 음식들이 즐비하다. 골목 한편엔 베네수엘라식 옥수수 팬케이크 ‘카차파(Cachapa)’를 파는 가판, 그리고 비빔밥을 파는 한식 포장마차까지. 한쪽 철판에선 누군가 장갑 낀 손으로 옥수수 반죽을 눌러 굽고, 그 위에 검은콩과 아보카도, 치즈를 가득 올린다. 또 다른 노점상엔 감자튀김 위에 그레이비 소스를 뿌린 길거리 음식이 고깔에 담겨 있는 등. 세상의 모든 냄새가 이 좁은 골목에 한꺼번에 묻어나 있다.
오늘날의 포토벨로
1999년 휴 그랜트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노팅힐〉은 이 거리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영화 속 주인공이 포토벨로 로드에 살며 작은 서점을 운영했고, 많은 관광객이 그 서점의 낭만을 찾아 이곳을 헤맨다. 지금, 그 낭만적인 여행바카라 전문 서점은 사라졌을지언정 자리와 분위기만은 그대로 남았다. 영화가 남긴 낭만을 찾아오는 여행객과 그 곁을 지키는 동네 사람들 덕분에, 포토벨로 마켓과 작은 서점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사진 저작권자 © Choi Sunyoung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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