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당연히 명리학은 그런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에게 운명의 중요성을 설파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자유의지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고, 이 바탕에는 모든 슬롯적 형태에서의 가장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의 자유를 최우선의 가치를 둔다는 합의가 깔려 있다. 운명을 추리한다는 결정론적인 어감이 강한 단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팔자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함부로 무시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자유의지와 결정론 사이에는 묘한 역설적 관계가 존재한다.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근본적인 동기부여는, 일종의 결정론적인 믿음에 근거하고, 결정론적인 인식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발현하게 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과 시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여행을 떠난다면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토대로 많은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들이 만들어 졌는데, 거기에는 시간여행을 거슬러 개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야말로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Destiny, Fate, Luck 모두 어떤 후천적인 노력이나 우연으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바뀌지는 않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대부분의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들도 많은 주인공들이 시간을 거슬러 운명을 바꾸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예정된 결론은 바꿀 수 없다는 일종의 비극적인 인식으로 마무리 된다. 그 흐름은 다소 달라질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결론은 같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명리는 필연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구성된 결정론이 아니다. 명에 대한 고인들의 관념은 현대인들의 경직된 사고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 명리학의 백과사전격이라 할 수 있는 삼명통회에서 말하는 인간의 운명과 명리학의 관계는 널리 통용되는 교조적인 명리에 대한 편견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릇 명은 음양에서 내려 받는데 생하는 초에 사람의 힘으로 내려 받아지는 것을 바꿀 수 없고, 바꾸지 말아야 하고, 바꾼다하여도 당사자는 바꿀 수가 없다. 태어남에 있어서 부유한자, 가난한 자, 수명이 긴자, 일찍 죽는 자, 또 가난하고 천한자, 또 인간 이하가 된 자, 수명이 길게 부여 받았지만 일찍 죽는 자, 또 태어날 때 요절할 명인데 오래 사는 자 이 모든 것은 업보에 말미암아 자연히 간여되고 또 성에 말미암아 자연히 간여된다.
업보에 적선을 많이 한 자는 가난한데 부유하게 되고, 천한데 귀하게 되고, 요절인데 수명이 길게 된다. 예전에 사람이 하늘을 능가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성품을 닦음으로 이 또 한 가능하다. 부귀한 자는 끝까지 부귀하고, 빈천한 자는 끝까지 빈천하고, 요절하는 자는 요절하게 되는 이를 두고 예전에 이르기를 명은 바꿀 수 없다고 하였지만, 오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업보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면 성품으로 바꿀 수 있다.
업보에 의거하여 운명에 내려진 부, 귀, 수, 요, 빈, 천의 어떠함이 있게 되고, 또 성품에 의거하여 부, 귀, 수, 요, 빈, 천이 어떠함이 있게 된다. 그래서 사람에게 업보도 중요하고 성품도 중요한 것으로 후생을 위하여 적선을 하고, 또 현생을 위하여 성품을 닦아야 한다. 명은 바꿀 수 없다고 하여 마냥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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