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하루는 늘 무언가에 쫓긴다. 아침에는 차 안에서 화장을 하고, 수업과 수업 사이에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 후에는 강의안과 원고를 붙들고 한밤중까지 씨름한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은 줄어들 줄 모르고, 달력의 빈칸은 어느새 마감 날짜로 빼곡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있었다. 점심 식사 후의 산바카라이다.
요즘은 후문 쪽으로 출근을 하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파워워킹반 출석 체크를 하러 나오는 것 말고는 운동장에 나갈 일이 전혀 없다. 학교 안에 있으면서도 운동장 풍경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모르고 지낸 셈이다.
오늘은 문득 그 길이 그리워졌다. 밥을 먹고 나서 교무실로 곧장 향하는 대신, 운동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운동장 주변 산바카라길로 나서자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건넨다. 교실에서 보는 얼굴과 운동장에서 만나는 얼굴은 또 다르다. 수업 시간의 긴장이 풀린 아이들의 표정은 한결 말갛고 정겹다. 인사를 받으며 천천히 걷다 보니,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씩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큰 나무 아래에서 걸음이 멈췄다.
거칠고 두꺼운 나무껍질 앞에 보라색 꽃 몇 송이가 피어 있었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 매달린 꽃잎은 얇고 여려서, 햇빛을 받아 더 선명한 빛깔로 반짝였다. 오래된 나무의 묵직함과 여린 꽃의 산뜻함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참 묘하게 어울렸다.
이 꽃이 여기 피어 있는 줄을 전혀 몰랐다. 운동장에 나올 일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휴대폰을 꺼내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 가며 꽃을 찍었다.
한참 꽃에 빠져 있는데, 지나가던 여학생 하나가 말을 건넸다.
"선생님, 너무 예뻐요."
나는 당연히 꽃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치? 꽃이 정말 예쁘지? 그래서 사진 찍고 있어."
그런데 아이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니요. 꽃도 예쁘지만, 그 꽃을 보는 선생님이 더 예뻐요. 궁궐 뜰을 거닐다 꽃을 바라보는 왕비 같아요. 사진으로 선생님을 찍어 드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왕비라니. 그저 바쁜 틈에 잠깐 쪼그려 앉아 꽃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뿐인데.
"오, 정말? 고마워. 그럼 이 폰으로 샘 사진 몇 장 찍어 줄래?"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휴대폰을 받아 들고 셔터를 마구 눌렀다. 그 모습을 보고 하나둘 아이들이 모여들더니, 어느새 빙 둘러서서 웃으며 "예뻐요, 선생님!" 한다.
세상에나. 환갑이 다 된 나이 든 교사가 운동장 산바카라길 위에서 이런 환호를 받다니.
쑥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얼른 휴대폰을 돌려받고 정말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이들이 흩어진 뒤, 나는 다시 꽃 앞으로 돌아가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이번에는 꽃 옆에 드리운 내 그림자까지 함께 담았다.
교무실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했다.
산바카라은 건강을 위한 시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그 길 위에서 만난 것은 운동 효과가 아니라, 꽃 한 송이와 아이들의 웃음, 그리고 뜻밖의 칭찬 한마디였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그 길에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다.
돌아보면 참 정신없이 달려온 몇 주였다. 강의 준비에, 시험 문제 출제에, CHaT 루틴 도서 출간 작업까지 겹쳤다. 게다가 오늘은 지식샘터 수업 사례 공모 작품 제출 마감일이다.
그 사이 반가운 소식도 있다. 성경 컬러링북이 드디어 완성되어, 오늘 ISBN을 신청한다.
처음에는 한 권을 내려고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주변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읽는 사람의 수준에 맞춘 바카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초등 1·2학년용, 3·4학년용, 그리고 고학년 및 성인용까지 세 종류로 나뉘게 되었다. 여기에 종이바카라과 전자바카라의 ISBN이 각각 필요하니, 모두 여섯 권을 한꺼번에 세상에 내놓게 된 셈이다.
이번에는 수고로움이 훨씬 더했다. 지금까지의 컬러링북은 종이 위에 색칠하는 것으로 끝이었지만, 이번에는 디지털 색칠판까지 함께 만들었기 때문이다. 종이 앞에 앉아 색연필을 드는 아이도, 태블릿 화면 위에서 손끝으로 색을 채우는 아이도 같은 말씀을 마음에 담아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ISBN 신청을 마치면 곧 출간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와 함께, 또는 나 자신을 위해 말씀을 한 장씩 색칠해 보고 싶은 분들께 좋은 벗이 되기를 기대한다.
지식샘터 공모에 작품을 내는 것은 상을 타기 위해서라기보다, 이것을 빌미로 나의 수업 사례를 정리해 두고 싶어서다. 이런 계기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어 정리하기가 도무지 어렵기 때문이다. 마감은 때로 나를 조이지만, 그 덕분에 흩어져 있던 기록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도 한다.
오늘 하루를 통틀어 가장 여유로웠던 시간은, 아마 보라색 꽃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그 몇 분이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은 여전히 산더미 같지만, 그 짧은 멈춤 덕분에 오후를 다시 힘내어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꽃이 아니었다.
꽃을 보는 선생님이 더 예쁘다고 말해 준 아이의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그 어떤 꽃보다 예뻤다. 아이들은 늘 교사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먼저 알아봐 준다. 바쁘다는 핑계로 나조차 돌보지 못한 나의 모습을, 아이는 한눈에 알아보고 "예쁘다"고 불러 주었다.
바쁠수록 잠깐 멈춰 서야 한다는 것을, 오늘은 한 아이의 말과 보라색 꽃 한 송이가 가르쳐 주었다.
후문으로 오가는 길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었을 꽃이다. 가끔은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해 보려 한다. 큰 나무 아래 그 꽃이 조금 더 오래 피어 있기를, 그리고 나도 그 꽃을 알아볼 여유를 잃지 않기를.
#점심산바카라 #교사일상 #중학교영어교사 #학교풍경 #보라색꽃 #소확행 #교직일기 #퇴직을앞두고 #지식샘터 #수업사례 #성경컬러링북 #디지털색칠판 #출간예정 #CHaT #이선 #EduSun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