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 5기 모임을 했습니다. 각자가 AI를 활용해 본 사례를 발표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나 잘 안되어 궁금한 점 등을 서로 나누는 모임입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다양한 직업과 용도로 AI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됩니다.
저는 요즘 한창 쓰고 있는 클로드 맥스 요금제의 Fable 5.1 모델로 강의 준비와 바카라 출간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사례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한 강사님이 발표 중에, 요즘 경찰이 자기 집을 압수수색했다고 가정하고 내 집에서 압수될 만한 물품 목록과 사진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프롬프트가 유행이라고 하더군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표를 듣는 중에 저도 클로드에게 한번 시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목록이 나왔습니다.
어느 날 아침, 경찰이 집에 들이닥쳤다고 가정해 봅니다.
영장을 펼쳐 든 수사관들이 서재로 들어섭니다. 그들은 훈련받은 대로 움직입니다. 서랍을 열고, 바카라장을 훑고, 바카라상 아래를 들여다봅니다. 무언가 은밀한 것, 숨겨 둔 것, 값나가는 것을 찾는 눈빛입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수사관이 처음 집어 든 것은 색연필 한 통이었습니다. 스물네 자루 중 절반은 손가락으로 쥐기도 어려울 만큼 닳아 있습니다. 특히 노랑과 연두와 하늘색이 짧습니다. 어두운 색은 아직 깁니다. 마음을 색칠하다 보면 밝은 색부터 없어진다는 걸, 아마 그는 모를 겁니다.
요즘 그 색연필이 가장 오래 머무는 종이는 출간 마무리 작업 중인 『CHaT 루틴 성경 컬러링북』의 시안입니다. 직접 칠해 보며 한 장씩 확인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원고 뭉치입니다. 같은 문장이 대여섯 번씩 고쳐 쓰여 있고, 여백마다 같은 질문이 적혀 있습니다. "이건 아이들이 알아들을까?" 38년 동안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질문입니다. 상습이라면 상습입니다.
세 번째는 마인드맵 출력물입니다. 가운데 동그라미 하나에서 가지가 열두 개쯤 뻗어 나가 있습니다. 수사관이 묻습니다. 무엇을 꾸미려던 겁니까. 저는 답합니다. 꾸미는 게 아니라 펼치는 겁니다.
네 번째는 영어 명언 카드 예순 장입니다. 모서리가 둥글게 닳았습니다. 여러 사람의 손이 여러 번 만졌다는 뜻입니다. 카드 뒷면에는 저마다 질문이 하나씩 적혀 있습니다. 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그게 하브루타입니다.
그 질문들을 오래 모으고 다듬어서 한 권으로 묶은 것이 『질문하는 인문학 시리즈 1』입니다. CHaT 인문고전 컬러링 하브루타 시리즈의 첫 권이지요. 고전의 한 문장을 덩어리로 쪼개고, 짝과 묻고 답하고, 그 생각을 색으로 정리하는 과정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말하자면 이 카드 예순 장이 자라서 바카라이 된 셈입니다.
다섯 번째는 식은 커피입니다. 새벽에 내려놓고 절반도 못 마신 잔. 무언가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여섯 번째는 학생들의 러닝로그 노트입니다. 수업이 끝날 때 오늘 배운 것을 정리하는 칸인데, 짧게 끝낼 줄 알았던 아이가 생각보다 길게 써 놓은 날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수사관 한 명이 조용해집니다.
수사는 그렇게 끝납니다. 혐의 없음. 압수된 물건은 모두 반환 가능. 다만 조서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힙니다. 생각을 덩어리로 쪼개고, 질문으로 나누고, 지도로 펼치는 행위가 38년간 반복되어 온 사실이 확인됨.
저는 그 문장을 오래 들여다봅니다. 누군가 제 삶을 압수해서 목록으로 만든다면 남는 게 고작 이런 것들이구나 싶어서요. 그리고 동시에, 고작 이런 것들이어서 다행이구나 싶어서요.
정작 그들이 가져가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원어민 교사 앞에서 자기 좌우명을 영어로 말하던 아이들의 목소리. 녹음은 해두었지만 압수 목록에는 오르지 않았습니다. 수사관에게 들키지 않고 따로 보관 중이니까요.
재미가 붙어서, 똑같은 프롬프트를 ChatGPT에게도 넣어 보았습니다.
결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ChatGPT는 실제 사진 같은 한 장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거실 탁자 위에 물건들이 번호표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고, 뒤쪽에는 '경찰' 조끼를 입은 사람들과 '압수물'이라고 적힌 상자가 보입니다. 오른쪽에는 깔끔한 목록표가 붙어 있습니다.
노트북, 스마트폰, USB 메모리 여러 개, 외장 SSD, 연구·강의 자료철, CHaT 루틴 원고 묶음, 아이디어 메모장, 명함과 홍보자료. 여덟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붙였습니다. 금품이나 수상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고, 대신 원고와 강의자료와 끝없이 이어지는 메모와 질문들이 대량 발견되었다고. 특히 '다음에는 뭘 만들까?'라는 아이디어가 여러 저장장치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고.
마지막 한 줄은 이랬습니다. "혐의: 교육과 집필에 지나치게 진심인 죄(?)"
웃음이 났습니다. 그리고 곧, 두 결과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ChatGPT가 압수한 것은 도구였습니다. 노트북, 스마트폰, USB, 외장 SSD. 제가 일하는 데 쓰는 물건들입니다. 눈에 보이고, 값을 매길 수 있고, 실제로 압수수색을 당한다면 정말로 봉투에 담길 것들이지요. 그래서 그림이 사실적입니다. 사진처럼 보입니다.
클로드가 압수한 것은 흔적이었습니다. 닳은 색연필, 고쳐 쓴 원고, 식은 커피, 답글이 더 긴 노트. 값으로 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대신 그 물건이 어떻게 닳았는지를 봅니다. 왜 노랑이 먼저 없어졌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는 제 바카라상 위를 위에서 내려다본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제 바카라상 앞에 앉아 본 결과입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SNS에 올려서 함께 웃기에는 ChatGPT의 이미지가 훨씬 좋습니다. 한눈에 들어오고, 번호가 매겨져 있고, 유머도 분명합니다. 반면 클로드의 결과는 이미지보다 문장이 남습니다. 읽다 보면 조용해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ChatGPT는 제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클로드는 제가 무엇을 해왔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거울이더군요
재미로 시작한 프롬프트였는데, 결과를 읽다가 마음이 조용해졌습니다. AI가 제 집을 뒤진 게 아니라, 제가 제 집을 처음으로 낯선 눈으로 본 셈이었습니다.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다른 답이 나온 것도 결국 그렇습니다. 두 AI가 제 집을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그동안 나눈 이야기들, 쌓아 온 자료들, 던졌던 질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되비쳐 나온 것뿐이지요. 거울이 두 개면 두 개의 상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퇴직까지 3년이 남았습니다. 학교를 떠나는 날, 저는 아마 이 물건들을 상자에 담아 나올 겁니다. 몽당 색연필과 닳은 카드와 고쳐 쓴 원고를요. 누가 보면 버릴 것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압니다. 이게 제가 가진 전부이고, 또 전부여도 괜찮은 것들이라는 걸요.
압수해 가도 좋습니다. 어차피 다시 만들 수 있으니까요.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질문하는 인문학 시리즈 1』도, 곧 나올 『CHaT 루틴 성경 컬러링북』도 그렇게 만들어졌고, 앞으로 나올 것들도 그럴 겁니다.
혹시 여러분의 집에서는 무엇이 압수될까요? 한번 시켜 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가능하면 두 군데 모두에 물어보시고요. 어느 쪽이 더 당신을 닮았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꽤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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